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 |
[제 114회 백제기행] 바다의 땅 통영
관리자(2008-06-09 23:03:55)
봄, 바다는 빛난다
봄바다의 유혹
바다다. 봄바다, 그것도 통영이라니!
남해를 떠올리자 벌써 마음 한쪽이 푸르게 물들어오는 것 같았다. 허리 위쪽을 가득 채운 푸른 바다가 내 몸의 리듬을 따라 출렁거리는 순간 나는 일정도 확인해보지 않고 마당에 예약전화를 넣었다.
<남해 금산>이라는 시집이 생각난다. 남해라는 이름만으로도 책 구석구석에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아 무턱대고 집어 들었던 그때도 지금처럼 내 몸속에서 바다가 일렁였다. 그때는 푸릇푸릇하던 젊은 날의 시간을 핑계 삼았지만 마흔도 중반을 훌쩍 넘긴 지금에 와서도 ‘바, 다’ 라는 말은 내 안, 저 깊은 심연에서 오래 웅크리고 앉았던 그 무엇을 깨우게 만든다.
그렇게 4년 만에 따라나선 백제기행이다. 아내와 단출하게 떠나는 행장인데도 늦고 말았다. 출발 예정시간을 10여 분 넘기고 허겁지겁 버스에 오르고 보니 스무 명이 채 안되는 일행이 눈에 들어온다. 낯이 익은 얼굴들이 반갑다. 백제기행의 터줏대감들과 오랜만의 인사를 나누는 사이 버스는 출발한다.
완주에서 장수를 거쳐 새로 뚫린 도로를 차는 씽씽 달린다. 산과 산을 가로질러 높은 교각을 세우고 거기에 길을 놓았다. 얹었다, 라는 말이 더 들어맞을 것 같다. 그렇게 ‘무지하게’ 뻗어 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88고속도로에 접어든다. 88은 영호남의 화합 어쩌고 하면서 1984년 7월에 개통된 올림픽 기념도로다. 전국고속도로 가운데 유일하게 차로가 2차선이다. 중앙분리대마저 없고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탓에 급경사와 굴곡이 심하다. 당연하게 교통사고가 끊이질 않고 치사율도 3배에 달해 악명 높은 이 도로는 명색이 고속도로이건만 시속 80킬로미터를 넘기가 힘들다. 앞차 꽁무니를 따라 추종하듯 그 길을 달리다 보면 역설적으로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엄연함을 확인하게 해준다. 도로가 좁다 보니 역설적으로 주변 풍광은 여느 고속도로에 비해 편안한 조망을 선사해준다.
차는 함양 분기점에서 88을 빠져나와 대전-통영간 중부고속도로를 달린다. 2시간을 조금 넘겼는데 벌써 통영 표지판이다.
산비탈에서 해안을 내려다보다
‘어, 벌써’ 하는 사이에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언덕배기를 몇 번 휘감아 내려가는 동안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통영의 지형은 평지가 거의 없이 비탈에서 해안을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농사 지을만한 땅은 아니라는 게 금방 느껴진다. 통영의 해안은 드나듦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우리나라에서 신안군 다음으로 섬이 많다고 한다. 수온이 적당하고 동해난류가 흐르는 해역 덕분에 통영은 예로부터 한국 어업의 본산으로 자리 잡아왔다. 지리적 요충지로 조선 선조 때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면서 ‘통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55년부터 40년간 충무로 불리다가 1995년에 통영으로 복귀했다. 충무보다는 ㅇ이 겹치는 통영의 통통 튀는 말맛이 나는 좋다.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통영식 한정식으로 유명한 <풍년식당>. 여러 가지 나물무침에 농어와 학꽁치가 올라왔다. 신선한 해산물이 그득한 밥상이 한사람에 7,000원. 통영 맛기행 첫 순서를 상큼하게 출발한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중앙시장 좁은 골목을 지나 <동피랑> 마을에 올랐다. 올랐다는 것에 유의하시라. 동쪽 비랑(비탈의 지역 사투리)이란 뜻을 가진 이곳은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지금도 궁색함이 엿보이는 이 빈촌은 2007년 10월 푸른통영21에서 주도한 벽화그리기 대회를 통해 예쁜 벽화가 가득한 마을로 변모했다. 골목길 여기저기 자투리 공간을 채운 원색 물감이 푸른 하늘과 바다와 만나 빚어내는 현란함에 잠시 눈이 부시다. 동피랑은 통제영 시대부터 자연적으로 형성된 주택가라고 한다. 꼬불꼬불 이어진 가파른 골목길에서 몸이 반쯤 아래 항구로 기울여진 채 통영항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바로 거기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사내들이 돌아오는 배를 기다렸을 아낙들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바로 건너편 남망산 공원에 위치한 통영시민문화회관은 근사한 외관을 지녔다. 밤이 되면 통영의 불빛들은 더 화사해진다.
