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 |
[전북대학교 제2기 박물관 대학 지상강좌]
관리자(2008-06-09 23:04:22)
우리 입성[衣服]. 그 역사와 현실 Ⅰ
고부자 단국대 대학원 전통복식학과 교수
지난 5월 7일 제2기 박물관대학에서 진행 된 고부자 단국대 교수의 ‘우리 입성의 역사와 현실’을 두 번에 걸쳐 나눠 연재합니다.
우리나라 옷의 ‘기본 틀’은 위[上衣]는 저고리를 입고, 아래[下衣]는 바지[袴]를 입는 유고제이다. 여기에 남녀 모두 겉에 덧입는 포(袍)와 여성용으로 치마[裳]이 있다. 이 밖에 모자와 신[靴·鞋·履] 및 허리띠[帶]를 갖춘다.
옷 모양은 평면에 ‘곧은 선[直線]’과 ‘굽은 선[曲線]’으로 결합되며, 위와 아래옷으로 나뉘는 상하분리형이다. 입는 법은 머리에 쓰고, 몸에 입고, 발에 신는 삼분구도(三分構圖)를 이루고 있다. 위와 아래가 분리[衣袴分離]된 옷은 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계’에서도 발견된다. 이런 옷이나 차림은 북방유목민들이 추위를 막고 아한대성 기후에 적응하며 활동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삼국시대까지 상대(上代)의 우리나라 옷 중에서 웃옷[上衣]은 앞이 트이고[前開形] 대부분 왼쪽으로 여미며 아래옷인 바지는 통이 좁았다. 이런 옷을 중국[漢族]에서는 천하게 여겨 ‘오랑캐[胡族]가 입는 옷’이라는 뜻으로 “호복(胡服)”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이러한 옷을 입다가 한족들이 입는 크고 여밈이 오른쪽으로 된 옷, 한족[漢族]옷을 받아들여 현재까지 이어진다. 전개형은 상의의 앞이 열려 있는 옷으로 양쪽 팔을 꿰고 앞에서 여미는데 여미는 위치가 앞 중심에서 마주치는 것, 왼쪽으로 여미는 것, 오른쪽으로 여미는 것이 있다. 전개형 여밈 옷은 입기에 편하고 실용적이어서 한대(寒帶)나 온대 및 아열대까지 가장 널리 이용되어 왔다.
우리 옷의 만듬새[製圖法]는 평면이므로 옷을 만들어 입다가 해어져서 못 입을 때까지 재생시켜 쓸 수 있어 경제적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홑옷·겹옷·솜(핫)옷을 입으며 바느질·색·재료 등 여러 가지 의생활문화를 이루어 왔다. 또 이웃 나라와의 관계와 국내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 세계에서도 드물게 오랜 전통을 지키면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의복의 변천단계는 상고(上古),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개항(開港)기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우리 옷의 변화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점으로 고유기(固有期)와 복속기(服屬期)로 구분된다. 고유기는 통일 이전 유고를 입었던 시기이다. 복속기는 크게 두 차례 겪게 되는데 첫 번째는 삼국통일을 전후하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후부터 조선말까지 1300여년 동 안 이어진 중국화이며, 두 번째는 개항 이후 서양복을 받아들인 서양화이다. 복속기의 의생활은 계급사회였으므로 상하질서를 지키기 위한 규제에 따랐다. 따라서 복속기에는 관리[官服]나 상류층의 옷이 공식적인 일이나 의례를 행할 때에 이용되었지만, 관리들의 안에 입는 옷이나 일반민의 일상복은 우리 고유의 것을 입어 왔다. 즉 겉옷은 중국식이면서 속옷이나 평소에는 고유의 옷을 입음으로서 우리 것[國俗]과 다른 나라 것[漢俗]을 공용하는 이중구조(二重構造)를 겸하면서 변하여 왔다.
상고(上古)시대 : 고유(固有)전통기
상고시대는 중국 본토와 만주족 및 서역(西域)계의 유목민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이 때의 의생활은 무덤 속에 그려 있는 그림[古墳壁畵]이나 약간의 중국 측 사료(史料)에 의해 참조되고 있다. 고분벽화는 문헌이나 실물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의 백제나 신라의 의생활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하다.
자료들을 보면 의복은 생업과 추위에 알맞은 것으로 통이 좁은 바지[窮袴]와 소매가 좁은[窄袖] 웃옷을 입고 허리에는 띠[帶]를 매었다. 통이 좁은 바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물이 없으나 스키타이에 속하는 흉노 노인-우라에서 출토된 바지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발에는 목이 긴 신[靴]을 신었다. 머리는 남자어른들은 머리카락[頭髮)]을 올려 상투를 틀었고 부인들은 두발(頭髮)을 올려서 서리고[盤] 남은 것은 늘어뜨렸으며 처녀는 뒤에 드리웠다. 장식물은 구슬[瓔珠]을 귀하게 여기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즐겨 사용하였다. 백의(白衣)를 숭상하여 흰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짐승가죽으로 포(袍)를 만들어 입고 모자는 금은으로 장식했다. 상(喪)을 당하면 순백색 옷을 입고 부인은 가락지도 끼지 않았다. 외국으로 갈 때는 그림을 그리고 수(繡)를 놓은 비단옷을 입었다.
