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8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관리자(2008-08-13 14:59:19)
이 소리가 얼마나 고귀한 소리냐?
구술 이정호ㅣ 정리 김선경ㅣ 사진 유백영
순창 강천산 계곡 입구의 한 식당. 계곡물 소리 대신 노랫가락이 흘러나옵니다. 막걸리 한 잔 걸친 할아버지는 흥이 돋친 모양입니다. 약속한 ‘기자’가 왔는데도 ‘노래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눈시늉만 하고는 내쳐 소리를 하십니다. 한여름 찜통더위,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니 귀가 시원해집니다. 부를수록 목이 맑아진다는 앞소리꾼 이정호 할아버지. 누가 시키든, 어디서 시키든, 뒤로 빼는 법이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있는 곳에는 항상 들소리 한 자락이 흘러 다닙니다. 논두렁 밭두렁에서 부르던 들노래가 이제는 계모임 식당에서, 전수관 마당에서 불려집니다. 험한 세월 죽지 않고 살아난 노래입니다. 논매던 사람은 갔어도, 소 타던 상머슴은 사라졌어도, 그 자리에 소리는 남았습니다. 70년 세월 들소리 지켜낸 보람 하나로 살아온 이정호 할아버지. 이제는 어엿하게 문화재 칭호까지 얻게 됐지만, 할아버지는 그저 소리가 좋은 농사꾼일 뿐입니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흥겨운 들소리 가락이 저절로 들려오는 듯합니다
1일 3식 허는 거, 그것이 최고여
제가요. 대동아전쟁이 한참 무르익고, 해방 전, 해방 6년 전에 태어났어요. 내가 여섯 살 묵어서 해방이 되얏소. 내가 태어난 마을이 매우마을인디, 옛날에는 모정리라고 혔어. 원래 우리 마을 이름이 매화매(梅)자 비우(雨)자 매우마을인디 인물이 많이 나옹께 일본놈들이 ‘모정리’로 이름을 바꽈부렀어. ‘띠밭’ 되아부러라~ 허고. 띠모(茅)자 모정리! 그니까 면서기 하나도 안 나왔대. 그래가지고 다시 “왜정 때 우리가 미워서 일본놈들이 촌이름을 바꽜는데 인자 바꽈주시오!” 해가지고 금년 1월1일부터 매우로 바꾼 거여. 마을 이름을. 그런 사연이 있는 마을이여.
그러고 인자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였지. 국민학교 5학년 때 육이오 동란이 일어났어요. 그 난리 속에서 우리가 자랐거든요. 그때는 나라가 안정이 안 되든 그런 시기라 높은 학교도 못 보내고 농사만 지었지. 그때는 농경문화가 최고였잖여? 농경문화사회에서는 농사를 짓는 것이 최고여. 학교 댕기는 것보담도. 1일 3식 허는 거, 그것이 최고여.
그러니까 초등학교 졸업허고는 어른들 밑에서 뒤따라 댕김서, 모 심으먼 못자리도 갖다 주고, 논을 매면, 그때는 논을 호미로 매거든요? 논을 매먼 인자 나락이 씨러지먼 고 놈도 일으켜 세워주고, 그럼서 농사에 전념을 했는데, 그때는 수작업으로 허기 때문에 품앗이를 혀. 나는 니야 해주고, 니는 내야 해주고. 그래가지고 열 명씩, 스무 명씩, 요러케 해서 품앗이를 해가지고 돌아다님서 오늘은 누야 모 심어주고, 내일은 누야 모 심어주고, 품앗이를 수작업으로 했어요.
그냥 허냐? 아녀! 노래를 혀! 농요를 혀! 농요를 허는디, 모심을 적에는 모심는 노래가 있고, 호미질 헐 때 부르는 노래가 있고, 한 벌 맬 때 부르는 노래가 있고, 두 벌 매고 만드리 헐 때 부른 노래가 있어.
그먼 인자 어른들이 그것을 부를 때, 거그서 젤로 첫소리꾼이 있어. 매김소리 허는 사람. “오늘도 우리 심심허니 일허먼서 모심으면서 장원소리나 해보세! 그러세에~!”그럼서 인자 막 첫소리꾼이 첫소리를 혀. “여어 여어 여어 여허루 상사~뒤여” 그러면 그 놈을 뒤에서 싹 따라서 혀. 첫소리꾼이 “여기도 꼽고 저기~ 저기도 꽂아나 보세~” 그러먼 인자 뒷소리꾼들이 여허여허루 상사뒤여 뒷소리를 따라서 받고.
