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7 |
[박물관대학] 전북대학교 제2기 박물관 대학 지상강좌
관리자(2008-07-08 18:39:22)
우리 입성[衣服]. 그 역사와 현실 Ⅱ
고부자 단국대 대학원 전통복식학과 교수
고려시대 : 원(元) 복속과 혼란기
우리나라 의생활사의 연구부분에서 가장 자료가 귀하면서도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이다. 이는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라 우리나라도 한족(漢族)과 여러 민족의 요소가 함께 공존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문헌자료는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與服志) 및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 외에 사여관복(賜與冠服) 등에 의해 참조되고 있다. 매우 귀한 자료로 경남 밀양에 있는 박익(朴翊.1332~1398) 무덤의 벽화에는 원(元)나라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의 복식은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신라의 복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시기로 초기의 수십 년 간이며, 제2기는 송나라의 복식영향기로 고려가 몽고(蒙古)에 굴하기 전까지 300년 동안이다. 제3기는 몽고의 영향 아래서 개체변발(開剃?髮)을 하고 몽고의 복식인 질손(質孫)을 입었던 1세기 동안이며, 제4기는 공민왕 6년(1357)에 명(明)나라 제도를 받아들인 이후로부터 조선 초기까지이다.
시대별 변화는 고려 초는 통일신라의 것을 이어 받다가 오대(五代)·요·금·송의 영향에 따라 달라진다. 이때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의식을 보이면서 수용치 않았다. 공복제도는 4대 광종(光宗) 때 사색(四色)으로 분류하여 정한다. 귀부인들은 외출할 때 몽수(蒙首)를 쓰며 부녀자들은 흰 모시 옷과 노랑비단치마를 입었다. 치마는 넓으면서 땅에 끌릴 정도로 길고 여러 겹 껴입었으며 선군(旋裙)이라는 속치마도 있었는데 목욕할 때 입었다.
후기에 오면 몽고와 약 접촉하는 100여 년 동안 특히 왕실과의 혼인에 의해 자진해서 몽고풍을 따르게 된다. 제24대 원종(元宗) 1년(1260)에는 원(元)의 세조가 “의관을 개혁하지 말고 자기 나라의 풍속에 따르도록 하라”는 국서를 보내지만 원나라 식을 따랐다. 또 충렬왕(忠烈王)은 1272년 세자 때에 원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머리는 몽고식의 개체변발에 호복을 입었고, 왕이 된 다음 4년(1278)에는 국령(國令)으로 몽고 의복을 입을 것과 머리는 정수리를 깎고 뒤의 머리는 땋아 내리는 개체변발을 하도록 하였다. 몽고식 머리 풍속은 1세기 정도로 끝나지만, 머리를 땋는 풍속은 1900년 초까지 존속하였다. 몽고양식은 조선말까지 남성 관원용 포(袍)의 하나인 철릭[帖裏]과 머리에 쓰는 관모로는 몽고식 발립(鉢笠)이 죽립(竹笠)으로, 다시 우리의 대표적인 관모인 갓[黑笠]으로 발전하였다. 또 여자의 족두리나 변발의 풍속과 더불어 댕기와 방한모자 등도 몽고영향으로 보고 있다. 고려말이 되면 의복은 오행(五行)사상에 의한 개혁이 일어나고 명복속기로 바뀐다. 오행에 의해 문무백관의 모자는 청색으로 옷은 검정으로 하고 스님[僧]의 모자는 흑건대관(黑巾大冠)을 썼다. 여자의 옷도 흑라(黑羅)로 하도록 하였다. 공민왕대부터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개체변발을 고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면서 고려의 옛 관제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공민왕 6년(1357)에는 복식제도를 개혁하는데, 이 때 관(冠)은 투구모양의 발립 대신에 명제를 따서 입정(笠頂)에 옥이나 수정 등을 장식한다. 공민왕은 원나라 사위[駙馬]이므로 즉위 초에는 원의 양식을 따르다가 원이 약해진 틈을 타서 중국 황제와 대등한 십이류면(十二旒冕) 십이장복(十二章服)을 입었다. 공민왕 18년(1369)에 원이 망하자 명의 제복(祭服)을 받아들이고, 19년에는 명 태조(太祖)가 고려의 왕과 왕비에게 면복(冕服)과 원유관(遠遊冠)을 보내왔다. 우왕(禑王) 13년(1387)에는 지금까지 입던 호복을 명제(明制)로 바꾸는데 이 때 관복은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이었으며 이것이 조선말까지 관리의 관복중 하나이며 평상 집무복인 상복(常服)이 되었다. 이후 명이 망할 때까지 모든 관복은 청하여 받아들이는 청사사여(請賜賜與)를 하였고, 그 제도는 중국에 비해 두 등급을 낮춘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에 의한다. 이것은 물론 관리의 관복이고, 일반민중의 복식은 국속을 따름에 변함이 없었다.