삼국(三國)시대
고구려와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병행했던 시기로 저고리와 바지를 기본으로 입던 고유전통기이다. 삼국의 기록 중에 중국의 사료(史料)에는 고구려가 가장 많고 백제나 신라는 고구려와 같거나 비슷하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두 나라의 의생활은 기록에 나온 고구려에 대한 자료와 이 지역의 고분벽화를 참조하여 연구하고 있다.
고구려
기록에는 혼인하면 수의(壽衣)를 장만하였으며, 상(喪)을 당하면 부모나 남편의 상복(喪服)은 삼년[三年服], 형제는 석 달 입었다. 매장(埋葬)이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사용하였던 물건이나 옷은 장례에 온 사람들이 가져갔다. 머리에 쓰는 귀인의 관(冠)은 자색(紫色)의 나(羅)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대가주부(大加主簿)는 뒤가 없는 책을 쓰고, 소가(小加)는 절풍변(折風弁)을 썼다. 옷은 수(繡)나 금(錦)으로 장식하였다. 웃옷은 소매가 넓은 큰 삼(衫)에, 아래는 통이 넓은 바지[大口袴]를 입었다. 허리에는 가죽띠[皮帶]를 매고 황색의 가죽신[黃革履]을 신었다. 부인은 치마[裙]와 저고리를 입었는데 가장자리에는 선을 둘렀다고 하였다.
금까지 알려진 벽화가 있는 무덤은 80여기(基)인데 대부분 만주의 압록강 주변 집안(集安)과 한반도 안에서는 황해도의 안악이나 용강 및 평양의 대동강유역에 있다. 의생활이 참조되는 것은 인물이 묘사된 인물풍속도(人物風俗圖)이다. 여기에 보면 남자들은 머리에 모자나 수건 같은 것을 쓰고 있는데 아랫람들은 머리카락을 내리거나 상투를 틀고 있다. 관(冠)은 남자들은 관인이나 서민은 절풍에 새의 깃[鳥羽]을 꽂고, 부인은 건귁을 쓰고 있다. 여자들은 기혼자들은 머리에 얹고 아이나 처녀들은 내렸다. 옷은 저고리와 바지 외에 길이가 긴 옷[袍]을 입고 여자들은 여기에 치마를 덧입기도 하였다. 상류층의 옷은 길이나 품이 크고 풍성한데 사냥꾼이나 아래 계층사람들은 작고 좁다. 저고리는 남녀 모두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다. 소매의 끝[袖口]이나 깃과 도련에는 장식과 실용을 겸한 선이 있는데 이 선은 계층에 따라 너비가 다르며 하나나 두 개인 것도 있고 안에 여러 가지 다른 색과 무늬를 넣은 것도 있다. 허리에는 저고리나 포를 입은 위에 띠[帶]를 맸다. 대는 서민들의 것은 옷감[布]이었지만 관인이나 귀인 것은 금속과 가죽을 겸한 것들과 비단[紫羅]으로 만든 것 등이 있었다. 웃옷의 여밈은 초기에는 좌임이 많은데 우임도 같이 나오고 있다. 여자들이 입은 치마는 주름을 잡은 것처럼 보이는데 주름의 너비가 좁은 것과 넓은 것이 있다. 상류층 여인들의 치마는 주름너비가 좁으며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데[裙], 아래 계층 사람들은 주름이 넓고 길이가 짧아서[裳] 안에 바지를 입은 것이 나타나고 있다. 신은 목이 긴 화(靴)와 짧은 이(履)등 매우 다양했다.
백제
기록에 보면 왕은 소매가 넓은 자주색 포[紫袖大袍]를 입고, 흰색가죽으로 만든 띠[白韋帶]를 띠고, 푸른 비단바지[靑錦袴]를 입고, 검은 가죽신[烏革履]을 신었다. 머리에는 금화(金華)를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썼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관은 무령왕(武寧王)의 무덤에서 출토된 관전입식(冠前笠飾)과 비슷한 것으로 보며 백제 관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부인의 머리는 처녀 때는 뒤로 늘이는 변발을 하고 출가 후는 두 가닥으로 땋고 머리에 서리었다고 하였다.
출토물로는 1971년 충청남도 공주(公州)에 있는 제25대 무령왕(武寧王. 在位501~522년)의 무덤[陵] 안에서 나온 금관·금귀고리·금목걸이·은팔지 등이 있다. 또한 부여 능산리에서 6세기 때의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가 발굴되었는데 뚜껑에 사람들이 조각되어 있어 참조되고 있다. 이러한 공예품들을 보면 의생활도 이에 못지않게 섬세하고 화려하였을 것이다.
