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7 |
[명인명장 | 내가 살아온 세상] 명창 최승희
관리자(2008-07-08 18:29:35)
우리 국악은 변할래야 변할 수가 없어요
작은 체구에도 그 눈빛은 형형합니다. 몸짓과 손짓에서는 기품이 넘칩니다. 십 여 차례나 받은 수술휴유증에 병원 신세를 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마저 병원에 의탁하는 것은 아닙니다. 삼십년을 내다보고 소리를 했다는 정정렬제 판소리의 계승자인 최승희 명창. 배우기도 어렵고 고수가 장단 맞추기도 까다롭다는 정정렬제를 이어가고 있는 그녀. 바위 같은 성정이 오늘의 최승희 명창을 있게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때 판소리 사설집과 악보집을 자비로 출간한 고집.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고 안주하지 않고 우리 판소리를 지키고 보급하기 위해 나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최승희 명창의 입으로 그의 삶을 돌아봅니다.
익산서 태어났지. 쌈산터서
익산에서 태어났어요. 쌈산터, 쌈산터 거기서 태어났다는 얘기죠. 익산에서 태어나서 자라서 학교를 다니고 그러니까 내가 열 여덟에 내가 소리 배우러 나간 거죠. 형제가 5남맨데 젤 큰 언니가 죽고 지금 젤 막내동생이 또 인자 내 밑으루 남동생이 둘인디 젤 막내동생이 죽었어요. 올해... 죽었어. 지금 삼남매가 살아갖고 있죠.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내가 나이가 어려서 돌아가셔가지고. 아버지가 그렇게 날 이뻐하셨는데. 어머니는 장수를 하셨죠. 팔십 몇 세든가 모르겠네. 그렇게 돌아가셨으니까. 어머니는 오래 사셨어요.
아부지 손 꼭 잡고 협률사 따라 댕기고
아버지가 날 예뻐하셨어요. 그리서 아버지 얘기를 할라치면 많이 울었어요. 언젠가 케이비에스든가 문화방송이든가 여그 전주에서 오라구 그래가지구 그 방송국에서 아버지 얘기가 나오니까 아양 목이 콱 멕혀 갖고 울음이 터지는데 아 그냥 막 사정없이 울었더니 아무리 그칠라구 해두 안 듣고... 아 내 자신이 방송이니까 어지간치 울고 얘기를 해야 할틴디 말을 못허고 자꾸 울어싸니까 것두 인자 미안하데요. 에 이거 내가 분수없는 짓을 자꾸 하는디 왜 이럴까 울음이 그치야 할틴디 한참을 안 그치서 혼났네요. 그렇게 아버님 말씀만 나오면 울었어요.
아버지가 옛날에 협률사, 옛날에 국악인들이 인제 연극하구 소리허구 고렇게 허면서 그 단체가 들어오면 그것 보구 협률사라고 그랬어요. 협률사가 들어오면 아버지가 가신단 말이에요. 그러믄 아부지 나두 간다고. 아버지 손 꼭 잡구 따라댕기구. 어려서부터 끼가 있었어요. 옛날에는 노래라구도 안 허구 창가라구 그랬어요. 그 워낙에 노래를 잘 부르니까 동네 어머니, 할머니들이 아 여기서 이러구 놀지 말구 채선이네 가서 채선이 창가소리나 듣자구. 내 이름이 채선인디, 호적에는 채선이에요. 오셔서 너 창가 좀 들을라구 왔다. 창가 좀 해라. 그러면 서슴없이 허구 했어요. 가요 번지없는 주막, 사공의 뱃노래 뭐 그런거... 뭐 하여튼 옛날에 부르던 그 노래가 참 기가 막히게 많았는디. 그 많은 노래를 잘 불렀으니까. 그렇게 총명했어요. 옛날말로는 총기가 좋았다. 총기가 좋았다고 봐야죠. 하이튼 노래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이루다시피 그렇게 했어요. 지금은 판소리만 하다가 보니까 가요는 다 잊어버렸어요.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하는 것 같았어요
군산에 사시는 우리 저 우리 할머니의 형제간이에요. 고모들이 여러분이 사셨어요. 고모들이 내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 어머니 보고 언니라고 허니깐. 아, 그 유행가 잘 부르는 채선이 좀 데리고 오라고 허니까 우리 어머니가 첨에는 바쁘니까 그냥 농사짓고 그러구 사시니까. 한번은 너 나 따라서 군산 고모네 집 갈래. 어찌나 반갑고 좋고 그러니까 얼른 따라 나섰지요. 고모네 집 가서 노래 하라면 노래하구 앉아서 놀구 그랬는데. 그 이튿날 어머니는 가시고 이 고모님이 단오모시계 왕주니까. 그때 단오모시계라고 했는데 뭔지 뜻도 몰라요. 너 나 따라가자 그러니까 깨금짚고 좋아서 얼런 따라갔어요. 그래갖구 따라갔더니 어느 골목에 거가 성악회였어요. 지금 일테면 국악원이라는 그런 곳이에요. 에, 옛날에는 기생들이 소리를 배우고 그러는 장소가 어디냐면 권번이라고 했잖아요? 그 권번이 없어지고 전주는 국악원이라고 했는디 거기는 성악회라고 했어요. 몰랐지 후에야 알았지. 그 골목을 들어가는디 꿍꿍 북소리가 들려요. 그런디 북소리가 차츰차츰 가까워요. 이렇게 골목을 따라 들어가니까 그 집인디 기역자 집이었어요.
