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 | [한상봉의 시골살이]
집 떠나는 겨울
한상봉(2003-04-18 17:35:52)
시골살림은 날씨에 예민하다. 봄에 모내기하고 가을걷이를 할 때까지는 '비'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천수답인 산골 논에는 비가 와 주어야 모내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고, 비가 오기 전에 밭을 일구어두었다가, 비가 오고 난 직후에 씨앗이든 모종이든 밭작물을 심어야 가뭄을 덜 타고 촉촉한 생기(生氣)가 돋아난다. 태풍과 장마 때에는 고추나 벼가 넘어질까 염려하고, 가을에는 볕 좋을 때 추수한 것을 잘 말려두어야 한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며칠 간 나다닐 수가 없으니, 필요한 물품은 제 때에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하고, 하얗게 길이 끊어진 산골에서 가스가 떨어지면 난감하다. 대숲 위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활적인 걱정이 스치는가 하더니, 이내 적막한 산골이 더 적막해지고, 댓잎 위에 앉은 눈을 푸르륵 털면서 날아가는 앙증맞은 새에게 눈길을 돌린다.
우리 마을은 너댓집이 뚝뚝 떨어져들 사는데, 이렇게 눈발이 쌓이고 적적한 날, 집에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인근에 귀농해서 사는 선배 부부는 겨우내 서울로 돈 벌러 갔다. 두어 달 예정으로 분당에 있는 주유소 일을 거들기로 했다는데, 서울 사람들 기름도 넣어주고, 다른 일도 거들 것이다. 본래 시 쓰는 선배인데, 어차피 농사로는 자급자족을 넘어서기 힘들기 때문에, 농한기엔 달리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같은 마을 혼자 사는 후배가 빈집을 지키며 그 집 달걀을 얻어먹고 있는데, 얼마 전에 그 집에 갔다가 일을 조금 도와주고 나도 오미자 효소와 달걀을 얻어왔다. 겨울엔 생각이 많아지고, 봄이 되면 그냥 툭 털고 나와서 다시 괭이를 잡는 사람들이 농부들인데, 생각해 보면, 사람들도 겨울잠을 자는 셈이다. 한 계절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모으고, 그 힘으로 창조적인 한 해를 또 열망하고 걷는다.
여름이 가까워 오면,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서울 살 때는 우리 집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던 친구들도 우리가 시골에 정착하면서 방문할 마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부분이 여름 휴가철에 일정을 맞추다 보니, 이틀에 한 차례 정도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 여름밤엔 반딧불이도 날아다니고, 하늘이 맑은 날에는 은하수를 볼 수도 있다.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정담을 나누다가 술도 마시고 돌아가며 노래도 부른다. 그래서 여름엔 주로 집을 지키게 된다. 그런데 겨울엔 유난히 추운 산골에서 장작도 아낄 겸해서 우리 가족이 주로 바깥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눈이 오고 길이 얼어붙어도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만나러 간다. 날씨가 추워지면 마음도 얼어붙기 마련이라서, 유난히 사람이 그립고, 올 수 없는 사람에게로 우리가 간다. 아마 이런 습관도 우리 집에 자동차가 생기고 나서 붙은 버릇이지만, 화물차라도 없으면 겨울엔 바깥 나들이할 엄두를 내는 게 쉽지 않다.
겨울에 도시로 나들이를 할 때 느끼는 묘한 심리가 있다. 막상 길을 나설 때는 아파트의 따뜻함을 기대하지만, 정작 아파트에 방문해서는, 웃풍이 없이 공기조차 데워진 방안에서 갑갑증에 시달린다. 어떨 때는 겨울밤에도 창문을 약간 두어야 호흡이 가벼워진다. 낮에 움직일 때는 온방이 따뜻한 게 좋을 테지만, 잠 잘 때는 이불 속만 따듯한 게 좋다. 그래서 아파트의 훈훈한 방에 누워서도, 갑자기 뜨끈한 구들에 등을 지지면서 시원한 냉기를 얼굴에 받으며 자고 싶어진다. 어떤 집은 열대야를 연상시킬 정도로 더워서 다들 얇은 속옷 바람으로 잠을 청하는데, 우리 식구들은 버릇대로 겨울 내복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끈끈한 땀을 목덜미에서 씻어내며 잠투정을 하게 된다. 아직도 이번 겨울엔 꼭 한 번 찾아뵈어야지, 생각해둔 사람들이 여럿 남아 있다. 이렇게 겨울은 집 떠나는 계절이다. 그러면서 시골집의 독특한 온기를 확인하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