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 |
[독자서평] 이종민의 음악편지 『화양연가』
관리자(2008-06-09 23:04:37)
선율 따라 흐르는 감미로운 무거움
최재덕 <책모임 온 ON> 회원
요즘사회를 혹자는 승자독식사회라고 칭한다. 실제로 각 분야의 1등성들이 큰 별의 광채로 그 분야를 덮어버리기 때문에 그보다 티끌만치라도 작은 별들은 대중의 눈과 귀라는 레이다에 웬만해선 걸리지 않는다. 음악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 우리의 영혼이 가난해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어느 영역에서건 셀로판지보다 얇은 그 한 꺼풀만 벗기면 그 아래 형형색색의 무수한 별들이 도처에서 반짝이고 있다.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양분들이다. “음악의 힘을 빌려 현실을 잠시 괄호 치는 것”으로 세간의 진창에서 벗어나 “나의 본 모습을 되돌아보고… 원초적 사랑의 기운이 다시 힘을 받는 경험”을 즐기는 저자는 이 책에서 음악가들의 반짝이는 삶과 그들의 작품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32편의 편지에 산재해있는 작곡가, 연주자, 악기, 악곡 그리고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종교음악, 국악, 뉴에이지, 퓨전음악, 대중가요 등에 대한 풍요한 정보만으로도 이미 독자 - 그 방면에 다소 문외한인 - 를 뿌듯하게 한다.
그런데 저자는 ‘스페인 출신의 타레가는 현대기타의 아버지로서 <아랍 기상곡>을 작곡했다’라고 썰렁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타레가의 기타곡 소개는 아직은 혈기왕성한 젊은 교수시절 학생동아리를 이끌고 2박 3일 동안 지리산 천황봉을 오른 경험과 혼융되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커다란 기타를 들고 동행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 우여곡절을 거치며 그 험난한 봉우리 끝까지 올라간 남학생이 “장터목 교교한 달빛 아래서… 지리산 귀신들마저 매혹시키며” 라이브로 연주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작곡가의 수도사 같은 삶 속에, 그리고 오늘날의 기타를 만들어 낸 토레스의 진정성 속에 녹아 흐른다. 기타소리도, 지리산의 흙냄새도, 달빛도 곁에 없지만 읽는 이의 귀와 코와 눈은 흠뻑 취한다. 책 읽는 재미다. 같은 얘기도 싱겁게 하는 사람이 있고 간이 딱 맞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듯 구성지게 신변잡기를 풀어놓고 거기에 곡하나 붙이는 형식으로만 본다면 이 편지들은 10대 소녀가 수학정석은 펴놓았으되 기실은 부모님 몰래 듣곤 하던 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 류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가벼울 수 있는 글에, 그러나, 묵직한 추들이 주렁거리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각 편지마다 어김없이 끼어들어 있는 철학적 또는 도덕적 단상들은, 음악에 실려 구름너머 어디론가 날아가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수도 있는 독자의 마음을 그때마다 땅위로 끌어와 현실에 고정시켜준다. 풀 먹인 연실의 힘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12인조 남성합창단 레지엠의 곡 <전쟁의 신>은 “왕들의 거래”인 전쟁에 대해 니체가 한 묘사 “저 야영의 거친 에너지, 그 깊이 맺힌 비개인적 증오, 그 공명정대한 살인의 냉혈, 지진에 비길만한 그 무거운 혼의 진동…”을 빌어 소개된다. 이어 저자는 전쟁으로 인해 위대한 예술작품이 탄생되고 “자신이 안전지대에 놓일 수만 있다면 전쟁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극장 앞에 사람들이 들끓는 현상”에 착잡해한다. 그리고 “그 엄청난 정열, 그 에너지의 물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맹목적 파괴의 욕망을 창조의 원동력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하고 안타까워한다.
위의 예는 빙산의 일각이거니와, 자신의 안테나에 포착된 동서고금의 진리를 잡아 예술가들의 삶이나 그들의 작품에 둘러씌우는 솜씨가 자못 깜찍하다. 편지마다 초반 서너 줄에서 독자는 ‘이번 편지에서는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이렇게 변죽을 울리나?’하는 호기심을 갖게 되고, 궁금증에 떼밀려 읽어나가노라면 저자의 연상행위 자체가 재미있어 그 매끄러운 이음매들을 함께 넘나든다. 그러는 동안 이미지들은 중첩되고, 현미경과 망원경이 교차로 작동되면서 독자의 눈은 맑아진다. 어느 책인들 그렇지 않을까마는, 이 책을 읽기 전의 독자와 읽고 난 후의 독자는 더 이상 동일인이 아닐 것이다. 저자의 홈페이지에서 살짝 들여다 본 바로는, 저자는 상당수의 문화예술인들과 깊이 교류해왔고 수년 간 <주역>을 배웠다고 한다. 책의 여기저기서 독자의 발목을 잡고 잠시 멈추게 하는 부분들은 묵직한 동양철학서인 <주역>의 주변을 다년간 서성거린 그 내공 덕택이 아닐까.
아니면 오히려 그래서인가. 또는 누군가가 말했듯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어서인가. 저자가 펼쳐 내놓은 것들은 새로우면서 새롭지 않다. 아니 새롭지 않으면서 새롭다. 음식에 빗대보자면, 김치가닥에 감긴 보쌈고기, 숯불 위의 갈빗살, 레스토랑의 포크커틀릿, 소동파의 동파육, 의외의 맛인 파인애플 포크소태 들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전혀 다른 맛이다. 우리가 즐기는 것은 제가끔 새로운 별개의 맛이다. 같은 요리라도 새 식당에서 먹고 싶어 하고, 같은 주제의 글도 새 질서 속에서 읽고 싶은 우리들이다. 이런 연유일 것이다. 어디선가 옷깃처럼 스친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풍부한 유머감과 더불어 단연 신선한 풍미를 지닌 책 <화양연가>가 잘 읽히는 이유는.
<화양연가>는 전북대학교 영문학과에 재직하면서 이 지역의 문화적 변화에 견인차 역할을 해온 이 종민 교수가 그동안 지인들에게 보낸 음악편지들을 모은 편지묶음이다. 총 32편의 편지들은 계절별로 4 묶음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묶음에다 구태의 명칭이 아닌 “바람, 꽃, 갈잎, 새벽”이라는 주제를 붙여 계절처럼 흐르게 했고, 이로 인해 책 전체가 시간적, 공간적입체감을 띤다. 편지 한편 한편은, 먼 곳에서는 보이지 않고 그래서 명산이 아닌 작은 동산들처럼, 직접 가보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보물들을 품고 있다. 젊은 층에게는 다소 촌스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는 책제목 『화양연가』의 화양은 글쓴이의 고향마을을 가리킨다. 연가는? 연가는 사랑노래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글쓴이가 풀어내는 모든 이야기의 바닥에는 그 무엇에도 끄떡하지 않을 바위 같은 사랑 - 음악, 고향, 나라, 북한 어린이, 제자, 문학, 가족… 한마디로 세상에 대한 사랑 - 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연가>는 그 사랑에 값하는 제목이라고 보겠다.
최재덕/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19세 때 상경, 서울에서 공부, 결혼, 사회생활을 했다. 10여년 전에 남편 따라 전주에 와서 살고 있다.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일했다. 송천 도서관 독서모임 <책모임 온 ON>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