이렇게 들어가 보니까 여기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고 그러는데 그 집 한가운데 조그마하게 동그라하니 화단이 있어요. 작은 나무가 몇 그루가 있고. 그래서 이렇게 나무사이로 보니까 나와 같이 생긴 처자가 앉아가지고 진보라 유똥치마에다가 저고리를 노란 호박단 저고릴 입고 갑사댕기 드리고 그래가지고 막 머리를 따고 앉아서 노래를 불르는디 어떻게 이쁘든지 내가 그냥 홀딱 반해버렸응께. 우리 고모는 저쪽 국악원 뒤쪽에 사는 아주머니한테 곗돈을 받으러 인자 들어갔고. 나는 그냥 앉아서 걔 소리하는 것만 보는 거에요. 소리가 딱 끝나니까 일어나더니 북채를 양쪽에다가 쥐고 춤을 추드라고. 춤을 추는디 그렇게 이뻐요. 지금 보니까 그거시 승무였어요. 근데 승무복색을 입지 않고 남자 둘이서 북을 양쪽으로 이렇게 들고 북채를 들고 떵쿵 떵쿵하고 북을 치는데, 법구를 치는데 이 떵떠쿵 떵떠쿵 떵떠쿠덩 떵떠쿠덩. 근디 이것을 어른들이 이것을 보고 법구라구 그래요. 근디 그 법구를 치니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하는 것 같애요. 너무 이뻤어요. 그걸 보느라고 눈이 빠져라 보구 있었지요. 이러구 앉아 있는디 우리 고모가 와 갖고 너 뭣 허냐 하고 등을 탁 치드라고. 깜짝 놀라 보니까 고모가 가자 그래서 가기 싫은디 더 보고 싶은디 고모 따라서 나왔죠. 나와 가지고 고모 따라서 이집 저집을 그러고 돌아댕기고.
너 소리한다면 이대로 죽을 것이고
고모 따라서 집에 들어와 가지고 고모보고 고모 엄마 설득 좀 시켜가지고 나두 아까 그것, 나 좀 배웠으면 좋겠다고. 아까 그것이 뭐시냐? 저 거그 소리허고 북치고 막 그러는거 있잖아요. 야! 그거 못 쓰는 거시여. 그거 기생들이나 그런 거 배우지 다른 사람은 배우는 거 아니라고. 아, 고모 뭐시 됐든간 아까 부르던 그 노래 좀 배웠으면 좋겠다고, 엄마 좀 설득시켜 달라고 막 고모를 졸랐어요. 우리 어머니가 오셨어요. 우리 고모가 전부 다 얘기해 가지고 설득을 시켜갖고 결국은 우리 어머니한테 허락을 받아냈어요. 그래서 고모네 집에 있는디 쌀로 우리 집이 농사를 짓고 고모네는 장사를 허니까 차라리 쌀로 갖다 달라고. 성이라고 글지 성이 먹을 거 대 줄라고 하면 쌀로 갖다 달라고. 우리 어머니가 나 먹고 지내는 것을 쌀로 이고 와 갖고 쌀로 갖다 주고 고모네서 공부를 하고 있는디. 하루가 이틀가 사흘가 이러니까 야 왜 안 오냐, 나보고 우렁이라고 그랬어요. 집밖에 안 나오니까. 아, 그 우렁이란 놈이 한번 나가더니 왜 이렇게 안 오냐. 아, 고모들이 안 보내요. 아, 그것두 하루 이틀이지 가 얼렁 데려오라고. 알았다고 그러면서 어머니가 그렇게 핑계만 대구 그렇게 안 데려오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상허니까 거그 군산을 오신거에요. 군산 와서 인제 내가 없으니깐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거지.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디 어디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들리더니 어린애 노랫소리가 들리더니 딱 고모네 집 들어오니까 이 문 보면 이만하게 유리 붙어놨잖아요. 밖에 비오는 거 보고 눈 오는 거 보고 그잖아요. 근디 쳐다보니까 내가 홀딱홀딱 뛰면서 노래 부르고 들어오거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알지. 그 노래가 유행간지 소리를 하는 건지 다 알지. 그거 구경도 많이 댕기시고 그랬으니까. 요 놈의 기집애가 요러느라고 안 왔다고. 너 이놈의 기집애 댕기끄댕이 끌려서 나간 거에요. 그대로 집으로 끌고 와서 한탕 얻어맞았죠. 생전 매라는 건 아버지헌티 맞아본 적이 없는디 한탕 얻어맞았죠. 그래갖고는 나중에 또 거그서 도망을 해가지고 쌀을 훔쳐가지고 쌀을 팔아가지고 돈 해가지고는 군산으로 또 도망 갔어요. 차비해갖고. 그래가지고 또 가서 배우다가 또 아버지한테 우리 어머니가 죽게 생겼어. 너 집에 와야지 그란으면 엄마가 죽게 생겼은게 와야지 안 되겄다. 그래갖고 어머니가 나를 끌고 막 왔어요. 와가지고 또 아버지한티 한탕 뚜들겨 맞았죠. 세탕을 맞았으니까 그런게. 그래도 허구 싶어갖고 또 도망가 갖고 아버지가 쫓아와서 끌려가서 또 한탕을 얻어맞고. 아이고 그래갖고 결국에는 아버지가 그냥 우리 동네 대나무가 많았어요. 대나무를 많이 심어가지고 대를 짜개갖고 소쿠리 같은 것도 막 짜요. 우리 아버지가 잘 짜요. 바구니를 참 이쁜 바구니를 많이 짰어요. 