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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 | [파랑새를 찾아서]
새처럼 자유로워지려면
김종필 동화작가(2003-04-18 17:37:49)
겨울방학의 한 가운데 와 있다. 슬슬 아이들의 방학살이가 궁금하다. 같이 생활할 땐 지지고 볶고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덜 싸우고 지낼까 고민했었는데 막상 긴 날을 떨어져 지내니 퍽 궁금하다. 이거 혹시 내가 다시 연애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정말 웃기는 건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던 녀석들이 더 보고 싶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알맞은 인사를 찾는 사회문제에 ‘축하합니다.’라고 똑 부러지게 답을 썼던 ○○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통화가 시작된다. 대뜸 우리는 서로가 누군지 알아본다. 큰 눈송이만큼이나 따뜻하다. “왜 전화하셨어요?” “궁금해서 했지, 임마.” “제가 편지하려고 했는데......” “알았어. 편지 빨리 써. 자세히 쓰는 것 잊지 말고.” “예, 근데 선생님은 뭐 하고 지내요?” “나는 감기 때문에 요 며칠 꼼짝도 못했다. 너는 어디 아픈데 없냐?” “없어요. 근데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살겠어요. 친구도 학원에 다 가버렸고 학교에 가도 아무도 없어요. 공이라도 찼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그래서는요. 맨날 동생하고 싸우고 엄마한테 디지게 맞고 또 싸우고 또 디지게 얻어맞고, 날마다 똑 같아요.” “엄마가 널 때리며 뭐라고 하냐?” “방학이 없었으면 좋겠대요. 그 놈의 방학은 왜 해 가지고 집 안을 시끄럽게 만드느냐면서 개학이나 빨리 했으면 좋겠대요.” “그래? 어디 놀러 가지는 않았냐? 체험학습 보고서를 쓰려면 어디라도 가야할텐데.” “돈 없대요. 그냥 집에서 따신 밥 먹고 책이나 보래요.” “알았다. 엄마 너무 속상하게 하지말고 남은 방학 잘 보내거라.” 전화를 끊는다. 다시 다른 번호를 돌린다. “어, 선생님이세요?” “오랜만에 선생님과 통화를 하는데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냐?” “저 지금 빨리 나가서 학원 차를 타야 하거든요.” “학원을 몇 군데나 다니는데? 네 군데요.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빠요.” “재미는 있냐?” “재미는요? 그냥 엄마가 다니라니까 다니는 거예요. 방학 때 남보다 더 열심히 해야 서울대 간대요?” “무슨무슨 학원 다니는데?” “한문, 영재수학, 영어, 그리고 과외요. 선생님 저 지금 나가봐야 돼요. 이따가 제가 밤에 전화 드릴게요.” “그래라. 차 조심하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보지만 통화 내용은 이 두 부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 내게 밥을 먹여주는 고마운 열 살 짜리 우리 아이들의 겨울 방학은 이렇게 가고 있구나!’ 통화가 거듭되면서 힘이 빠진다. 특별한 한두 명의 아이를 빼놓고는 대부분 학원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작년 11월 초등학교 5학년인 한 어린이가 자결을 했다.(자살이지 무슨 자결이냐고? 아니다. 이건 자결이다. 그릇된 시대를 혼내는 아이의 큰 꾸지람이다.) 유서에서 ‘새처럼 자유로운 세상, 학원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아빠는 이틀에 스무 시간 일하고 스물 여덟 시간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스물 일곱 시간 반을 공부하고 스무 시간 반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전교조의 활성화 이후(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중고생의 공부 스트레스 자살률이 그나마 떨어져 왔는데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 간간이 들린다. 수능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무식한 청소년 논쟁’이 대표적이다. ‘학력저하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단다. 그리고 그 절대적 증거로 제시되는 것은 서울대학교 신입생의 한자 읽기 수준이다. 그들의 결론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고교 평준화 해제만 하면 대한민국 보통교육은 희망이 보인다.’ 로 끝을 맺는다. 정글의 법칙만이 발전의 원동력이란다. 개개인의 삶, 약자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치도 없다. 그런데 이런 이론을 제공하는 교수들의 평가척도는 너무 단순하다. 한자 아니면 수학만으로 학력을 측정하고 공개발표회를 갖는다. 요즘 아이들이 가진 기발한 창의성, 조리 있게 자기 주장을 하는 능력, 정보에 접근하는 속도, 옛 학생들보다 다양하게 갖고 있는 기능. 이런 것들은 학력으로 치지 않는다. 이창호가 한자를 잘 읽어서 세계를 제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송종국이 수학을 잘 해서 공을 잘 차고, 장한나가 한자와 수학을 고루 잘 해서 뛰어난 예술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성세대가 이루어내지 못한 것들을 신세대가 빨리 적응하고 이루어내는 것은 다양한 개성을 살리고 숨겨진 끼를 찾아낸 덕분이지 결코 지적능력 향상 덕분이 아니다. 학력에 대한 척도를 바꿀 때가 되었다. 단순히 암기하고 수치화 하기 편하다고 해서 어려운 한자 몇 자, 수학 공식 몇 개로 학력저하를 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논의가 때문에 삶에서 가장 호기심이 많고, 어른이 빨리 되고 싶어 안달이 나야할 어린이들이 학원으로 내몰리고 있다. 재잘거리고 놀 친구도 없다. 농촌이야 이미 무너져서 친구가 없다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몰려 살고 있다는 도심에도 같이 놀아 줄 친구가 없다. 학원에 가야 그나마 친구라도 만날 수 있으니 방학이 더 바쁘다. 초등학생의 자살을 보며 더러는 혀를 차며 어린것이 뭘 안다고 함부로 행동했느냐고 나무라는 이도 있지만 내게는 경고처럼 다가온다. 지금의 방식으로 ‘학력저하논쟁’이 계속된다면 제2의 제3의 ‘초등 자결 학생’이 쉬지 않고 나올 것이라고. 사람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한대서야 어디다 쓸 것인가. 글을 마치며 생각한다. 이 원고를 보내고 나서 주말쯤 우리 반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야겠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보내는 열 살짜리들의 긴긴 겨울 방학에 추억 한 토막을 선물하고 싶다. 친구가 없어서 동생만 못살게 굴며 지낸다는 ○○도, 학원에 다니느라 바빠 죽겠다는 △△도, 숙제를 통 못했다고 걱정하는 ◇◇도 모두 불러야겠다. 그리고 국수를 삶아야겠다. 인연의 끈이 오래오래 가라고 조상들은 큰 잔치 음식으로 국수를 즐겨 먹었다지 않은가. 나의 조그만 방학 선물이 일상에 지친 아이들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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