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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7 |
[이흥재의 마을 이야기]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연동마을
관리자(2008-07-08 18:35:17)
연꽃 마을 모정(茅亭), 문화공간으로 변신을 꿈꾸다 연동마을에는 ‘정다운집’ 모정이 3채나 있다. 소나무 숲에 아늑히 안겨 있는 ‘뒷시정’-이 마을에서는 옛날에 모정을 시정이라 했다-은 1930년생으로 거의 80살에 가까웁다. 처음 만들 때 모습 그대로 라고 마을 노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한 마을에 간혹 모정이 두 개가 있는 곳은 더러 있다. 내가 자란 고향 마을에도 ‘웃모정’, ‘아랫모정’ 2개이지만 한 마을에 모정이 3채나 되는 곳은 연동마을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세군데 모정 중 ‘아래까테 시정’은 지금 마을입구에 있는 모정이다. 주민 전체가 모여 마을일을 의논하고 휴식을 취하던 3×2칸의 주로 남자들의 공간이다. ‘우까테 시정’은 윗터모정으로 아녀자들이 집안일이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우던 곳으로 모정 주변에 100여년 된 20여 그루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고 어머니를 따라 나온 아이들이 놀이터 삼아 놀던 곳이다. 비록 늙어 쇄락했지만, 2×1칸의 아담한 규모에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가운데까테 시정’은 마을 가운데 터에 있는 모정으로 6.25 한국 전쟁이후 시조를 좋아했던 마을 부자가 세운 모정으로 시조 명창들을 마을로 초대하여, 모정에서 시조도 듣고 배우기도 하면서 풍류를 즐기던 장소이다. -‘아래까테 시정’은 아래시정, ‘가운데까테 시정’은 웃시정, ‘우까테 시정’은 뒷시정을 말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연화정(蓮華亭)에는 모정의 내력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이 정자는 뒷동산에 있는 모정과 함께 1930년에 창건되어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사용하던 중, 일제 말엽 왜정의 학정으로 모정 마루판을 철거당했다. - 낮에 일하지 않고 낮잠이나 잔다는 이유로 - 1945년 광복으로 마루판을 다시 부착하여 모정으로 사용해왔다. 1971년 새마을 사업 추진으로 초가(草家)지붕인 모정을 중건할 계획으로 완전 철거 했으나 자금난으로 착공하지 못하고 3년 후에 보관했던 목재를 사용하여 모정을 재건(再建)했다. 그 후 모정이 환갑을 맞이하여 건물이 너무 낡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객지에서 거주하던 청년들이 뜻을 합하여 헌성금의 내용과 같이 성금을 모아 이 정자를 신축하여 11월16일 상량하고 연화정(蓮華亭)이라 제액하였다. 1990년 11월 귀기둥에 ‘정다운집’이란 나무 현판이 걸려있는 모정에 마을 유래를 적은 현판이 또 있다. 연동(蓮洞)마을은 본래 삼한시대때는 마한땅으로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에 속했으며, 3국시대에는 백제 모량부리현(牟良夫離縣)에 속하던 지역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모량부리현이 고창현(高敞縣)으로 개칭되어, “보릿고을”을 상장하던 이 고장의 속명 ‘모양(牟陽)’이 ‘고창’과 함께 오랫동안 불리어 왔다. 고종 32년(1895)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일정시대 1914년 3월1일 일부 군 통폐합령에 따라 무장군과 흥덕군을 고창군에 병합시켰다. 연동마을이 속해있던 수곡면(水谷面)은 행정단위 통폐합에 의해 고사면(古沙面)과 합하여 고수면(古水面)으로 개칭되었다. 연동마을은 떡시루를 닮아 시루증(甑)자를 쓴 증산(甑山)봉아래, 연화도수(蓮花到水)의 형국으로 마을 형상이 연꽃을 닮은 명당터이다. 1300년대부터 연안이씨가 터를 잡고 살아오면서 고연(古蓮)마을이라 부르다가 죽산안씨가 들어오며 “장연동(長年洞)”이라 개칭했다. 지금은 연안이씨는 한집도 없다. 1500년대 죽산안씨가 입향하여 후손이 번창하고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년동(長年洞)으로 개칭하였다. 마을이름이 고년동(高年洞) → 고련동(古蓮洞) → 장년동(長年洞) → 연동(蓮洞)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마을의 유래를 현판에 새겨 걸어 둔 곳은 거의 보지 못했다. 또 옆에는 주차장 조성 방명비도 크게 세웠다. 마을 유래, 모정 건립기, 마을회관 신축비, 주차장 조성 방명비 등으로 보아 이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방식과 기록문화의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문화를 기록문화의 아름다움이라 이야길 한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수원화성 의제 같은 문화유산을 들 수 있다. 이 연동마을은 기록문화의 후손임을 실감할 수 있다. 고창 향교 전교(典校)를 지낸 81세의 안도연 어른의 증언에 의하면 6.25 한국전쟁이후 마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고 한다. 이 마을에 갑오(甲午)생 남자만 12명이고 여자는 몇 명을 낳았는지 잘 모르지만 한 20여명이 한해에 태어났다. 갑오생은 1954년 생으로 지금 우리나라 나이로 55세이다. 그래서 뒷시정과 아랫시정에 더해서 2×1칸의 웃시정을 하나 더 짓게 되었다. 이때는 고수면에서 가옥수가 100여호가 넘어 제일 큰 동네였다고 한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모정을 다시 하나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50여호 남짓밖에 안되고 거의 여느 마을처럼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마을 당산돌이 4개가 남아있고 당산돌이 배치된 중심에 큰 수양 버드나무 당산나무가 있다. 매년 당산제인 ‘고련제’를 지냈으나 70~80년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미신이다 하여 당산제를 중단하였다. 마을에 우환과 자손들의 사업이 번창하지 않자 다시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최근 안상현 등 30代의 젊은 청년들이 세 곳의 모정을 중심으로 새로운 마을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서화 모정으로의 초대”라는 제목을 붙여 마을 모정을 중심으로 연동마을을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꾸미고자 하는 계획을 야심차게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모정을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마을 전체를 관광상품으로 변신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모정에 와서 시서화를 즐기는 풍류의 멋을 되찾게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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