맑은 하늘과 바다가 빚어낸 통영의 문화예술
이런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바다는 박경리, 윤이상, 이중섭, 유치환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인과 음악가, 화가를 쏟아냈다. 통영인의 창작적 기질을 조선조 통제영의 부속기관으로 있던 부채, 칠, 그림, 장롱 등 13개의 공방에서 찾기도 한다. 한국 최대의 어업기지인 통영의 풍부한 물산과 재력은 삶의 여유를 구가하는 문화예술의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통영 시내는 예술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다. 통영시는 중앙동 도로 양쪽에 통영 출신 전혁림, 김형근 화백의 작품이 새겨진 아트타일을 보도블록 대신 깔았다. 버스 승강장에는 전혁림, 김형근 화백과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전신 사진을 프린팅했고, 자투리 공간에는 소설가 박경리와 시인 김상옥의 작품비를 세웠다. 통영대교 맞은편 가파른 벽면에 전혁림 화백의 작품 ‘풍어제’를 272만개 타일을 이용해 모자이크 형식으로 만든 가로 30m, 세로 9m 크기의 벽화로 재현했다. 계획군사도시, 해양도시 통영에 더해 문화예술도시라는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밀고 가는 정책이다.
통영시청에서 거제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통영옻칠미술관(김성수 관장)에서는 옻칠 회화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했다. 400년 째 이어오고 있는 통영의 전통나전칠기를 토대로 현대화를 시도한 옻칠회화와 각종 장신구 등을 보고 어떤 글쓴이는 ‘화려해도 사치스럽지 않고, 투박한 듯 세련되며 밝고 흥겹다.’고 품평했다. 아름다운 광채와 단단함이 돋보이는 작품들 하나하나가 탐이 나는 물건들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젊었을 때 누구나 한 번쯤 낭송해본 기억이 있을 <행복>을 쓴 시인 유치환(1908~1967)의 문학세계를 소개한 청마문학관은 망일봉에 있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라는 시가 입구에서 방문객을 맞아들인다.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이고 특유의 리듬감과 연시 풍의 쉬운 시로 많은 이들이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건만 나 개인적으로는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시대를 관통하는 문학정신과 단단한 시 세계에 후한 점수를 주고 나서는 나의 ‘고루한’ 문학관 때문이다. 해설사는 유치환 시인은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중앙동 우체국에서 연모하던 사람 이영도에게 연서를 썼고, 그 우체국 앞길이 현재 ‘청마거리’로 명명돼 있다고 전한다. 아직 봉건적 풍조가 시대 조류의 대세였고 학교 교사에 엄연히 부인네가 있던 사람이 다른 이를 공공연하게 연모하는 ‘불경’도 문학의 세계에서는 아름다운 채색으로 신비화되는 법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문학인을 꿈꾸는가 보다.
청마문학관을 나선 일행은 미륵도와 통영을 잇는 해저터널을 찾았다. 용문달양(龍門達陽)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섬에서 육지(陽)에 닿는(達) 입구의 문(龍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동양 ‘최초의 바다 터널은 1932년 말에 개통 후 30여년 동안 차들이 다니기도 했으나 1967년 충무교 개통 이후 사람들만 걸어다니는 곳이 되었다. 오늘도 사람들은 구경삼아 하릴없이 500미터 터널을 왔다 갔다 한다.
통영 읍내에서 차로 통영대교, 또는 충무교를 넘거나 혹은 걸어서 해저터널을 건너면 닿는 곳이 통영에서 가장 큰 섬인 미륵도다. 미륵도로 건너온 버스는 통영 산양읍 해안 일주 도로를 따라가다 ‘달아’(達牙) 공원에서 멈췄다. 그 터가 코끼리 어금니와 닮아 유래한 이름으로, 달 구경하기 좋은 곳이란 의미도 있다. 입심 좋은 윤미숙 선생(푸른통영21 사무국장, 이번 여행의 안내자를 맡아주었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하면 100% 이루어진다는 속설에 청춘남녀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고 한다. 믿거나말거나!
