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7 |
[신귀백 영화엿보기]
관리자(2008-07-08 18:33:57)
올드 히어로의 세계
<아이언 맨>,
<섹스 앤 더 시티>,
<인디아나 존스>
올디스 벗 구디스
머리를 송곳으로 쑤시는 영화는 좋다. 그러나 <섹스 앤 더 시티>처럼 부드러운 샴푸에 머리를 맡기는 영화 역시 나쁘지 않다. 도시의 파티걸들이 '뉴욕 뉴욕, 구두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노래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꼭 남자와 구두만은 아니리라. 고랑이 깊게 파인 캐리의 얼굴과 갱년을 맞은 사만다의 노화는 실제적으로 우리의 노화를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안타까웠지만, 돈 많고 교만한 중늙은이가 설쳐대는 <아이언 맨>이나 중절모에 채찍을 휘두르는 독거노인 <인디아나 존스>의 아날로그 액션은 낡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말리는 듯 해 좋았다.
강철맨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아이언 맨>
발명가이자 사업가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억만장자다. 인간과 도구를 연결시켜 세상을 유용하게 만드는 인터페이스 아닌 그 관계를 파괴하는 무기를 만들던 사람. 새로운 무기를 팔러간 그가 아프가니스탄 사막에 불시착한다. 그는 돌언덕에서 어린왕자나 장미꽃과 조우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노리는 아프간 반군을 만나 죽어라 담금질을 당한다. 영웅설화 역경탈출 장면에서 그는 자라나 물고기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탈출을 시도하는데.
엄벙한 무쇠갑옷으로 위기에서 목숨을 건진 그는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는다. 뭔가 잘못 살았다는 것. 하여, 무기의 역사를 쓰던 그는 이제 자신이 직접 무기가 되기로 한다. 인간에 대한 무기통제능력의 상실을 비꼰 정도의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장년의 그는 변한다. 영리하게 생긴 눈, 빤히 바라보는 음험한 시선을 가진 사십도 중간을 넘긴 그의 변하는 것, 좋지 아니한가.
카리스마보다는 교만의 얼굴로 놀 줄 알게 생긴 이 CEO는 패밀리 비즈니스를 혼자서 처리해나간다. 머리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랄까? 집중력과 인내력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해내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교활한 지혜를 던지는 사냥꾼인 그는 자신의 두뇌와 노력 그리고 돈을 믿는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없는 사람들은 계약으로 갈등을 막고 연대해서 조정을 하는 법이지만 금불알을 달고 태어난 그가 알 리 있겠는가.
독창적 하이테크놀로지라 해도 그다지 예술적이지 못한 아모르 수트를 개발하는 과정은 재미있다. 수트가 갖는 방어력과 속도와 파워에 대한 믿음 그리고 제어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 끊임없이 버전을 달리하는 제품개발에 몰두하는 그를 보면 전력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질 정도. 스파이더맨은 피자를 배달하고 슈퍼맨은 가난한 사진기자로 자기 자신을 감추기에 급급하지만 이 양반은 결정적 순간에 자신이 아이언맨임을 밝히는 것, 신선하다. 자고로 영웅은 말수가 적지만 이 슈퍼 히어로는 말도 많다. 아쉽다면 아모르 수트가 너무 무겁게 디자인 되었다는 것. 외유내강의 로봇 에반게리온의 선처럼 좀 고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로봇 에바를 조종하는 열다섯 살 소년 신지보다는 장년의 수고가 2편을 기다리게 한다.
40대 아가씨들의 성장 스토리 <섹스 앤 시리>
대부분의 도시형 러브스토리가 자신의 과거를 다룬다면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는 여성들의 미래가 그려지기를 바라는 여자들의 이야기일 것. 이 드라마를 남자들은 싫어한다는 사실. 왜? 쇼핑에 미치는 데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여자가 넷이나 나오니 말이다. 아니, 사십 넘긴 지가 언제인데 왕자타령이야? 이 교양 있는 속물들은 하나같이 능력 있는 데다 우정은 또 얼마나 강고하며 밝히는 것은 얼마나 뻔뻔한지. 게다가 이들은 누구와도 쿨하게 헤어지지 않던가.