조선시대 : 명(明)복속과 이등체강(二等遞降)
발전단계는 크게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1392년 개국부터 1592년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까지이며 중기는 개항까지, 후기는 조선말까지이다.
초기 관복제는 고려 말 제도를 이어받는다. 태종과 세종대에는 새 제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을 자주 파견시킨다. 태종 16년(1416)에는 백관의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을 정하였는데 중국 제도에 의한 것이었다. 세종 8년(1426)에는 모든 관복제가 제정되고 성종 때『경국대전(經國大典)』이 법제화되면서 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수정과 보완하면서 조선조 500년간 기본골격을 이룬다. 이 시기 일반적인 옷의 특징은 고려 말기 중국의 의복을 수용한 것으로 길이와 품이 풍성한 광대화(廣大化)이다.
중기에 오면 관복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큰 변화가 없으나 통상예복에서 전기에 입던 옷들이 없어지고 다른 종류가 새로 나타난다. 군복(軍服)으로 융복(戎服)인 철릭이 일상화되며 관류(冠類)는 갓[黑笠]과 편복(便服)으로는 도포와 창의(?衣)류가 나오면서 국속화(國俗化)가 정립되기 시작한다. 옷의 특징은 상의나 포가 전기에 비해 품이 몸에 맞도록 단소화(短小化)되는 반면에 소매의 너비가 전기에 비해 넓어[廣袖]진다.
후기에는 청(淸)이 등장하자 오랑캐 나라로 비하시켜 청나라의 옷을 수용하지 않고『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의해 명제(明制)를 계속 따른다. 무관의 군복으로는 융복으로 철릭과 동다리가 같이 쓰인다. 여자 옷은 남자 옷이 중국제도를 따라 이중구조로 전승된 것에 비하여 저고리와 치마의 기본구조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왕비도 법복(法服)은 명에서 가져와 가례(嘉禮)나 즉위 때 의례복으로 입었을 뿐 평거(平居) 때에는 일반의 국속복을 입었다.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때부터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이제까지 상류층 전용이었던 것이 하류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여성들의 가발치레가 성행하여 영조(英祖) 32년(1756)에는 가체금지령이 나오고 차츰 쪽머리(낭자)가 정착된다. 웃옷은 단소화되는 반면 아래는 풍성하게 보이는 상박하후(上薄下厚)한 새로운 모양이 유행한다. 특히 후기 여성복의 저고리는 길이가 짧고 소매통이 좁은 왜소화(倭小化)로 변한다.
개항기(開港期)와 일제강점기
1876년 병자수호조약과 함께 개항하면서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중에 1881년에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고 옷이나 소총 및 계급, 전투실기를 모두 근대 서양식으로 바꾸는 등 큰 변화가 시작된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개화파들에 의해 생활의 간소화와 의식전환이 강조되며 자유평등사상, 동학혁명정신, 신교육보급, 여성교육 등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난다. 다시 1894년에는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크고 비활동적인 여러 종류의 의복을 간편한 옷으로 바꾸는 의제개혁(衣制改革)을 하게 된다. 특히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분의 평등의식이 의복의 간소화를 부추긴다. 남성들이 겉옷으로 입던 소매가 넓고[廣袖] 뒤나 옆 트임이 있는 도포나 창의, 중치막 등 여러 가지 포(袍)를 트임이 없고 소매통이 좁은 간편한 두루마기[周衣] 하나로 입도록 한다. 이로 인해서 용도와 신분에 따라 다양했던 포류(袍類)는 차츰 사라지고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되어 오늘까지 10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고종(高宗)은 두루마기를 관민(官民) 모두 흑색으로 입도록 하였는데, 이는 상하평등과 관민일체감을 주고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함이었으며 우리나라 의생활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획일적인 복식간소화 작업이었던 것이다.