그것을 항상 혀. 올해도 허고 내년에도 허고. 익히 들어서, 우리가 70년대까지는 그것을 듣고 살았제. 70년대 넘어서 기계화가 되등만. 모는 이앙기가 심고, 논은 제초제가 매고, 그렁게 품앗이가 사라지고, 그래서 들소리가 사라진 지가 70년대부터니까 근 40여년 가까웁게 없어졌어.
우리 선조들이 참 대단혀
옛날에는 마을마다 다 농요가 있었지. 근디 그 소리가 한 40년 되니까 사라졌죠. 68년도, 70년대 이전까지는 드문드문 했어요. 60년대까지는 계속 했고. 근디 60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허자고 해가지고 통일벼 나오고, 기계화로 해야지 손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해가지고 모심는 기계 나오고 제초제 나오고 화학제품 들어오고 해서 허다 보니까 논 매는 소리가 있소? 모심는 소리가 있소? 아무것도 다 없어져 부렀어.
농경문화가 자꾸 발전되면서 농요라는 것이 없어져 부러서 참 아쉽다~ 이 흔적만이라도 냉겨놓고 가자~ 나도 인자 칠십이거든요? 근디 칠십 이전 사람들은 이런 소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런 소리가 있었다, 그러니 이걸 지원해가지고 후대 사람들에게 “품앗이를 해서 수작업을 할 때 요런 노래를 이렇게 불렀다”허는 역사를 알려주는 것이지.
나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주경야독을 했었거든요? 대동아 전쟁이 한창 무르익어가지고 일본이 막 세계를 제패할려고 헐 때 태어났거든요?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얼마나 참담했습니까? 그때는 쑥이 우북허니 잘 자라서 파보면 거가 사람이 죽은 자리야. 순창 가막골 어휴 빨치산 본부가 여그 순창이여. 대법원장 허든 김병로 선생 태어난 곳이 빨치산 아주 제1본부요. 그러니까 열세 살 먹어서 졸업해서 열네 살 먹어서부텀 아버지 밑에서 농사짐서 아버님 또래들이 모심은면 모타래 갖다줌서 여이 여허루 상사~ 뒤~여~ 허는 소리를 들었제. 캬~ 저 소리 내가 배와야겄다! 해가지고 모타래 갖다줌서 그 소리를 배왔지. 감수성이 예민한 때라 절대로 안 잊어부러. 호미질 하면서 허는 소리도 얼마나 재미난지 몰라. 또 마무리 헐 때 이쪽 배미는 저쪽으로 돌고, 저쪽 배미는 이쪽으로 돌고 험서, 우우허니 감싸면서 확~ 마무리를 허고 나오고, 소 타고 집에 들어와서 닭 잡아묵고 술 내놓으라고 허고, 이것이 다 장난이거든요. 소에다 상머슴을 태우고 그때는 장태에다 닭을 길러서 병아리 길러서 했거든요. 닭을 한 세 마리 잡아서 삐죽을 끓여먹고 하던, 그 아름다운 세계! 상머심 소에 태우고 작은 머심이 소고삐 잡고 논 맨 사람들은 양쪽에서 댓풀잎 뜯어가지고 막 춤을 추면서 어이야 디이야 어허허허 어허야 어야 뒤여로 사나지로구나~~ 험선 그냥 막 덜썩 덜썩 춤을 추고 그랬지. 모심기 다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서 불렀던 노래여.
또 양산도라는 노래가 있는디, 민요 양산도는 여허이 여어~ 고건디, 여그 양산도는 좀 달라요. 에이, 에헤에에이, 에헤에에야, 에헤이나 양산도호로다하! 요거거든. 뒷사람이 받는 노래여. 농부가 양산도여. 민요가락 양산도허고는 다르지.
사호소리는 여그 사람만 허거든요. 다른 디는 없어. 오 헤 에헤에야 에라 사아아~호호! 다 되었네 다 되었네 이 논배미가 다 되었네. 그먼 한 삼십 명이 춤을 춤서 그냥 오 헤 에헤이야 에라~ 험서 그 음을 어떻게 선조들이 구전으로 해왔는지 참 대단혀.
