2008.8 |
[문화현장] 오정숙 명창 영결식
관리자(2008-08-13 15:05:25)
故 오정숙 명창의 영전에
최동현ㅣ군산대학교 교수
오정숙 명창이 일흔셋을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평생 오정숙 본인이 존경해 마지 않던 김연수 명창의 고향인 고흥에서 개최할 행사 때문에 고흥에 가던 도중 쓰러졌다가, 회복하지 못했다. 지병이었던 당뇨와 고혈압의 합병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오정숙 명창의 죽음과 함께 판소리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 당대 최고의 여자 소리꾼으로 해방 후 제2세대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했던 성창순, 오정숙, 성우향의 시대가 이제는 끝난 것이다. 물론 성창순 명창은 아직 건강하게 활동에 임하고 있지만, 성우향 명창은 건강 악화로 무대에 서지 못한다. 라이벌이 없으면 라이벌들을 통해 경쟁하던 시대는 끝난 것 아닌가.
오정숙 명창은 현대 판소리를 대표하는 김연수 바디 판소리의 전도사였다. 김연수 바디 판소리는 김연수 명창이 현대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만든 판소리이다. 김연수 명창이 생각했던 판소리는 바로 연극성이 강화된 판소리였다. 김연수 자신은 데뷔 이후 줄곧 창극에 전념해 온 사람이었다. 극을 통해 판소리를 발전시키고자 했던만큼 판소리에서 연극적 요소를 최대한 강조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착안은 크게 성공하여 마침내는 김연수 바디 판소리가 가장 중요한 현대 판소리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김연수의 판소리는 오정숙이 없었다면 현실 속에 뿌리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오정숙은 김연수의 판소리를 오롯이 전승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정숙은 김연수로부터 판소리 다섯 바탕을 물려받아 한 평생 그 판소리를 전승하는 데 전념하였다. 오정숙이 전북 사람이기 때문에(태어난 곳은 마산이지만, 일가친척이 사는 실질적인 고향은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이다.) 전북에 머물며 전북에 자신의 판소리를 퍼뜨린 것이다. 그래서 전북은 김연수 바디 판소리의 강력한 전승지, 튼튼한 보루가 되었다. 전북에서 김연수 바디 판소리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만 네 명이니, 사정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정숙 명창이 김연수의 유일한 제자이고, 또 그 판소리를 전승하려는 의지가 아무리 강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단시간에 한 지역을 석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정숙 개인의 판소리적 능력이 오늘날의 김연수 판소리를 있게 했다는 말이다. 모두 잘 알다시피 오정숙은 판소리 공연 능력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였다. 공연 중에 청중을 휘어잡고 무대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남자에 박동진이 있었다면, 여자에 오정숙이 있었던 것이다.
김연수 바디 판소리는 연극성을 극대화한 판소리하고 하였다. 오정숙 또한 그러한 특성에 맞는 소리꾼이었다. 특히 오정숙은 <춘향가>의 월매 역할로는 박초월 이후 최고의 소리꾼이었다. 월매가 누군가? 바로 조선조 후기 전형적인 서민이 아니던가? 오정숙이 당대 최고의 월매 역할을 했다면, 이는 오정숙이 서민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오정숙 자신이 서민적인 판소리를 했다는 말과 같다.
오정숙 명창은 자신의 소리 다섯 바탕을 음반으로 남겨놓았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육신은 갔어도 예술은 남아 늘 떠나간 사람을 그립게 할 것이다. 생전에 남다른 인연이 있었던 필자로서는 참 오래 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때마다 고인이 남기고 간 소리를 들을 것이다.
오정숙 선생님, 이제 이승의 일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