특히 고종 32년(1895)에 내려진 단발령과 문관예복을 양복으로 바꾸는 문관복장규칙반포는 우리나라 역사상 신라 통일 후 가장 큰 획기적인 사건으로 많은 의미를 가진다. 이제까지 의례의 상징이었던 갓을 벗고 서양모(西洋帽)를 쓰게 되었으며 양복화로 접근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는 의생활사상 두 번 째의 큰 전환기로 한복과 양복의 혼용은 신라의 삼국 통일기 이후 130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오던 우리 옷과 중국 옷과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이중구조에서 다시 서양복과의 공존에서 오는 새로운 이중구조현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서양복화는 서울이나 도시의 관인(官人)이나 학생들의 공복으로, 또는 일부층에서 이루어졌으며 일반민은 우리 옷을 준수하였다.
1897년 고종은 황제(皇帝)에 오르면서 명나라 황제와 같은 십이류면 십이장복의 면복(冕服)을 입었는데 조선시대 왕복은 큰 변화는 없었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의생활은 왕실을 위주로 하였던 계층문화에서 일반평민을 위한 대중문화로 바뀐다. 이 속에는 일본이 우리의 상층전통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적인 수단과 의료공급으로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의도도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관원이나 친일파에 의해 일부에서 일본 옷(기모노)을 입음으로써 한복과 양복 및 일본풍이 병존하기도 한 복잡한 시기였다.
우리 옷의 현주소
현재 우리 나라 의생활은 전통과 현대라는 양면을 조화롭게 지키면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전통적인 관혼상제 의례는 매우 특별하고 희귀한 볼거리가 되어 가고 있다. 혼례식장에서의 서양식 혼례의례와 혼례복, 상주들의 상복(喪服)은 양복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입고 가야 할 수의(壽衣)가 죄인인 상주가 입는 삼베로 만드는 일, 특히 여자 상주들이 검정색 한복을 입는 일은 우리의 전통을 다시 바르게 찾아 고쳐야 하는 과제중의 하나이다. 옷에는 편안함과 가벼움[輕]·무거움[重]이 있다. 의례와 일상(日常)과 노동은 분명히 구분이 있어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 나온 개량한복에서 1900년대 후반부터 나온 생활한복이라는 옷까지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일들이 많다. 전통은 그 나라의 얼이요 생명이다. 오랜 전통은 불편하지만 그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기에 지켜 온 것이다. 바르게 찾고 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이어가야 한다. 이는 아무리 싫어도 내 조상과 내 땅을 바꾸지 못하는 천륜(天倫)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옷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중국의 관복을 받아들이면서 지배층의 의생활은 일부 복속(服屬)화 하였으나 일상복이나 민간에서는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개항기(開港期) 이후 개화파들에 의한 서양화는 우리 옷의 장점 이어 가기 보다 단점 들추기에 더 앞장섰다. 우리 옷은 “비(非)위생적, 비(非)경제적, 비(非)활동적 인 옷”이었다. 그렇다면 서양의 구두 굽 높은 하이힐은? 콜셋은? 모자는 어떤가?. 그토록 강점기 때 일인(日人)들이 한복개량을 주장하였는데 그들의 옷은 어떤가? 그러나 이런 부정적 상징거리로서의 “비(非)”자로 우리의 옷을 말살시키려고 했지만, 반만년 이어오는 동안 이(異)민족에 의해 중국화와 서양화하는 가운데서도 한번도 그 기본을 잃지 않았다. 조상들이 입어온 의관(衣冠)을 갖추는 예의(禮儀) 민족정신은 면면히 이어온 것이다.