칼이 대쪼개는 칼이 이만허니 이렇게 두꺼갖고 한번 치면 탁 짜개갖고 그 놈으로 너 이 넘으로 너 소리한다고 하면 이대로 죽을 것이고, 안 한다고 하면 살려주마 어쩔래. 무서우니까 안 배울게요 안 배울게요. 칼을 딱 떼니까 지금 내가 여그서 못 배우면 죽어서 배울꺼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그 대나무 쪼개는 칼을 막 나한티 져누더니 갖다 팍 집어 던지니까 마당에 가서 콱 꽂히더라구요. 그래서 너 나가거라 너 같은 미친 년은 우리집에 둘 수가 없어. 그러구 우리 집에서는 너 같은 애가 있으면 큰일 나고 가문을 망칠 기집애니까 넌 우리 집에 있으면 안 된다고, 넌 호적에서두 빼야하고, 넌 안된다고. 나가라구. 넌 자식으로 생각지도 않을 꺼니까. 그냥 내 쫓았어요. 그래서 동네가서 내 친구네 엄마한테 우리 엄마한테 내가 차비 타 갖고 갔으니까 받으라고, 그래가지고 군산으로 가서 있다가 전주 국악원으로 왔어요. 전주 국악원으로 와서 공부를 하고 홍정택 선생님, 지금도 살아서 계십니다. 근디 그 양반한테서 군산서 배웠는디 전주 오니깐 김동진선생님이라고 그 분이 가르치고 있대요. 그 분한테 쪼금 배우고 있다가 가신다고 딴 선생님이 오신다고 그래서 보니까 홍선생님이 오셨어요.
19살 때 김여란 선생님헌테 가서 새로 시작했죠
그래가지구 전주서 공부허구 있는데 나를 봐주시는 강기식이란 분이 있었어요. 다 돌아가셨지만. 일찍 돌아가셨어요. 근디 그분께서 참 사람도 좋으시고 그 분이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분이 나를 동생으로 해 가지고 어머니가 늘 대주기가 힘들으니까 내가 단체를 나간다고 그랬거든요. 이런 아이들은 장래가 있는 아이들은 우리 국악원에서 키워 줄 의무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도립 국악원서 키워주라고 단체를 못 나가게. 그렇게 해가지고는 자기가 동생을 삼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국악원에서 인제 십시일반 전부 다 거둬가지고 내 뒤를 대주고 그랬는디, 그러지 말고 내 혼자 단독으로 허겄다고 그랬어요. 그 분이 혼자 단독으로 대주셨어요. 고마운 분이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그 분이 또 인자 소개를 해 가지고 이용복씨란 분을 소개를 해 가지고 이용복씨가 김여란 선생님을 소개를 해 주셔서 그래서 그 오빠가 나를 데리고 이용복씨한티 가 갖고 이용복씨하고 나하고 오빠하고 셋이서 김여란 선생님을 찾아갔죠. 찾아가 가지고 김여란 선생님이 나를 받아서 배웠어요. 그동안 배웠던 것을 다 없애버리고 새로 시작했죠. 이용복씨는 북을 배우러 댕기셨는데 직업이 형사였어요. 그분도 시조를 참 잘 불렀어요. 김여란 선생님한테 시조를 배우더만요. 그리 공부허도록 소개를 시키신거에요. 그래서 전주로 서울로 갔죠. 19살 때 갔죠.
선생님 수발을 다 했어요
우리 선생님보고는 내가 어머니가 그랬지 선생님이라고도 안 했어요. 딸같이 했어요. 선생님도 선생님이 뭐냐 어머니라구 해라 그러셨어요. 우리 선생님이 참 인물이 잘 생겼어요. 키도 크고 눈두 이만하구 눈 쌍까풀 해가지고 어떻게 이쁜지 참 잘 났어요. 그래가지고 입술을 보면 그린 것 마냥 피부도 어린애 피부 같았어요.
그러니까 7년 동안을 배웠는데 우리 김여란 선생님이 노이로제가 걸렸었어요. 무슨 광목도 인제 그냥 이불호청 같은 것도 다 뜯어가지고 쫙쫙 찢고 그렇게 허는 그런 때였요. 많이 아파가지고 주사 맞고 약 먹고. 수도국악예술학원이라는 학원을 우리 김여란 선생님이 허셨어요. 그래가지고 예술학원을 하고 그러니까 학생들이 그 때 여성국극단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김연수씨랄지 박도화씨 뭐뭐 박록주씨가 하는 단체들이 많았거든요. 여성국극단이 많고 러니까 어떻게 학생들이 많이 오고 그러는지. 그 수도국악예술학원에서 한 백여명 이상씩이 되요. 한 열명씩 이렇게 해가지고 한 반을 딱 짜요. 한 반을 짜가지고 가르치고 그랬거든요. 근데 우리 선생님이 아침에 조회만 딱 하고 나면 하나도 안 가르치고 전부 다 내가 가르치고 그랬어요. 우리 선생님은 당신이 약 다려 드시지도 못하고 내가 다려 드리고 그랬는데 애들 가르치다 보면 약 태워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두 우리 선생님이 나한티 야단 한번 안 하셨어요. 왜 그러냐면 아이들 가르치지 밥 해먹지 빨래하지 쉴 틈이 없었어요. 학생은 많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애덜을 무지하게 많이 가르쳤어요. 수발을 다 했어요. 우리 선생님 하여튼 노이로제 걸리는 바람에.
