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8 |
[신귀백 영화엿보기] 그들 각자의 영화관, 2007
관리자(2008-08-13 15:02:00)
프롤로그, 칸영화제 60주년 기념영화
칸에서 역대 황금잎사귀 상을 가져간 35명의 감독에게 ‘영화관(館)’ 하면 떠오르는 느낌을 주제로 3분 내로 영화를 찍어오란다. 허참, 회갑잔치에 보여줄 '영화관(觀)' 이것 잘해야 본전이다. 왜?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여럿이 모이면 저절로 순위가 매겨지는 법. 순위를 매기는 일이라고 어디 쉽나. 선수 중에서 일류나 하류를 골라내는 일이 결국은 취향과 영화 읽는 수준과 연결된다는 부담이 따른다(리뷰를 쓰는 이도 지극히 부담스럽다). 감상하는 이도 3분 안에 내용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도 쉽지 않지만 서른 세 번의 크레딧을 통해 감독이나 배우를 파악하는 일은 피곤한 일. 영화를 만든 이들 35인은 한 방향으로 이끄는 조직된 선원이 아니라 모두 다 선장이니 배가 갈 길은 뻔하다. 몰입하고 또 정리할 시간도 없이 막 흘러가니 좀 멀미가 날밖에.
콩고 노천극장의 나무의자, 전쟁시 타이페이 극장앞 좌판, 낡고 오래된 그리스의 극장과 프랑스의 최신식 멀티플렉스까지 세계의 모든 영화관에 얽힌 33개의 이야기들은 우리를 시네마 천국으로 안내하는데, 아쉽게도 코리아 영화는 남과 북 어디에도 없어 전주와 평양의 극장은 없다. 어쨌거나, 이 영화들 짧기가 잎사귀 같아서 시로 말하자면 하이쿠 같은 것일진대, 누구에게는 낭만이며 누구에게는 상처다. 크레딧을 안 보고도 작가를 맞출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즐거운 일일 것이다.
유쾌한 단편들
영화의 오프닝이었던, 레이먼드 드파르동의 <야외극장>. 아마도 아랍 어디쯤 보수적인 동네일 것 같은 해질녘 야외극장에 서서히 저녁이 온다. 영사막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젊은이들 중에는 히잡을 착용한 여성도 많다. 이들에게 영화관에 간다는 것은 금기의 세계에의 접근이란 것을 영화를 감상하는 젊은이들의 눈을 통해 말없이 서술한다. 스크린에 비친 야한 옷차림의 서양남녀를 바라보며 '거 참' 하는 눈빛이 그걸 말한다. 그리고 극장 밖을 나온 연인들의 발걸음은 한 시대를 건너뛰는 것처럼 한결 가볍고 동작은 자유스럽다. 맞다. 칠팔십 년대 우리도 그랬다.
3분은 감정이입이 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 감정선을 따라가야 하는 비극보다는 아무래도 희극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런 점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에로틱 영화보기>는 유쾌하다. 점잖은 중년 부부가 <엠마뉴엘>을 보는데 저 뒤쪽에서 한 남자가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여기에는 골 때리는 반전이 숨어있다(스포일러 때문에 말할 수 없다). 라스 폰 트리에의 <그 남자의 직업>은 한참 질릴 때 터뜨려준 홈런이어서 크레딧 읽느라 피곤한 관객들의 지루함을 한방에 날린다. 자신의 영화 <도그빌>을 상영하는 극장에서 감독은 턱시도를 입고 영화에 몰두하는데, 글쎄 수입업자쯤이나 될까? 이 남자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귀를 막고 참고 또 참다가 결국 라스 폰 트리에는 극장에서 떠드는 이 남자의 머리를 도끼로 바숴버린다. 영화관에서 소리 없는 애정행각은 자유지만 휴대폰 문자 주고받는 젊은 새끼들, 의자를 발로 건드리는 놈, 비니 쓴 키 큰 청년들 모두 망치로 내려치고 싶은 관객들의 마음을 담았다. 후련하다.
칸이 헐리우드와 다른 점은 그래도 보수적 전통과 문화의 발상지는 유럽이라는 자부심 아니던가.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어둠 속의 그들>은 흘러간 은막의 시간들을 소중한 자산으로 기억한다. 영화관을 오르는 계단과 기둥들 그리고 육중한 문이 열리고 수많은 좌석 앞 스크린에는 <8과 1/2>의 엔딩크레딧이 흐른다. 마스트로얀니와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늙은 여주공인은 이 영화를 보고 또 본다. 여기 이 같은 공간 안에서 숨넘어가는 짓거리를 벌이는 젊은 연인들을 너그럽게 내버려 둘 줄 아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광팬 아줌마는 울고 있지만 관객의 입가에는 미소가 맴돈다.