다행히 우리 선조들도 지하에서 “니가 우리의 한을 풀어줬구나. 니가 있어서 우리 원한이 풀어졌구나” 고런 선조들의 조상들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우리 들소리가 살아났다고 생각혀. 이 근방에 우리 조상들이 다 묻혀있어. 근디 그 분들이 가만히 있겄어? "야 너 참말로 잘헌다. 우리가 뒷받침 해 주마, 들소리 한번 재현시케 봐라!" 그런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혀 나는.
우리 농요가 있소! 입만 벌리면 돼요!
나도 인제 열 댓 살 묵어서부터서 서른 살 묵을 때까지 그 소리를 했는데, 나가 지금 칠십이 돌아왔거든. 칠십이 돌아왔는데 그 소리가 잊어져. 그래서, 아 이건 아니다. 이것도 하나의 문화다. 옛어른들이 이렇게 수작업으로 농사를 지어갖고 우리를 멕여 살릴 때, 이렇게 고된 품을 해서 부르고, 다함께 흥에 겨워서 이 노래를 했는데, 모심을 때는 요런 소리를 허고, 논 맬 때는 요런 소리를 허고, 그리고 소타고 장원질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르고, 이렇게 했다! 허는 것을 인자 내가 해가지고 전수를 한번 시켜야겄다, 하고 마음을 먹었지. 그런 생각에 내가 이걸 살린 거여요.
긍게 살린 계기는 순창에 11개 읍면이 있거등요? 그 사람들이 모여서 순창 군민의날 행사를 허는디, 각 읍면에서 특색 있는 장기를 들고 오시오! 그렇게 얘기를 혀. 순창군민의 날 때. 그때가 10월 때인디. 10월 5일인가가 그때가 군민의 날이었는디, 시방은 자꾸 바꿉니다.
그때 하여튼 다른 면에서는 풍물, 농악 부분을 많이 들고 나와. 근디 갈수록 젊은 사람은 서울로 부산으로 다 가불고 없고, 맨 나이 먹은 사람들만 모여서 그것을 헐랑게 숨도 차고 , 옛날 가락은 있지만 고되고 땀 흘리고 힘들어서 못 혀.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혔어. “우리 농요가 있소! 그것은 입만 벌리면 돼요. 거 뭐 땀날 일도 없고, 연기만 허면 돼요. 그때 품앗이 허던 식으로. 모심는 시늉 허고, 논매는 시늉 허고. 소리만 잘 허면 돼요. 내가 첫소리를 매길 텡게 뒷소리를 따라서 허씨요!”
고렇게 허고 고걸 들고 나갔어. 그때 거 김학곤씨라고 문화예술원 국악원장이 있었어. 국악원장이 말허기를 인자 임자 만났다 요것이여. 그래가지고 그 양반이 사선대에서 전라북도 농요나 국악 시험을 봐가지고 전국에 나가게 되는 시험이 있응게 한번 보러 오라 그래. 그래가지고 거그 가서 일등은 안 혔소? 그래가지고 저 경상도 거...고성인가 어디서 헐때게 장려상 받아가지고 와서 그 이듬해 다시 예술원 전당에 가서 다시 시험을 봐갖고 일등을 해가지고, 충청도 충주에 가서 대통령상을 받았어. 대통령상을 받아가지고 무형문화재 제 32호로 지정도 받고 시방 전수관도 마련을 허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한 10억 공사 들여서 우리 집 뒤에다가 2천4백 평 부지를 마련해서 짓고 있어요. 나도 전라북도 문화재 지정을 받았어요. 우리 단체로는 2003년도에 받고 나는 2007년 8월달에 받았어. 긍게 우리 단체로 먼저 받고 나 개인적으로는 나중에 받는 것이 예의제. 나가 앞소리를 허게 된 것은 내가 허겄다고 헌 것이 아니라, 내가 잘 허니까 어른들이 인자 니가 한번 해봐라, 그래서 내가 인자 어른들 앞에서 첫소리를 매겨봉게 어른들이 “되앗다! 인자 가자! 우리가 뒷소리 받을 텡게 우리 금과 들소리를 장기자랑으로 들고 나가자!” 해가지고 대회에 나가게 된 것이여. 맨 처음에 허게 된 동기는 그거예요.
나는 니야 해주고 니는 내야 해주고
들소리를 헐 때는 한 80명 정도가 모여서 허는디, 경우에 따라서는 불참허는 사람도 있고 그려. 팔십 명 나와도 좋고 칠십 명 나올 때도 있고 사십 명 모여서 헐 때도 있는디 우리 농요단에 가입해갖고 활동허는 분들이 팔십 분이여. 금과면 24개 마을 사람들이 참여허고 있는디 끼가 있는 양반이 참여허제, 끼없는 사람들은 안 혀. 농요단은 언제든지 문을 열어놓고 있응게 하시라도 같이 즐기시고 망설이지 말고 가입허세요, 그러고 있지.