이모 나 쪼금만 주지, 나 쪼금만 먹지
조금앵씨라고 있어요. 여성국극단에 남자역할을 하는. 그분의 제일 큰 언니가 있었는데 자식도 없었구 그랬어요. 그러니까 친구집으로 이리 댕기구 저리 댕기구 그러는데 그 우리 선생님한테도 한 이십일두 있다가 가시구 그래요. 그 분이 인제 오셨어요. 오셨는디 내가 이모 이모 그랬죠. 이모라고 불렀는디 이모님이 오셔서 그러고 계시는데, 그 때는 밥해주는 사람이 마침 있었어요. 그날 아침에 야야 밑에다가 보리쌀을 깔고 밥을 허면 훨씬 밥이 구수하고 맛있으니까 그렇게 해라. 그래가지고 그날 아침에 보리쌀을 놔서 밥을 했더라구요. 누룽지가 눌으니까 그 놈을 긁어서 갖꼬 왔는디 어떻게 맛있는지 어린양 하느라고 이모 나도 쪼금만 주지, 나도 쪼금만 먹지 딱 그랬거든요. 근디 네 이년 네 이년 딱 이러드니, 왜요 엄마 그러니까 어디서 이모한테 반말을 해. 주지 날 좀 쪼금만 주지, 쪼금만 주세요 해야지 니 친구냐. 아 그래갖고 욕을 하기 시작해서 아침내 욕을 하는 거에요. 그래갖고 누룽지를 먹다 수저를 놓고 울었어요. 그냥 거그다 앉혀놓고, 꿇려 앉혀놓고 욕을 허고 야단인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 그렇게 많이 욕을 얻어 먹고, 그래갖고는 인제 창실로 들어가서, 무용실이 있고 창실이 있고 이층에 안방에 있었는데 내가 창실로 와갖고 펑펑 울다가, 나도 성질이 대단하거든요. 7년을 있었는데 그날 아침에 그 건너편에 있는 이제 리어카, 구루마 끄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문 열고 이리 좀 오라고, 그러니까 아저씨가 오더라고. 와서 구루마 여그다 대 놓고 나 가지고 있는 짐 좀 여그다 내 놀테니까 실으라고. 내가 어딜 가야하니까. 그래서 전부 다 문 앞으로 내 놨어요. 울면서 울면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짐을 다 실고, 사부님 보고 아버지 저 갈랍니다. 그러니까 깜짝 놀라갖고 아야 갈래, 어떻게 어디로 갈데 있냐. 동생이 청진동에 살았거든요. 서울. 그러니까 동생집으로 갈랍니다. 울면서 들어가서 보니까 퇴침있잖아요 머리를 이렇게 대고 있드라구요. 우리 선생님이. 어머니 저 갈랍니다. 말이 안 나와. 그대로 울면서 인사를 허고 나왔어요. 그때 나와 가지고는 안 들어갔어요. 우리 동생네 집에 가 있으면서 다니면서 애들을 가르쳤어요. 그렇게 허고 그러면서 박효원 선생님한테 가서 수궁가를 배운 거에요.
고향이라고 찾아갔다가 식겁을 먹었죠
그러다가 우리 애덜 아빠하고 어디를 가냐면 해남 가서 거가서 애덜 아빠가 장사를 좀 해볼까 그래가지고. 해남 대흥사 가 가지고 애덜 아빠하고 있다가 애들까지 다 서울서 전부다 데리고 와서, 아이구 고생 많이 했네요. 그땐 왜 이케 못 살았는지 몰라, 참. 집도 전세로 우리 집 팔아가지고 사업한다고 팔아서 싹 없애버리고 전세로 들어가서 그 놈까지 빼가지고 쓰고는 사글세로 댕기다가 또 쪼금 나아지면 전세로 댕기다가. 아이고 그 때는 왜 그렇게 돈도 벌리는 거시 없고 그랬는지 몰라. 고생도 많이 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새끼들은 밥 굶기구 그러지는 않았는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득하고 용케 죽지 않고 살아 왔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해남이 우리 애들 아빠 고향이거든. 고향가서 살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내려갔는데. 인제 그렇게 해 가지고 가니까 살기 위해서 고향을 찾아왔다 해서 가니까 참, 사람들이 멸시를 하고 그랬어요. 금의환향을 해서 갔으면 그 사람네들이 그렇게 안 했을거에요. 금의환향도 아니고 고생하다가 가고 그러니까 그것을 그냥 얕잡아보고 그랬어요.