달아공원 정상에 올라 남해 바다 청정한 한려수도를 척 내어다보니, 온몸에 감기는 바람이며 눈앞에 펼쳐지는 크고 작은 섬들의 군락이 세파에 찌든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여기에 낙조와 달밤의 은파(銀波)가 더해지면 없던 사랑도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우리는 한려수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등진 채 옹기종기 모여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달아공원을 낀 통영 한산도 언저리에서 사천, 남해를 거쳐 전라도 여수까지 이어지는 뱃길을 일러 한려수도라 한다. 그 한가운데 위치해 한려수도의 정점을 이루는 통영은 일찍부터 ‘한국의 나폴리’라 불려왔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자하니 2002년 그리스 이탈리아 여행 때 나폴리를 봐두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퍼뜩 스쳐간다. 나폴리가 그 명성대로 미항이긴 하지만 우리가 남의 나라 홍보대사를 자청할 필요는 또 무엇인가. 나폴리를 ‘이탈리아의 통영’ 쯤 되는 곳, 이렇게 부르면 좋을텐데. 이 모든 주객전도가 가치평가의 기준을 바깥것에서 찾으려는 문화적 열등감, 먼저 외국을 나가본 자들의 꼬인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사소한 것에 잠시 목숨을 걸어 보았다. 통영의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를 한껏 시샘하면서 우리 일행은 굽이굽이 해안절경을 자랑하는 22킬로미터 산양일주도로의 반절을 마저 달리고 ‘밥먹으러’ 간다. 이 일주도로는 해질녘 달려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해가 다도해의 섬들 뒤편으로 사라지고 난 뒤 온 천지를 붉게 만드는 그때의 시간들은 가히 ‘몽환적’인 풍광이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저 밥을 먹으러 가고 있다. 밥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유 있게 일정을 잡고 오는 일행이라면 꼭 미륵산을 둘러보길 권한다. 미륵산은 높이 461m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명소라고 한다. 셔터를 누르는 곳마다 다도해 풍경이 한 폭의 그림에 담긴다. 산자락을 돌아들자 일주일 전에 개통했다는 미륵산 한려수도 케이블카가 보인다. 2002년 12월 착공해 이제야 운행을 시작한 이 케이블카는 개장 첫날부터 멈춰서 유명해졌다. 우리 일행은 ‘저거 고장 잘 난대’ 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케이블카를 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우리 일행의 주술이 작동했을까. 그 뒤로 또 한 차례 큰 고장을 일으킨 케이블카는 한동안 운행 중지 상태가 됐다.
경상도 음식도 ‘쥑이는’ 맛이 있네잉
통영 하면 떠오는 것이 바다와 함께 풍부한 먹을거리다. 경상도에서 맛자랑하는 곳을 별로 보지 못했는데 수산물이 넘치는 통영은 별미도 부지기수다. 놓쳐서는 안 되는 통영 제일의 맛이 ‘도다리쑥국’이라고 몇 번을 들었건만 끝내 그것을 먹지 못했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도다리를 맑은 탕으로 끓여 그 위에 어린 쑥으로 향을 내는 요리인 이 쑥국은 입에서 사르르 녹는 도다리 살과 코끝을 간질이는 향긋한 쑥내음이 일품이라고 한다. 말로만 들어도 입안이 화해지는데 목구멍에 털어 넣었으면 도대체 어떤 품평을 했을까.
미륵도를 나온 우리는 봉평동의 <봉수골> 식당에 모여 앉았다. 몇백 년 묵은 느티나무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먹은 아구찜과 미더덕찜은 ‘쥑이는’ 맛이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신선한 재료를 쓴다는 아구찜도 좋았지만 미더덕이 툭 하고 터지며 입안에 번져가는 그 상큼함은 동동주 잔을 연거푸 비우게 만들었다. 여기에 윤미숙 선생의 구수한 경상도사투리가 더해져 저녁식사 자리는 더할 것 없이 유쾌했다.