그림자료는 521년 백제의 사신이 양(梁 : 502∼557년)나라에 갔을 때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가 있다. 사신으로 간 남자의 모습은 머리부분은 손상이 되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턱 아래에 끈을 맨 모자를 쓰고, 바지와 포를 입고, 목이 긴 화(靴)를 신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이왕(古爾王) 27년(260)에 공복(公服)제도가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 공복제도는 관의 장식과 옷 및 허리띠의 색에 대한 것이며 계급을 1품에서 평민까지 17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내용은 단순하지만 최초로 복식제도를 정했다는 데 의의가 크다. 관은 1∼6품까지는 은화(銀花)이다. 허리띠는 계급별로 자주, 검정, 빨강, 파랑, 황색으로 나누었다. 옷 색은 1∼16품까지 모두 붉은[緋]색으로 하였는데 평민은 비색을 금했다
신라
삼국 중에서 의생활 자료가 가장 귀하다. 다만 중국측에 나타난 기록을 근거로 하면서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경주의 단석산 신선사에 있는 암각화(岩刻畵)의 공양인물이나,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토우(土偶)와 토용(土俑)에 의해 면모가 파악되고 있다. 특히 출토된 관이나 허리띠와 신 등 많은 금속 장식물에 의해서 신라의 문화를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도 고구려나 백제의 복식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冠)을 유자례(遺子禮), 저고리를 위해(尉解), 고(袴)를 가반(柯半), 화(靴)를 세(洗)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의 복식용어를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자례는 고깔, 위해는 우티, 가반은 고이, 세는 신으로 추정되는데 이 용어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의복색은 소(素), 즉 백색을 숭상하였다. 머리는 여자는 머리에 동이고 남자는 흑건(黑巾)을 썼다.
이 밖에 토우는 매우 드물지만 통일 이전 서민들의 의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토우에서 남자는 건(巾)류를 쓰고, 폭이 좁은 바지와 좁은 소매의 웃옷을 입었다. 여자는 머리를 단순하게 빗고 넓은 치마를 입고 있다. 더 자세한 근거를 보여 주는 것은 토우보다 섬세하게 만든 토용이다. 토용은 삼국통일을 전후하는 7세기 초기에는 고유 국속(國俗)을 간직하면서 한족(漢族)의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그러나 8세기가 되면 남자는 복두모양의 모자를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며, 옆이 트인 포를 입고 허리에 혁대를 띠고 요패(腰佩)를 차는 등 중국의 당(唐)나라 식으로 변하는데 여인용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서역(西域) 사람 같은 인물이 섞여 있어서 그 영향도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공복(公服)은 23대 법흥왕(法興王) 7년(520)에 제정하였다. 육부(六部)사람들의 복색을 정하였으며, 왕 10년에는 관리들의 공복색을 중국제도를 모방하여 자(紫)·단(丹)·비(緋)·황(黃)으로 나누었다. 진덕여왕 2년(648)에는 김춘추(金春秋)가 당에서 장복(章服)을 가져오고 다음해 649년 관복제를 중국식으로 바꾸며 문무왕(文武王) 4년(664)에 는 여자도 중국제를 따르도록 한다. 이렇게 중국제로 바꾸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입어온 것은 오랑캐 속[夷俗]이었으며 비로소 한(漢)나라 속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중국속과 우리나라 고유속을 병용하는 이중구조가 시작되며 이는 조선왕조가 끝나는 13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중국의 복식을 쫓는 복속화(服屬化)를 자초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 중국 복속기(服屬期)
남자의 공복이 649년 당나라의 제도를 채택하였으므로 이후 관복과 의생활의 일부는 중국제도를 따른다. 이로부터 관복제는 이중구조체제를 이루게 되었으며 상류층에서는 이제까지 입어온 옷은 ‘오랑캐 옷이며 아랫사람들의 옷’이라는 개념으로 정착하게 된다. 특히 이 때 소매가 넓고 큰 여자의 활옷[華衣]과 원삼(圓衫)이 유입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나라가 강해지고 문물이 풍족해지면서 사치가 심하고 상하질서가 문란하기 시작하자 흥덕왕(興德王) 9년(834)에는 복식금지령을 내린다. 금지항목은 남자와 여자의 계급을 각기 10등급으로 나누고 모자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재료와 색 등 20가지 품목으로 분류하였다. 특히 금제의 종목에는 복두와 반비(半臂), 배당, 표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중국의 복식제이다.
이로부터 여자도 바지와 저고리를 위주로 한 기본복식 위에 치마는 내상(內裳)과 표상(表裳)이 나오며 저고리도 짧은 것과 긴 것이 겸용되기 시작한다. 긴 저고리는 1500년대까지 이어지며 차츰 내의의 외복화(外服化)로 짧은 저고리가 표면으로 나와 현대 여복의 기본모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머리는 처녀들은 피발(被髮)을 하고 부인들은 얹은머리를 하였다. 특히 머리카락[美髮]은 중국에서도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가체를 만드는 재료로 국제교역품이 되기도 하였다. 머리에는 옥이나 금·은·동·철로 장식을 한 관 외에 옥이나 대모(玳瑁) 뿔[角]로 만든 빗[梳]이나 머리꽂이[釵]를 꽂아 장식하였다. 또 귀걸이, 목걸이, 팔찌, 지환 등도 장식품으로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