우리 김봉호 회장님께서 주로 구성을 허고, 나는 이제 선소리자로서 앞소리를 허면 뒤에서 따라서 허는데, 잘못 따라서 허면 이 대목은 이렇게 꺾고 이 대목은 이렇게 딛고 올라간다, 이렇게 갈치고 그러지.
금과들소리가 복원된 데는 제 생각이 그래요. 우리나라 역사가 단군 할아버지부터 5천년 역사를 이어올 때 맨 처음 시작이 뭐냐? 의식주거든요, 식의주! 먹고 보자. 먹는 게 해결이 돼야 허거든요. 그래서 농경문화부터 시작이 되았다 이것이여. 농사 짓고 씨 뿌리고 거두고 먹고 살고 허는 게, 모든 문화가 농경문화가 시초여.
농경문화라는 것은 손으로, 힘으로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되덜 않거든요?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가꿀 때 가꾸고, 거둘 때 거두고, 이걸 헐 때 혼자 힘으로는 안 되니까, 주로 이제 이웃과 이웃끼리 ‘우리’가 되는 거지. 나 혼자 있다가 우리가 되는 거여. 그래서 우리가 함께 품앗이를 허는 거지. 나는 니야 해주고 니는 내야 해주고. 이렇게 허는디, 그냥 일만 해서는 안 된다~ 배부르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허는 것이 농요 아니냐~ 반만년 농경문화를 애기헐 때 우리 선조들이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마는, 이 분들이 농사를 지을 때 허는 소리가 얼마나 고귀헌 소리냐~ 자식새끼들 믹이고 입히고 일 허시면서 허는 소리, 근데 유형의 흔적은 남아있지. 소 몰고 쟁기질허는 쟁기, 아까 저 멍석, 호미, 요런 것들은 유형으로 남아있지마는 농사 지으면서 허는 소리는 무형이란 말야? 이것이 없어져불먼 영구히 농경문화 사회는 없어지는 거여.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것이 있었구나 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남겨야 되겄구나, 이 소리를 한번 냉개야 되겄구나, 해서 이 소리를 허게 된 거예요.
15년을 불렀는디 잊어묵겄어?
어렸을 때부터 소리에 소질은 있었는데, 내가 전주 이가요. 외가는 안동 권씨고. 옛날에는 반상 구별이 있었어요. 양반허고 상놈허고. ‘양반은 굶을 줄을 알고 상놈은 매 맞을 줄을 알아야 한다’는 그런 소리가 있었고. 양반은 절대적으로 노래를 허먼 안돼요. 재인놈들이나 노래를 허제. 근데 나는 소질이 있었거든요. 옛날에 그 유신기라고 있어. 축음기! 거그다가 임방울 선생 소리나 장판개 박타령을 들으먼요, 그냥 어깨가 들썩들썩 나도 모르게 올라가요. 그래서 나도 저걸 가서 배와야겄다, 그런 생각을 해도 어른들 무서와서 듣기만 허제 소리는 못했제. 그래도 소질이 있었어요.
임방울 쑥대머리를 들으면 “쑥대머리~~~구신형용~~~” 허고 싶어도 못허게 헝게 속으로만 외왔지.
나가 쩌어그 고성서 전국 민요대회 경창대회 헐 때게 나가서 문화부장관상도 받았어. 판소리도 허고, 민요도 허고. 1등은 대통령상이고 원래는 내가 2등 국무총리상 감인디, 국무총리가 그때 공백기간이었거든. 왜 그냐? 그때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허고 있었거든. 거 노무현 대통령 탄핵한다고 어쩌고 헐 때게. 그래서 고건 국무총리가 대행을 했었기 때문에 그 양반이 시상을 허러 못 와. 그래서 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았어. 원래는 국무총리상 감이요.
노래는 따로 연습을 안 해도 저절로 나와요 그냥. 가사 같은 것도 절대 잊어묵들 안 해. 열다섯 살 먹어서부터 서른 살 묵을 때까지 15년을 불렀는디 잊어묵겄어? 글고 어렸을 때게는 감수성이 예민허거든요. 그리고 받아들이는 저기가, 어렸을 때는 한 번 받아들이면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거든요. 중간에, 저기 헤또가 좀 갈라고 헐 때 받아들인 것은 금방 잊어부러. 유행가도 금방 잘 불렀는디도 잊어불잖아요? 근디 나는 들소릴 어려서 배왔기 때문에 안 잊어묵지.