지금 일상복이나 예복조차도 서양화하였으나 아직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분도 있다. 죽어서 입는 수의(壽衣)는 모두 우리 나라 옷 ‘한복(韓服)’을 쓰고 있다. 시골에 가면 윤달 윤년에는 이웃끼리 품앗이하면서 만드는 옛 풍습을 지키는 정성이 남아있다. 옷감은 요즘 삼베로 만들고 있는데 우리 어머니 때까지도 비단을 살 수 없고 또 일반 백성에게는 금지되었던 것들이라 “저승에서 입을 옷”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감으로 갖추어 입었다. 백성들은 “맹지[明紬]가 비단이여”라고 하면서 명주로 만들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이었던 혼례 때 입었던 것을 새로 만들어 입었다.
그러나 다시 우리 것을 찾고 바로 알기 위한 차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정부의 주도로 우리 옷 입기 운동을 시작한 점이다. 해마다 이 날은 기념행사와 함께 한복 잘 입는 사람을 선정하여 수상하고 있다. 또 각 대학이나 단체에서 열심히 우리 옷 살리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 한복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1995년 정부에서 “한복 입는 날”을 제정하고 해마다 공로자를 표창하고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효과는 그다지 신통하지 않은 듯하다. 전통한복은 날로 고가(高價)화 예복화하고, 전국민 한복보급화로 나선 ‘생활한복’은 인정받기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좀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바람직한 일로 국악마당에서는 지휘자나 연주자들이 한복을 입고 있다. 역사물 사극(史劇)에서도 달라지고 있다. 물론 고증이 철저해도 거추장스럽고 돈이 더 드는 부분은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외에 학교나 학술단체 사회단체에서 우리 옷 알기에 많이 노력하고 있다. 학술단체로 한국복식학회, 한복문화학회, 복식문화학회, 한복협회 등이 있다. 한편 평생교육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대학이나 문화재관계에서 전통한복 만들기와 발표회를 통하여 정립이 되고 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학문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우리 옷을 배우는 학과는 의상학과나 의류학과 계통이 있지만 차츰 강의가 줄어들고 있다. 우리 옷에 대한 것을 배우는 과목은 이론으로 ‘한국복식사(韓國服飾史)’가 있고, 실기로 ‘한복구성’은 드물게 그것도 겨우 한 학기나 배당 될 정도이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대학교 학점제가 줄어들면서 선택이거나 또는 아예 폐강시켜 버리는 실정이다. 해마다 석·박사학위로 논문으로 한국복식사 분야가 나오고 있지만 대학에서 쓰일 자리가 많지 않다. 특히 가장 예민한 시기, 중등학교에서의 우리전통 우리 옷에 대한 교육은 컴퓨터 등 당장 현대 사회에 쓰일 과목에만 열중하고 있다. 국제화 세계화는 이들의 손에 달렸다. 자기 것을 잃었을 때 국제화는 결국 열강의 ‘사대화(事大化)’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으며, 이는 자멸하는 길뿐이다. 이들이 세계의 대열에 섰을 때 국적은 어디가 될까? 부쩍 요즘 들어 상류층이나 서양 종교인들의 장례 때 여성들이 입은 상복을 보면 검정색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다. 서양식이고 일본식이다. 요즘 “패션”이나 “다자인”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대학이나 학과(學科)의 명칭, 수업 과목이름도 전부 외래어로 쓰고 있다. 우리 옷을 자랑하고 선보이는 것도 “횟션쑈”라고 하고 있다. 한복 만드는 사람 명함도 “한복 디자이너”라고 쓰고 있다. 외래어는 신세대나 일반 대중에게 더 호감이 가고 세련됐다고 믿고 생각하리라는 발상이다. 용어가 그렇듯이 이는 이미 우리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을 스스로 드러냄이 아닐까?.
열 올리고 있는 영어교육은 어떤가.
우리 나라 사람들, 우리학생들.
우리 글, 우리 말, 제대로 말하고·읽고·쓸 줄 아는가?
지금 내 앞 것, 내 것은 얼마나 가리고 챙기고 있는지?
뭐가 국제화이고, 잘 사는 길인가?
공동기획:문화저널, 전북대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