우리가 하는 일도 불법이 아닌디 경찰서에 찔러가지고 그러고 그랬어요. 우리가 인자 뭐 장사한다고 이것저것 갖과서 파는데 이름 없는 것을 갖다 판 것도 아니고 그랬는데, 신고하고 막 그랬어요. 돈 없어가지고는 고향을 찾아갈 일 아니더만. 우리 애들 아빠가 고향이라고 찾아갔다가 식겁을 먹었죠.
칠십 팔년도 정도 돼가지고 올라왔는데. 글고는 서울로 다시 올라가야 되는데 갈 수가 없고, 돈이 없고 그러는데 우리 사촌동생이 있었어요. 우리 외삼촌 딸이 거기 살았는데 그 때 돈으로 삼십 만원을 꿔줘서 돈 삼십 만원을 가지고는 살림을 뒤에다 실고 식구들 다 데리고 그래가지고 경기도 고양으로 이사갔어요. 칠십 칠년인가 팔년인가 될 거에요. 내가 칠십 구년도에 서울에서 장관상을 탔으니까.
쟤를 저렇게 좋은 소리를 묻혀둘래
그 때 올라가가지고 칠십 팔년인가 될 거예요. 우리 선생님한테 인사차 간 거에요. 선생님이 살아계신가. 그렇게 허고 나왔어도 선생님이 보고 싶고 그러드라고요. 그래서 인사허러 간다고 우리 애덜 아빠하고 같이 인사하러 갔어요. 인사차 갔더니 딱 붙잡는 거에요. 계속 해야 된다고. 나는 소리공부를 접고 안 헌다고, 안 허는데 지금 인자사 뭣을 하냐고. 지금 해도 괜찮으니까 지금 해야 된다고. 그서 내가 죽어도 안 한다고 했어. 죽어도 안 한다고 딱 잘라버렸어. 그랬더니 우리 애덜 아빠를 붙잡고 자네가 대답을 하라고. 쟤를 저렇게 좋은 소리를 묻혀둘래, 내 놀래. 하자. 막 그냥 우리 애덜 아빠를 하여튼 얼마나 설득을 했는지 애덜 아빠가 넘어가 버렸어요. 그때부터는 한다고 해가지고 칠십 구년도에 서울국악협회에서 하는 대회가 있었어요. 전국경창대회가 있었어요. 근디 그것을 기필고 하라고. 거 나는 죽어도 안 한다고 그랬더니 내 동생을 시켜가지고 내 핸드백에서 주민등록증을 빼 갖고 나도 모르게 자기네들이 신청을 딱 해 노니까 인자 안 나갈 수도 없고 꼼짝없이 나가야 되는데. 옷이 있어야 되는디 옷도 없고. 그러니까는 우리 애덜 아빠보고 오빠오빠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근디 그 사람이 얼른 가서 옷감 한 벌 떠 갖고 왔어요. 언니, 옷을 몸에 맞도록 지어 입고 나가라고. 그래갖고 바느질집에 맡겨서 내일 나갈라믄 오늘 저녁에 찾아다가 그 놈 들고 가서 그 옷 입고 가서 나가서 대상(장관상)을 받았지. 장관상 받고 바로 고 칠십 구년도에 받고 그러고 우리 선생님한테 그때부터 인자 다시 배우기 시작해갖고. 춘향가를 딱 반절밖에 못 배웠거든요. 신연맞이 내려와서 내려오는디까지 밖에 안 배웠는데 반절도 못 배워줬어. 거의. 그랬는디 인제 기생점고서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두 달도 못 배워서 다 배워버렸어. 근디 그냥 어떻게 안 가르켜 주는지 징그럽게 안가르켜주더니 막 그냥 그렇게 생기니까는 자기가 안 되게 생겼고 누구 냄겨 줄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는 막 가르쳐주더라고. 두 달도 못 돼서 싹 끝내버렸어. 다 배워버렸지. 다 배워가지고 한 번에 가면 두 대목 세 대목을 막 배우고 허니까 그렇게 해서 얼른 끝내버렸다고. 우리 선생님이 나 7년 동안 반절도 못 가르쳐주는 그럴 때 그때는 녹음기가 없었어요. 그 후로 내가 선생님한테 배우러 갔을 때 그때는 녹음기가 생겨서 내가 녹음기를 하나 샀다고요. 녹음기를 사 갖고 선생님한테 댕기면서 배우면서 배우는 거 그거를 넣어 갖고 집에 오면서 다 외는 거에요. 싹 다 외고 그래갖고 몇 대목씩을 배우고 어떨 때는 서너 대목씩을 막 배워요. 그다보면 두 달도 못 돼서 남은 거 저그 다 떼버렸죠. 내가 못가는 때도 있고 그러잖아요. 그럴 때는 많이 배우고 오고. 녹음기에다 다 실어가지고 오고 배우는 데 도가 텃어요. 그래가지고 우리 선생님 전수생으로 됐다가 나중에 조교됐다 그랬었죠. 선생님이 문화재니까 조교로 있었죠.