근디 노래 가사는 아는디 다른 것이 안 돼. 그래서 원광대학교 박순호 교수를 우리가 모셔왔어요. 이것이 노래기는 하지만 연기가 필요해. 꾸며야 된게. 보는 사람이 재미가 있어여 되거든. 긍게 우리는 “여기도 꼽고 저기 저기도 꽂아보세”허고 부른디 박순호 교수님은 “여기도 꼽고 주인마님 그 자리도 꼽자” 요렇게 허는 놈이 더 좋다! 요런 정도로 지도를 해주셨고, 또 율동을 만들어 주셨어. 우리는 엎드려서 모심는 사람, 어깨춤 추는 사람, 뭐 요렇게 따로따로 해서는 안 된다, 같은 보릿대춤을 추더라도 오른손, 왼손, 오른손, 왼손, 착악, 차악 맞춰서 춰야 사진발도 좋제. 누구는 오른손 누구는 왼손 허면 오합지졸맹키로 안 된게. 고런 것을 우리 연습헐 때 아조 많이 가르켜 주셨어. 줄 서는 간격은 3보로 할 것이냐, 5보로 할 것이냐, 이런 것까지 다 정해주셨어. 말하자면 연출을 헌 것이지. 그 양반이 우리 지도교사여. 얼매나 고마운지 몰라. 군산에 국수공장이 있는 가비여. 거그서 국수를 원가로 사가지고 짊어지고 와. 자가용도 없는 양반이라 대중교통 이용해가지고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고 여기까지 와서 국수 삶아서 먹고 그랬어. 그렇게 은혜를 많이 베푸셨어. 죽어도 그 양반 은혜를 못 잊지.
그놈 읊다 보면 집에 오고 싶은 생각도 없어
저는요, 어렸을 때부터서, 초등학교 나와 가지고 아버지 농사 짓는디 도와주고 어른들 농사일을 보면서 자랐지마는, 그때는 서당이라고 있었잖아요? 동네마다 서당이 있었는디 서당에서 글공부를 허고 명심보감, 동몽선습, 논어, 맹자, 이런 것을 읽었거든요. 근데 인자 뭔고 허니, 여름에는 초등학생들 방학을 주잖아요? 그런데 서당은 여름에도 방학을 안 줘요. 안 주고 뭣을 갈치냐? 당음이나 연주시를 갈치거든요. 근디 그것은 소리를 잘 읊어야 돼요. 당음이 뭐냐면 당나라시 오언절구를 소리 내서 읽는 것이여. 요새는 그냥 읽지만 옛날 서당 선생들은 노래를 하듯이 높낮이가 있게 갈쳤어. 긍게 음과 글과 같이 허는 것이지. 근디 나가 그걸 잘했어. 다른 사람은 당음을 읽어도 재미가 없는디, 내가 당음을 읽거나 연주시를 허면 다들 재밌다고 혀. 연주시는 오언이 아니고 칠언절구 일곱자요. 당음을 띠고 나면 연주시를 을프는디 여름에 산속에 들어가서 그놈 읊다 보면 집에 오고 싶은 생각도 없어. 학교 공부를 그렇게 시겠거든요? 그러니까 재미가 나지. 학교 공부도. 나는 초등학교배끼 안 나왔지만 대학 나온 사람도 그 글을 몰라, 그 맛을 몰라. 구학의 맛을 몰라.