뉴욕. 세트를 짓지 않아도 도시 그 자체가 스펙터클한 시대극(최첨단 현대) 세트가 되는 동네다. 이 매혹의 공간에 멋쟁이 캐리, 헌신적인 미란다, 사랑을 카마수트라로 생각하는 사만다, 요조숙녀 샬롯(남자들도 좋아하는)이 뉴욕을 활기차게 걷는 도입부 크레딧 시퀀스는 비누방울처럼 가볍다. 영주나 지주가 아니어도 호화로운 저녁을 먹는 꿈으로 찻집과 밥집 옷집을 찾는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즈녀들의 섹스 앤 석세스 스토리도 즐겁지만 드라마 말미에 칼럼처럼 늘어놓는 캐리의 깨달음을 담은 경구는 들을 만하다.
초밥을 몸에 바르고 누워있는 지천명이 다 된 사만다 누님은 연하 애인 헐리우드 배우랑 한참 지겨워지고, 섹스리스 미란다 변호사님은 남편 스티브가 외도한다. 사랑하는 남편 해리와 아이를 입양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던 입이 찢어지게 환한 웃음의 샬롯에게는 임신의 기적이 일어나고. 그리고 신발에 집착하는 감성주의자 캐리에게 부자 남자친구 맥이 룸메이트 아닌 웨딩메이트로 살아가자는 청혼을 한다. 쇼핑에 남자까지, 이 비단에 꽃 뿌리기가 재 뿌리기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칼럼니스트 캐리는 앞으로 살게 될 펜트하우스의 옷방을 꾸며준다는 빅의 말에 감격하는데, 그저 왕자를 기다리는 재투성이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에 더 기뻐하는 것. 잡지 보그의 웨딩드레스 주인공이 되면서 이 아가씨 자신을 깜빡 잊는다. 그러나 이 얼굴이 노트북만한 장년의 빅에게는 보통사람들이 인생에 한두 번 생기는 일이 그에겐 벌써 세 번이라는 사실. 빅은 결혼식 자체가 쇼가 되어 이목을 끄는 것이 불편 한 것. 결국 빅의 낙차 큰 커브에 상처받은 캐리는 운다. 안정된 공간으로 편입하는 것이 자신의 자아를 해치고 독립성이 훼손된다는 것을 깨닫지만 때는 늦은 것.
하지만 상처받은 캐리에게는 친구들이 있다. 결혼보다 자립의 중요성을 깨달은 우정의 전사들 말이다. 결혼식에 결석한 그를 잊는 어려운 시절이 지나가고 그녀에겐 깨달음이 찾아온다. 자신의 러브스토리가 어떤 윤리양식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 남자의 마음을 읽기보다 삶의 데코레이션이 본질을 넘어서버렸다는 성찰이 성숙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동안 샬롯은 아이를 낳고, 이 뉴욕 스토리는 헐리우드 엔딩 스타일의 정점인 결혼으로 흘러간다.
노인을 위한 나라도 있다. <인디아나 존스>
인디를 보면서 우리는 늙어왔다. 늙어간다. 액션 어드벤처의 전설 <인디아나 존스3 최후의 성전>이후 19년을 기다렸다. 나이 드신 영감님이 펼치는 아날로그 액션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 주는 스릴과 쾌감은 역시 짜릿했다. 남미의 유적들이 모두 테마파크 같아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처럼 가보고 싶게 그려지지 않은 것은 아쉬움이 남지만.
‘침대 밑 빨갱이’를 찾는 1957년 매카시 선풍이 한참인 때, 존스 박사는 대학에서 고고학 강의를 하며 착하게 살고 싶지만 세상이 그를 내버려 두질 않는다. 대학에서 잘리자 시간강사 자리나 알아보려는 그의 앞에 제임스 딘 흉내 내는 풋풋한 머트 윌리암스(샤이아 라보프)가 나타난다. 결국 이 영감님은 남미로 날아가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전설 크리스탈 해골을 찾아 나선다. 여기에 아리따운 적이 있었으니, 그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소비에트 공화국 대령 이리나(케이트 블란쳇도 40이다) 일당 역시 해골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 세계를 정복할 야욕으로 그들을 쫓는다. 중절모에 채찍이라는 향수를 자아내는 무기에, 케이트 블란쳇은 단발머리에 탄탄한 몸매를 드러내는 올드 군복이라. 반갑다 친구야!