도립국악원으로 오는 바람에 여그서 있게 됐죠
그러고 있다가 인자 내가 우리 선생님 돌아가시고 애덜 아빠 돌아가시고 다 돌아가시니까 내가 84년도 인가 지방으로 내려와서 여그 저그 부안국악원으로 선생님으로 또 가서 조금 있다가 전주로 왔죠. 전주로 도립국악원으로 오라고 황병근 원장님 계실 때 황병근 원장님이 꼭 최승희 필요허니까 꼭 우리 국악원으로 오라고. 서울서두 오라고 그래갖고 서울서도 준비 다 돼갖고 있는디 도립국악원으로 오는 바람에 서울은 못 가고 여그를 먼저 대답을 해 놨기 때문에 여그를 왔어요. 여그서 있게 됐죠.
내가 귀가 너무 커. 내 생긴 것 허고 체격 허고 귀 보면 귀가 너무 커. 귀 땜에 먹고 산다고. 아이고. 그러니까 그래가지고 전주 와가지고 제자들을 많이 키웠는데 내가 학교를 나가고 이렇게 허니까 나이가 먹고 그러니까 힘들고 옥탑도 내려앉지만 힘이 부쳐. 힘이 부쳐가지고 소리허기가 곤란하더라고. 애덜 가르치는게 그냥 굉장히 힘들거든 그게. 에너지 소모가 무지허게 돼요. 학생들도 많이 가르치지 말고 내가 가르칠 만큼만 너무 안 가르치면 적적허니까 쪼금만 가르치면 그런걸 생각을 혀.
지금 현재는 전북대, 우석대, 전남대 그렇게만 나가고 세군데만 댕기고 있어요. 명년까지만 댕기고 다른 선생하라고 얘기해놨어요.
나는 제자복이 없어요
우리 딸이 제일 잘 해요. 모보경이. 무대에 내 세워놓으면 무대를 갖고 놀아. 자는 대통령상까지 받았고. 무대를 갖고 놀아, 그러니까 잘 하죠. 사람이 소리만 잘 해가지고는 안돼요. 소리만 잘 허는 것이 아니라 사람부터 되야 되거든요. 우리 제자들이 지금 저 우석대 4학년 때 너무 잘 허면서 거 지금 학교선생들한테도 그렇게 잘 하고 하는 것이 반듯하게 행동을 해 나가고 그러니까 선생들이 얘기를 해 가지고 부산서 부산시립에서 스카웃해서 갔어요. 정선희라고. 여그 또 정선희하고 나이가 같은가 그런데 여그 남원정보고등학교 선생으로 있어요. 오광오라고 그러고 있고. 정은혜가 서울대학교 들어가서 대학교 마치고 서울대학원 지금 다니고 있어요. 다니고 있으면서 외국으로 얼마나 공연을 댕기는지 말도 못하게 댕겨요. 소리를 잘 해요. 잘 하니까 여그서 저그서 그렇게 다 댕기고. 허이고 근디 나는 제자복이 없어요. 다른 사람덜 제자복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좋은 제자들이 들어오고 그러는디 나는 제자복이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한탄을 해요.
이렇게 악보집을 낸 사람은 없어요
이게 지금 앞에는 서론이고 옛날 사진같은 거도 해 놓고 그러고 인제 악보집이 다 나왔어요. 이렇게 악보집을 낸 사람은 없어요. 근디 이거를 이렇게 글을 써 놓고 그러고 악보를 딱 해 놨어요. 일곱 시간 소리 이게 전부 다에요. 춘향가는 그러니까 여기에 들어가니까 다 알게 되겄지만 정정렬제는 여섯시간, 심청가는 보성제 네시간 넘고, 또 수궁가는 박초월제 수궁가, 흥보가는 박록주제, 적벽가는 박봉술제 아주 유명한 사람들 소리만 싹 내가 배워가 가지고 정립을 다 해놨어요. 내가 다른 것은 장담 안 해도 오바탕 소리를 전부 다 정립을 다 해놨어요. 정립을 할 때 또 어떻게 해놨냐 하믄 앞에는 이렇게 기냥 애기들이 보고 배우기 쉽게 허고, 뒤에는 전부 다 설명을 달아서 낱말 뜻풀이를 전부다 해 놨어요. 돈 많이 들었어요. 학자분들한테 내가 이걸 모르니까 그분들이 해 줬어요. 오바탕을 전부 다 이렇게 정립을 했어요. 일이삼번 전부 다 아라비아 숫자를 달아가지고 뜻풀이를 다 해 논거죠. 그러니까 이거이 아무리 모르는 사람도 누가 물어보면 공부를 해가지고 얘기를 다 할 수 있다고. 오바탕 소리를 전부 다 이렇게 해 놨어요, 내가. 애들이 배우기 좋고 지들이 갑갑하면 소리허다가 이것이 뭣인고 글면 거그다가 뜻풀이를 다 해 놨어요.
사실은 국가에서 이런 것을 사소하게 생각을 해 주나요. 옛날에는 완전히 경시해 가지고 그냥 기생들이나 부르지 다른 사람들은 못 부른다 이렇게 생각을 해 가지고 천허게 생각을 해가지고 지금 같들 안 해요. 아 저 대가집, 왕가에서부터 나왔는데 옛날 쾌쾌하게 묵은 생각들만 해 가지고 우리 아버지서부텀 그랬는데 뭐. 기생이나 소리하지 우리 가문 망칠라구 그러냐고 가문망칠라고 니가 생겨났지 너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갖고 나를 그렇게 두들겨 패고 그랬다고요. 너 기생될 년이니까 나가. 내 족보에서 빼야 되니까 나가. 내쫓았다는 거 아니에요.