자식 농사도 잘 지었어
긍게 내가 그런 초장이 있어가지고 농요도 그런 식으로 한 것이지. 나가 지금도 논농사를 스물두 마지기를 짓고 소도 세 마리는 키는디, 참 재밌게 살아. 자식 농사도 잘 지었어. 나가 서울에다 대학을 넷을 보낸 사람이요. 동국대가 둘, 동덕여대가 하나, 선문대가 하나. 우리 안식구가 어디서 들었는고, 충청도 아산에 있는 선문대학에 그렇게 외국 사람들이 와갖고 선생들이 좋다고 해서 그놈은 대학원까지 보냈어. 그래갖고 지금은 연구원 과장으로 있어. 그놈 안식구는 성동구청에서 근무허고 있고, 우리 둘째놈은 동국대학교 나와갖고 대원 컴퓨터 회산가? 거그 댕기고 있고 그놈 안사람은 조선무역에 댕기고 있고, 우리 막둥이딸은 동국대학교 나와갖고 과학기술원 근무허고 있고 그리여. 하하, 촌놈이 말이여, 나보당 낫제. 나맹키로 호미 들고 밭 매는 놈들보다 낫아, 그놈들이. 근디 우리 큰아들만 파프리카 하우스를 허고 3대가 살아. 손주 손녀가 넷이고, 우리 내외간 있고, 아들 며느리 있고 야닯 식구가 살아. 이따 가서 파프리카 좀 달라고 허믄 한 보따리 줄 것이여. 우리 큰아들은 국제결혼을 했어요. 며느리가 일본 히로시마에서 왔어. 원폭 떨어진 데. 나가 거그까지 갔다 왔어요. 우리 큰아들은 국제노동연구소에서 근무허다가 안사람이 불행허게도 파킨슨씨 병이 걸려부러서 보행이 불편해. 그래서 오늘 정기검사 하러 아산병원에 갔어요. 파킨슨씨병으로 보행이 불편허니까 시골로 내려와서 허지도 못허는 농사 짓는다고 하우스를 다섯 동 해가지고 파프리카 농사를 짓고 있어요. 근디 국제결혼한 사람이 글등만. 애기가 생기믄 생긴 대로 다 낳아. 그래서 시방 손녀가 세 명에 손주가 하나, 4남매여. 올해 낳으면 내년에 낳고 험서 4년 연속 낳더니 4남매가 돼가지고 큰놈이 중학교 1학년, 둘째놈이 초등학교 6학년, 셋째가 5학년, 넷째는 1년 건너뛰어서 3학년 그래요. 다 우등상장 다 타오고. 풍부허게 살지는 못 허지만 화목한 가정을 영위허고 있어요.
우리 큰아들이 노래에 좀 소질이 있어서 유행가는 잘 부르는데, 옛날 우리 선비들이 허는 들소리는 아직은 잘 못 혀. 소리는 선생님 밑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에 우리 아들헌테 전수를 시게줄라고 마음 먹고 있어요. 내 녹음 CD를 차에도 놓고 항상 듣고 다니면서 니가 전수를 받아라, 그랬어요.
목이 쇠아서 소리 안 나와 본 적이 없어
논농사는 인자 다 지었어요. 인자 마무리 헐 때지, 퇴비 허고 웃거름 해줄 때고, 목도열병 방제해 줘야 되고. 농사는 스물다섯 마지기 짓는디, 우리 아들은 하우스 허고, 나는 물관리허고, 그렇게 험서 3대가 살고 있어. 나가 이래봬도 아주 바쁜 사람이여. 계모임 해야지, 수요일마다 시조 배우러 댕개야지, 순창지역발전모임 나가야지, 농사는 그냥 틈으로 지어. 새벽에 다섯 시에 일어나서 여덟 시까지, 그렇게 허면 세 시간이거든? 이 세 시간 동안 허는 일을 무시 못 혀. 한 나절 헐 일을 다 해버려. 그리고는 그냥 날마다 노래 부르고 놀아.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이 젤로 좋아. 근디 노래 잘 부르는 집안은 보잘 것이 없다고 했어. 그래서 우리집이 요렇게 심란해. 시조도 순창국악원에서 특부 졸업허고 시방 명인부 다니고 있어. 남원 호남대회 명인부 나가서 내가 2등 했어. 나는 원래 목이 타고 났제, 관리헌다고 노래 잘 허는 것이 아녀. 약 먹는다고 목이 좋아지간디? 그냥 묵을 때만 낫아. 나는 노래를 허면 헐수록, 3일 허고 4일 헐수록 목이 안 쇠야. 그때는 그냥 득음이 되아. 그래갖고 아무리 고음을 해도 잘 나와. 맨 처음에 노래를 한 나잘 부르면 목이 가거든? 그래갖고 인자 계속 부르면 목이 탁 트여. 그러면 인자 꾀꼬리 같은 소리가 나와. 그때 대통령상 받을 때게 3개월, 6개월, 1년, 3년을 해도 목 쇠아갖고 소리 안 나온 적 없었어. 누가 알아주든 않지만.
우리 전수관이 8월 19일날 준공허는디, 그때는 너무 더운께 9월에 날 선선해지면 날 받아서 거창하게 소리 한판 헐 판이여. 그때 꼭 오시요 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