존스박사는 서커스에 가까운 액션 묘기를 부리지만 그의 등짝에는 노년의 둔탁함과 피로가 어려 있다. 학교 따윈 필요 없다던 그가 지 새끼에게는 학교 다니라 하는 모습은 귀엽지 않은가. 대부의 돈 콜레오네는 그 나이에 농장에서 토마토나 일구었는데 채찍을 드시는 매력 있는 노인으로 고생하신다. 저 옛날 성궤를 찾는 영화에서 칼 휘두르는 녀석에게 총 한 방 팡 쏘면 쓰러지던 장면이 생각난다. “옛날엔 펄펄 날았는데”하며 영감이 다 된 이참에도 죽어라고 쫓기는데. 애들은 사다리로 내려가다 자빠지지만 노인은 계단으로 조심스레 내려오는 장면은 CG보다 훨씬 유쾌하다.
스필버그 형님, 조지 루카스, 그리고 해리슨 포드라는 드림팀이 만든 논스톱 어드벤처의 롤러코스터 쾌감의 뒤를 마무리하는 부분은 좀 허망하다. 이 미스테리가 신과의 소통 뭐 이런 식의 궁금증을 자아내다가 외계인의 선물이라는 식 마지막 UFO는 젊은 관객들에 대한 아부로 읽히고. 결국 악의 축인 소련이 물건을 넣기 전에 존스박사가 보관한다는 스토리는 몇 십 년 전이나 똑 같다. 액션은 즐겁지만 감독이 다 알아서 혼을 빼줄 테니 너희들은 가만있으라는 과외받기 스타일이라 썩 유쾌하지 못하지만, 노인일자리 창출이라는 면에서 긍정적일 것.
손석희, 클린트 이스트우드
도시적 세팅, 의상, 음식, 섹스라는 소비 공간의 도상학을 그린 <섹스 앤 더 시티>는 여자들의 우정이라는 얄팍함으로 포장한 상품광고라는 질책도 있을 것이다. 보석반지 경매부터 핸드백, 구두와 웨딩드레스, 근육남에 이르기까지, 뭐 맞는 말이다. 근사한 레스토랑과 부티끄를 찾아 돈을 쓰고 남자들과 헤어지는 뉴욕의 그녀들을 보다보니 10년이 후딱 갔다. 그리고.
독거노인 존스 박사가 채찍을 놓고 후학을 양성하는 사이에 기형도와 김광석이 간 지도 꽤 되었다. 지리산 계곡물에 삶을 두고 간 고정희의 시였을 성 싶다. ‘오, 우리의 사월은 이렇게 가도 좋은가’를 술만 마시면, ‘우리의 사십은 이렇게 지나가도 좋은가?’ 하며 소주잔을 들이키곤 했다. 노인으로 한발 한 발 나아가는 우리들은 이자율과 간수치를 이야기 하지만 이제 한숨과 키스 그리고 잠 못 드는 날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래도 위안이라면 잠 못 자고 지켜보는 100분토론 진행자의 동안과 그의 콘트롤 파워를 이야기 하는 아침이 있다는 것.
소년은 이로하지만 노년은 쉬 피로하다. 학문도 색도 이루기 어렵다. 그래서 영화라도 본다. 맨날 얼음으로 머리를 치는 영화만 볼 수는 없을 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처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뒷감당 먼저 생각하는 노인 수사관은 리얼리즘이지만, 적잖은 나이를 먹은 아이언맨 혹은 캐리처럼 저지르는 판타지도 때론 필요한 일일 것. 깐 마늘 같은 쉰셋의 손석희 그리고 <미스틱 리버>를 만든 팔십 다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 속 그림 아닌 현실 속 장면 아니던가. 워쇼스키 형제의 <스피드레이서>가 보여주는 취향의 속도에 이르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에서 거북이 노인네의 깨달음과 여우 시푸의 젓가락 훈련 그리고 뚱땡이 팬더의 재롱 섞인 무술을 즐길 줄 모른다면 ‘지혜’의 올드는 ‘낡은’이라는 해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늙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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