정정렬 선생님은 30년을 냄겨다 보고 춘향가를 맨들은 거에요
사실은 정정렬제가 쪼금 까다롭다고 생각을 헐 것 같애요. 이것이 인자 완자걸이가 있고 잉어걸이가 있고 저 고저청탁에서 서울소리 같은 것은 오냐 춘향아 우지 마라 그런것이 경드름이라고 그래요. 경드름이 쉽게 생각이 안 나서 노래를 허니까 경드름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잖아요. 인제 깜박깜박하고 그런다니까요. 글고 봉황조라는 성음이 있고 이 참 성음이 여러 가지로 많아요. 국악인들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정정렬제를 서편제라고 그러는데 서편제면은 무슨 뭐 슬픈 곡만 허는 줄 알고 그러는디 슬픈 곡만 허는 것이 아니라 호령해 가면서 하는 호령조도 있고 슬픈 것도 있고 경드름제도 있고. 경드름제가 서울 말씨, 그런 이도령이 허는 그런 얘기가 경드름제로 들어간다고. 이도령이 서울사람이니까. 전라도방언으로다가 전부 다 얘기허구 그러거든요.
정정렬 선생님이 잘 생겼다는 그런 얘기만 들었어요. 이분이 어트케 목이 구진지 목이 좋지를 안했대요. 그렇게 나빴데요. 그 사람은 절대 소리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낙인이 찍힐 정도로 목이 나뻣었대요. 그런 목을 가지고 공력을 얼마나 싸가지고 그렇게 좋은 소리가 나온거에요. 그러니까 상청을 가도 이렇게 어렵게 올라가 가지고 거그서 만드는 묘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얘기에요. 그것보고 공력이라고 그러죠. 그 공력이 그렇게 좋고 그래서 정정렬제 소리가 좋다고 그래요. 고제, 고제 그러고 얘기허고 그러는데, 아 고제래서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그 분은 춘향가를 만들 때 앞으로 삼십년 이상을 냄겨다 보고 춘향가를 만들은 거에요. 춘향이하고 도련님하고 만나는 것도 서로 편지왕래를 했어요. 방자가 책방에 있을 겨를도 없이 노상 편지 주고받고 갖다 주고. 글구 춘향모 모르게 첫날 밤을 지냈고 그러니까 얼마나 현대적이냐고. 그 시절에는 처녀가 술상 채려 가지고 어디로 갖고 나가고 이별허고 그렇게 못하고 그럴 처지 아니에요. 근디 여기는 술상 채려서 향단이 앞세워갖고 오리정이 남원읍에서 나갈라면 한참이에요. 지금은 막 차 있고 그러니까 금방 가니까 말 헐것도 없지만 그 옛날에는 산길 걸어서 갈라면은 멀었다는 얘기에요. 그런디 향단이 들려서 술상 채려 가지고 가서 오리정에 가서 거그서 울면서 끌어안고 거그서 이별을 했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다른 소리는 그렇게 못허고 집안에서 평상에다가 자리 깔고 자리보고 와상이라고 그러지요. 와상을 깔고 술상을 채려놓고 거그서 이별을 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정정렬 선생님은 오리정까지 가서 퍼버리고 울고 이별을 했다는 거에요. 굉장히 현대적이었지. 그러면 그 술맛은 오직 헐 것이며 이별할 때 기분은 얼마나 기가 맥히겄어요. 기가 맥힌 사랑을 하다가 이별을 허는데 그런 것을 모두 다 그려서 맺는 것은 정정렬 선생님이 아니면 누가 그렇게 맨들어 내겠어요.
옥중가 대목이 최고에요
춘향가에서 최고로 꼽는다면 옥중가 대목을 꼽을 수가 있어요. 여러 군데 있어요. 전옥중가대목, 후옥중가 대목이 또 있고 그러고 방자가 편지 갖고 한양 올라가는 그런 대목도 좋고.또 이쪽에 집안에서 퇴령소리, 퇴령소리라는 것은 잠잘 때 나는 그때부터 잠자는 거 아니에요. 퇴령소리 그런 대목도 좋고. 방치레, 춘향이 방치레가 그렇게 멋있었다는 거에요. 방을 그렇게 잘 꾸며놓고 있었다는 얘기지. 춘향이 어머니가 기생이니까 얼마나 멋쟁이였것어요. 멋쟁이인데다가 채려 놀 것 다 채려놓고 무남독녀 외딸이니까 그냥 기가 맥히게 다 해가지고 그러니까 그런거 참 좋아요. 대목대목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정정렬 선생님 춘향가만큼 좋은 것은 난 못 봤어.
아니리가 너무 많으면 지질병이 나거든
서울서 판소리 보존회에서 유파발표 헐 때는 오정숙을 불러서 춘향가를 허게 되는디 오정숙이 춘향가를 정정렬제 춘향가라고 이러고 그러는디 하나도 정정렬제 아니거든. 다른 걸루 붙여야지 그 야단을 허니까 오정숙이 동초제를 만들었어요. 그래가지고 그걸 만들었고.