한때 장만옥의 남편이었던 <클린>의 감독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아이러니>는 가장 확실한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현대식 멀티플렉스 앞에 한 여인이 스쿠터에서 내린다. 남자가 표를 끊고 콜라를 사서 극장으로 들어가는데 이 커플을 지켜보는 한 이상한 남자. 연인은 여자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화면에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키스에만 열중하는 남과 여. 이들이 키스하는 사이에 이 남자는 여자의 가방을 훔쳐 달아난다. 그리고 극장밖을 나온 여자가 전화를 걸 때, 관객석에서는 허,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빌 어거스트의 <마지막 데이트>는 55개의 컷으로 되어있다. 짧은 컷들이 조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데, 한 후줄근한 덴마크 남자와 인도 여성이 극장엘 간다. 둘의 첫 데이트인데 여자는 덴마크어를 잘 모르기에 남자는 엉뚱한 통역으로 여자를 꼬시려 한다. 아무리 외국어를 몰라도 화면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고전영화 <잔다르크의 수난>을 보면서 문자질과 사진전송 그리고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는 두 사람의 행위를 보여주는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은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우습거나 괴롭거나
단편 속에서 비장함이나 숭고라는 것은 좀 우습던지 아니면 괴롭던지 둘 중의 하나다. 또 저항이나 교훈을 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 아닌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라는 <바벨>과 <21g>을 만든 이. 그의 작품 <애나>에서 여자의 손을 비추는 오프닝 씬 그리고 울고 있는 여자의 클로즈업이 보여주는 중성적 톤은 아름답지만 3분 안에 감정이입을 바라는 건 감독의 무리다. 우는 여자, 담배 피는 여인과 맹인 이야기가 겹쳐서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 차일드>로 저 징그러운 철부지들의 가벼움을 담았던 다르덴 형제의 작품 <어둠 속에서>는 아양스러웠다. 오프닝 씬에서 어둠 속에서 클로즈업된 손이 등장하는 것도 형제답지 않았는데 영화에 감동한 젊은 여자가 철철 운다. 아무리 감동스럽기로 소매치기 소년의 손을 잡고 운다니, 철들었나?
빔 벤더스의 <평화 속 전쟁>은 수려한 저녁하늘 그리고 아이들의 노랫소리로 시작한다. 콩고의 어느 시골 마을, 막대기로 총 쏘는 흉내를 내던 때국물에 전 꼬마아이가 간이 극장에 들어선다. 볏짚으로 하늘을 가린 천막 아래 간이 의자를 놓은 비디오극장에서는 미국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이제 카메라는 비디오를 상영하는 천막 안 어린 관객의 놀람과 공포감을 붙드는데 극장 안 장면은 흑백영화가 아닌데도 흑백이다. 큰 아이들은 고통이 뭔가를 배우고 공포에 질린 어린 아이는 아빠의 등에 얼굴을 파묻는다. 낡은 TV에서 나오는 화면은 다름 아닌 <블랙호크 다운>이란 것이 암시될 때쯤, 자막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이 이 곳에 평화가 깃든 첫 해임을 말해준다. 짠해지는 순간.
아시아 영화들
기타노 다케시! 최고다. <어느 좋은 날>의 허름한 영화관의 바깥풍경은 이와이 슈운지다. 노을 아래 드넓게 펼쳐진 저 들판 삼거리에 낡은 극장이 있고 한 촌사람이 "농부 1장!"하며 표를 산다. 상영되는 작품은 뻔뻔스럽게도 다케시가 만든 <키즈 리턴>이다, 하하. 필름이 끊어지는 극장에서 농부는 담배를 벅벅 피우는데 영사기사는 잠간 기다려 달랜다. 다시 필름에 불이 붙어 당황하는 영사기사 역시 다케시, 뻔뻔하고 귀여워라.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자전거 탄 젊은애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자전거도 없이 농부는 그냥 노을 속으로 걸어간다.
장예모의 <영화하는 날>은 1977년 어느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흑백으로 담는다. 포장 친 스크린 앞에서 까까머리 꼬마부터 영화상영하는 영사실의 건전남과 그의 반려가 될 건전녀 그리고 동네사람 모두 너무 평화롭고 천진하다. 아이들은 영화 속 장면처럼 쿵푸를 하거나 총 쏘는 시늉으로 지겨운 기다림을 때울 때, 이윽고 해가지고 영사기가 돌아간다. 동네 주민들의 웃음으로 해서 영화상영 날이 마을의 잔치가 되는 장면들은 전원일기 스타일이다. 첸 카이거의 단편 <장수 마을>의 자전거 발전기로 영사기를 돌리는 장면도 마찬가지여서, 이 두 새마을스러운 영화가 하나로 짬뽕되어 떠오른다. 이 중국감독들의 단편은 화합해서 올림픽을 잘 치러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읽힌다.
