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7 |
[독자시평]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_ 젊은 시선을 보고
관리자(2008-07-08 18:41:05)
젊은시선이 던져준 작은 울림
한문희
바쁜 생활 속에서 우연하게 초대권 2장이 내게로 왔다. 작은 아이와 이른 저녁을 먹고 공연장(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연지홀)을 향했다. 한낮에 따갑게 뿜어대던 열기가 한뜸 숨죽어 내게 와서 부딪치는 선선한 바람이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초대권을 좌석표로 바꾼 후 한숨 돌리며 공연책자를 읽어 본다. 초대권을 보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는데 이번 공연이 처음이 아니고 벌써 열일곱 번째임을 알고는 가까이 살고 있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 무심했음을 깨달으며 공연을 준비한 주최 측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연 시각에 맞춰 좌석을 찾아가서 앉았다.
공연은 여섯 마당으로 진행되었다. 양진환(전라좌도 설장고), 정은혜(춘향가 중 옥중가), 황갑도(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 박달님(최옥산류 가야금산조), 위은영(한갑득류 거문고산조), 조상훈(전라우도 상쇠춤)의 순서. 공연 제목(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젊은 시선)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문화가 우리의 문화인양 살아가는 시대에, 자기 자리에서 우리의 춤과 가락을 아끼고 사랑하며 지키고 있는 젊은 문화지킴이들의 무대로 이루어졌다.
먼저 양진환의 설장고. 중요 무형문화재 임실필봉농악의 이수자로 고 양순용 선생님의 아들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풍물반 선생님의 권유와 그의 아버지가 전라좌도 상쇠 양순용이라는 이유만으로 풍물을 익히기 시작하여 올해로 30년이 되었다고 한다. 우렁찬 징, 카랑카랑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그의 장구춤이 시작되었다. 어느 덧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들의 리듬과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들이 합세하여 꽉 찬 무대의 열기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객들에게까지 전해져왔다. 노련하면서도 발끝하나에까지 시선을 머물게 하는 양진환의 설장고춤을 보면서, 한순간의 오차도 허락치 않는 그의 리듬을 보면서, 나의 삶을 이루는 시간들도 그의 춤에서 보여지는 노련함과 절제된 동작처럼 헛되이 보내지는 시간들을 정제된 시간들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리의 깊이를 찾아 나선 차세대 소리꾼 정은혜. 그녀는 일찍 판소리를 시작하여 남원 국악예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악과를 졸업,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으며 21세기를 빛낼 우수 인재상 대통령상을 수상한 재간꾼이다. 사또의 수청을 거역한 춘향이가 옥에 갇혀 옥중에서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귀신, 바람, 새 등으로 형상화하여 단아한 모습의 그녀가 맑고 칼칼한 목소리로 들려 주니 듣고 있는 이들에게도 그 애달픔이 느껴지는 듯하다.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창극부 지도위원 황갑도. 그는 구성지고 힘 있는 목소리로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들려 주었는데, 고수와 척척 맞는 호흡이 일품이었고 심봉사가 눈뜨는 장면에서 그의 연기는 정말 실감났다. 그리고 무대에 서는 그의 자세와 자신감이 참 좋아 보였다.
박달님의 가야금 산조. 그녀는 전주에서 태어나 13세 되던 해, 가야금을 시작해 올해로 22년째 가야금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필요 없는 군더더기를 미련 없이 버리고 살아가는 삶의 단순함과 아무런 기교가 없는 절제된 듯한 그녀의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해주었다.
위은영의 거문고 산조. 여섯 줄의 거문고가 내는 그윽한 저음이 연주가 시작되면서부터 나를 빠져들게 한다. 가야금 산조를 듣고 있을 때와는 달리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굵은 저음이 주는 편안함, 울림, 안정된 리듬, 연주가 빨라질 때는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수십 세기를 내려오며 우리 민족의 정서를 북돋아 왔다는 거문고, 그 소리에는 넉넉함과 여유와 품위와 그윽한 정취가 묻어나오는 듯하다.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이 서책과 함께 수양의 상징처럼 거문고를 옆에 두고 지내며 우주의 진리를 논하고 삶의 태도를 터득해가는 벗으로 여겼다고 한다. 둔탁하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바쁜 일상에 젖어 사는 내게도 이런 편안함을 주는 것을 보면, 아울러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 민족들에게 주었을 삶의 여유와 정취들을 생각해보니 정말 가장 우리의 정서에 맞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가장 한국적인 소리, 우리 삶에 가까운 소리...
마지막 무대는 조상훈의 상쇠춤(부포춤)이었다. 손에는 꽹과리로 머릿속까지 울려 퍼지는 주작의 천둥 번개 소리를, 머리에는 부포상모를 쓰고 계속 이어지는 춤이 사람이 추는 춤 같지 않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머리와 목의 움직임으로 그렇게 많은 표정의 꽃들이 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하얀 배꽃이 쉼 없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공연이 끝나고 아이의 손을 잡고 느긋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오니 여기저기 가로등 불빛이 밤안개에 뿌옇게 보인다. 공연 시작 전보다 좀 더 선선해진 바람 끝이 한층 더 부드럽게 와 닿았다. 아마도 일상에 지쳐버린 나의 감성들이 공연전의 바람처럼 조금 후덥지근했다면 공연 후의 바람은 나의 감성을 선선하게 바꾸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공연장의 열기와 악기들이 뿜어내던 가락들, 그리고 아직도 눈앞에 선한 하얀 부포춤 등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 일상 속에서 나는 이러한 공연을 접해 볼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니 내가 오히려 이러한 공연을 멀리 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막연히 이러한 공연은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즐겨 보는 공연이라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친 적이 더 많았으리라. 그런데 오늘 이 공연을 보고서 나와 작은 아이(장구 소리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으로 보아...)의 가슴 한켠에도 우리의 춤과 가락이 살아 움직이며 꿈틀대는 그 무엇인가를 느꼈다. 어찌 보면 우리 삶이란 한바탕 뜨겁고 현란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는 울림이 나의 마음 한 쪽을 다시 울리게 한다.
한문희/ 고창 출생으로 전북대를 졸업했다. 전북 여성교육문화센터에서 독서논술지도교사 과정을 수강하면서 글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세상을 소망하는 가정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