여그 동초제 소리, 여그 저그서 붙여놔 가지고 김연수씨가 그렇게 만들어 놔가지고 아니리, 대사허는 것 보고 아니리라고 하는데 나는 돈 주면서 배우라고 해도 안 배워요. 8시간이 넘어요 거그는. 우리꺼는 6시간인데 그것도 너무 길다가 선생님이 아니리 다 빼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김여란 선생님이 아니리 빼라고 해서 빼고 가르치고 그랬어요. 아니리라는 것은 소리의 눈이에요. 그러기 땜에 이쪽 소리를 헐라면 거기 연맥을 대는 것이 아니리에요. 아니리가 쪼금씩 있어야지 너무 많으면은 지질병이 나거든. 오정숙처럼 아니리를 잘 허니까 그러지 다른 사람들은 아니리는 길으면 안 돼. 아니리가 너무 길으면 잘 해야지 잘못하면 진짜 지루하고 연맥을 대줘야지 그렇게 아니리로 할라면 연극을 해야지. 그것도 정정렬 선생님이 연극소리는 연극소리대로 했고, 판소리는 판소리로 했거든요. 근디 그냥 김연수씨가 그렇게 해놓으니까 정정렬 선생님 소리책을 갖다가 전부 다 했거든요.
선생님이 나보다는 니가 더 나스니까 니가 짤라라 왜 그랬냐면 조상선씨라고 있어요. 그 조상선씨가 이북으로 가면서 그랬던가, 누님 내가 책을 사흘만 빌려주면 내가 베끼고 갖다 드리리다. 그래서 우리 선생님 춘향가책을 가지고는 그냥 이북으로 짼거에요. 그래서 소리책이 없어. 우리 선생님이 조상선씨가 그 책을 가져가 버리니까 책을 빌려달라고 해 가지고 우리 선생님이 책을 못 쓰니까 딴 사람을 대필을 시켰어요. 대필을 시켜서 해 놓고 보니까 너무 가없는 말이 있으니까 이 놈도 빼라 저 놈도 빼라 우리 선생님이 뺐는데도 여섯 시간이 돼드라구요. 빼가지고 자그맣게 또 책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내가 싹 다 애들을 가르치고.
비보이춤덜 구경가구 그래요
가끔 가요무대도 보긴 허는데 요즘 동방신기 뭐 그런 애덜. 참 걔덜 노래하는 소리가 그렇게 좋고. 춤이 그렇게 좋고. 뭐 그것보고 뭔 춤이라고 하더라, 거 빙빙돌고 막.. 비보이춤들 그런거 좋아해요. 여기서두 하구 그러면 비보이춤덜 구경가구 그래요. 참 잘해요. 진짜. 그런 걸 막 보러 다니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덜 보단 좀 취향이 독특하다고 그러죠. 근게 지금은 그런 신식말들 외국말 조끔씩 따서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말 허기두 하고. 그려 그거 랩인가 뭐신가. 새로 나오는 현대말 같은 거 그런거 나오면 그렇게 많이 들었어요. 그런것두 내가 굉장히 좋아해요. 내가 막 춤도 많이 추고 그랬어요. 가요를 옛날에두 좋아하구 그랬으니까.
그전에 HOT 있잖아요. 개들이 잘 생겼잖아요. 전진이랑 개들 신화두 잘 생겼잖아요. 노래두 잘 불르고. 이런 애들 나오며는 채널 고정시키고 그렇게 좋아해요. 지금도 굉장히 좋아하고 그러지. 다른 사람들 국악인들 마냥 그러지 않고 나는 국악을 해도 노래는 노래대로 하고 국악은 국악대로 민요는 민요대로. 내가 경기민요를 잘 했어요. 아주 잘 했거든요. 국악하는 사람들이 가요하면 국악조로 부르는데 난 그렇게 안 불렀어요. 지금은 늙어서 배렸어요. 왜 그러냐면 잘 헐라구 해도 늙으니까 구성없어.
국악이 흘러 나려오는 풍기는 멋이 있어요
우리 국악은 변할래야 변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이 다 불렀던 노래고 그러니까 어느 누구든지 부를 수 있는 거예요. 잘 헐라고 생각허지 말고 대강해도 국악이 흘러 나려오는 풍기는 멋이 있어요. 누구든지 다 배웠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그 도립국악원이 있으니까. 하여튼 배워가지고 남 주는 거 있어요? 남 주는 거 없으니까 많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나는 제자들을 많이 배출을 시켜서 우리 판소리에 대해서 판소리가 이렇다, 이런 묘미가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배웠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전부 다 우리 제자들이 와서 배우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우리 제자덜 마냥 배우고, 어디 가서 배워도 나한티만 와서 배워라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국악선생님이 많잖아요. 국악선생님들한테 가서 국악이란 가서 어떻다는 것을 알기도 허구 배우기도 허구 자기네들이 음미도 허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 국악을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제자를 막론하고 아주 뭐, 혼신을 다해서 그런 사람이 되야 되겠어요. 국악은 이렇게 함부로 허는 것하고는 틀려요. 함부로 하지 말고 진지하게 뜻 깊게 소리를 칠 줄 알고 잘 했으면 좋겠어요. 근데 실컷 갈켜주면 어먼 길로 빠지고 그려서. 열 명 가르치면 그 중에서 한두 명 건져요. 그러니까 전부 다 건질 수 있도록 그렇게 공부들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제자들이 자꼬 나오기를 바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