<이걸 주려고 9천 킬로나 날아왔어요>는, 왕가위다. 공간감이 넘치는 조명을 사용한 붉은색 의자커버, 빨간 구두, 허벅지를 더듬는 몽환적인 영상, 역시 그의 작품은 스타일에 치중한다. <동사서독>외에 그의 작품을 다시 본다는 것은 이제 좀 그렇다. 후샤오시엔의 <The electric princess picture house>의 간판은 <셸브루의 우산>. 엄마는 서기, 아빠는 장첸, 이 가족들은 입구의 빨간 장막 통해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오버랩 되는 빨간 장막 안은 아무도 없고 허름한 극장에서는 갑자기 브레송의 영화의 한 장면이 덜컥 상영된다. 극장 앞 옥수수 파는 노점상에서의 군것질은 감독의 어린 날 영화관에 가는 날이 소풍날이었다는 것, 감독님 부디 장편도 이렇게 친절하게 만드시지. 차이밍량의 <是夢>에서는 영화관에서 두리안을 까먹는다. 아버지는 젊은 아버진데, 어머니는 할머니다. 좌석에 놓인 외할머니의 사진과 함께 소년 '나'가 함께 극장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시간의 흐름을 알린다. 옛날 중국 극장에서는 깎은 배를 꼬챙이에 끼워 팔았나 보다. 귀여운 차이밍량, 그도 이젠 커서 전주에서 얼굴보기가 어렵다.
기타 3분
<칸에서 5557마일 떨어진 마을>은 <중앙역>을 만든 월터 살레스의 브라질판 품바타령이다. 간판에 걸린 <400번의 구타>가 포르노 아니냐는 랩 사설로 엮이는 타령 속에는 칸을 우습게 보는 오만과 칸에 가보고 싶은 마음도 숨어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로미오는 어디에?> 여기선 관객이 된 젊은 여자 늙은 여자 할 것 없이 히잡을 쓴 여자들 모두 운다. 그 여자들 모두 자기의 로미오를 생각한다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청승맞다. 이란 영화는 모두 여기까지다.
난니 모레티의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의 일기>에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봤던 <가을의 전설>과 자신의 영화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는데 아들에게 자신의 영화와 <매트릭스>는 성격이 다르다고 말한다. 허허. 구스 반 산트의 <첫 키스>는 미소년 취향, 제인 캠피언도 한참 떨어진다. 그래도 맨 마지막에 나온 켄 로치의 <해피 엔딩>은 영화 아니고 축구면 어때? 영화가 뭔데?, 하는 어깨에 힘을 뺄 줄 아는 선수의 모습으로 편하게 극장을 떠날 수 있게 한 제작자의 편집의도 아닐까.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잔 모로가 등장하는 <3분>은 극장을 사원으로 생각하는 테오 앙겔로풀로스 스타일로 켄로치와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마이클 치미노 그리고 코엔 형제 이 양반들은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쓰이는 것을 반대했다나, 그래서 33편인 것.
에필로그, 제 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해안의 오리(Cane) 때문에 이름 붙은 물고기를 잡던 작은 항구도시가 필름을 통해 세상에 이목을 끈 지 60년이 흘렀다. '작게 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크게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도입부의 메시지는 너무 큰 기대하지 말라는 칸의 엄살이었을 것이다. 사실 서른 세 번의 암전의 경험은 테피스트리가 되지는 못했다. 의자 뒤 영사실에서 쏟아지는 빛들로 보여준 것들은 환갑잔치의 뷔페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옴니버스라는 음식치고 재미있는 꼴을 못 보았다. 올해 전주 국제 영화제 폐막작이 또 그랬다. 연전의 <여섯 개의 시선>보다 밀도가 훨씬 약했다. 감독에게 독립영화의 자유를 주고 상업영화처럼 상영하게 하는 '디지털 삼인삼색'의 제작을 재미와 유머로 갈 수는 없는 걸까. 영화제의 필모그라피를 두툼하게 만드는 것은 성공했을지언정 전주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고통이 차 있을 것이기에.
별 번역이 없어도 흘러갈 이 칸이 만든 각자의 영화관에 한국감독이 한 사람도 이름을 올리지 못함은 섭섭한 일이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터키의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이 칸의 심사위원이 된 것처럼 고은이나 황석영이 전주영화제 심사위원을 할 수는 없을까? 2019년 쯤, 이창동이나 박찬욱 아니면 홍상수가 조직위원장을 맡는다면? 전주영화제 20주년을 기념해서 <사랑해 파리>같은 영화를 제작지원하는 것은? 감독 10명이 10분짜리 스케치 10편 <사랑하는 전주>를 찍어 완성된 영화를 만들면? 슬라이스 치즈 말고 곶감 한 줄 한 줄 빼먹는 즐거움을 주는 전주국제영화제를 기대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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