먹을 것을 나누는 자리에서 사람의 흥이 더해지면 자리는 이제 본격적인 술판이 되기 십상이다. 통영에만 있는 독특한 술문화에 ‘다찌’라는 것이 있다. 다찌집은 3만원을 기본으로 소주에 한 병에 만원인데 안주는 공짜다. 전어, 멸치회 등 각종 생선회에 바다달팽이, 가재, 조개가 주렁주렁 이어져 나온다는 그 유명한 ‘다찌’를 가볼 시간을 놓친 우리 일행은 아쉬운대로 중앙시장 막회집 골목으로 진출했다. 광어, 농어 등속을 한 광주리 가득해서 3만원 정도에 파는 이곳에서 바닷물에 대충 씻어서 듬성듬성 썰어주는 회를 거친 된장에 쓱 발라 입에 넣는 맛이 또한 일품이다. 그래도 술배가 덜 찬 우리 일행은 숙소 옆 맥주집에서 또 한참을 흥을 돋군 뒤에야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끝내 가지 못한 다찌집은 또 한 번의 통행 행을 약속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다음날 아침 쓰린 속을 달래준 서호시장(아침시장)의 ‘시락국’도 색다른 맛이었다. 붕장어머리를 푹 고아 만든 육수에 무청과 된장을 넣어 끓인 시락국에 재피가루와 김가루, 부추 무침을 입맛대로 넣어 먹는데, 솔직히 전주콩나물국밥의 그 시원한 맛에는 못 미쳤다. 낯선 고장의 이색적인 먹을거리 정도로 기억할만 한 맛이다. 옛 충무를 왔는데 원조 ‘충무 김밥’을 안 먹을 수는 없는 법. 충무김밥은 여객선이 충무에 들었을 때 전마선을 탄 김밥장수들이 잽싸게 판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공원 한쪽에 둘러 앉아 김에 말은 맨밥과 오징어와 무를 따로 먹는 맛도 별미 중의 하나였음을 기록해둔다.
경상도 이순신
통영의 둘째날, 한산도에 가는 유람선에 올랐다. 제승당을 보러 가는 길이다. 통영 선착장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있는 한산도는 이충무공의 지휘본부였던 곳이다. 뱃길 중간에 거북선 모양의 등대가 눈에 띈다. 직무에 너무 충실해, 가는 내내 거의 고함 수준의 안내방송을 그치지 않는 유람선 선장만 아니라면 뱃길은 고요하고 아늑한 편이었다. 배에서 내리자 윤미숙 국장의 한산도 곳곳의 수목과 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 많던 이름의 유래와 얽힌 이야기는 지금 다 잊어버렸지만 진지한 자세로 풀잎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일러주던 윤미숙 선생의 목소리는 연륜을 자랑하던 소나무들과 함께 생생하게 떠오른다.
제승당(制勝堂)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후 여수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한산도로 옮기면서 사령부격인 지휘소로 건축한 것이다. 이순신은 작은 만과 포구들, 크고 작은 섬들이 곳곳에 있는 한산만의 지형을 이용하여 적을 제압했다. 충무공이 작전을 짜던 수루를 복원한 곳에 오르니 ‘한산섬 밝은 달에 수루에 홀로 앉아’ 시가 절로 나온다. 그때 이순신은 정말 외로웠던가.
실재의 이순신과 역사상 인물로 해석된 이순신 장군은 여러 대목에서 모순되게 충돌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가 중앙권력의 한 대립자이자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 한 이순신의 내면에 주목한다면 재야사학자 중의 일부는 이순신이 뛰어난 전공을 세우긴 했지만 그렇게 무결의 충신이자 민중의 벗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발견된 난중일기의 유실 부분에서는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가 솔직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에게서 ‘충(忠)’만을 의도적으로 분리시켜 이데올로기화 했다. 초등학교 시절 단체관람영화의 단골 메뉴였던 <성웅 이순신>에서 김진규가 분한 이순신 장군은 초인적 의지로 오로지 백성과 국가를 위해 한몸을 초개같이 던지는 ‘슈퍼히어로’였다.
지난 70년대, 수학여행길에서 전남 여수 유적지에서 만난 이순신 장군과 지금 이 자리에서 보게 되는 경상도 이순신은 같은 얼굴인가. 광화문 세종로를 필두로 전국의 수많은 초등학교 교정을 지키고 서 있는 이순신은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한 쪽으로만 해석되어 온 것이 아닐까.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충무공의 제사를 올리는 충렬사에 서 명나라 황제가 이순신을 제 나라 수군 도독에 임명하면서 보내온 팔사품(八賜品:보물 440)을 들여다보면서 주류적 해석에 과감하게 반기를 드는 이단아적 상상력이 부족한 우리의 문화풍토를 다시 생각해봤다.
통영에서 충무로, 다시 통영이란 이름으로 돌아오기까지 현재의 통영은 이순신 장군의 ‘충무공’과 ‘통제영’에서 왔다 갔다하며 그 역사적 규정력 안에서 맴돌았다. 계획군사도시에서 출발해 해양관광휴양, 거기에 문화예술까지 오늘의 통영은 역사 바깥을 꿈꾸며 늘 새로운 활기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짧은 여행은 끝났다. 다찌는 끝내 가볼 수 없는 희망으로 그칠까. 설령 다시 가보지 못한다 해도 원색의 꿈으로 비탈진 삶과 맞서는 동피랑의 특별한 느낌과 새벽 어시장의 시끌벅적한 삶의 목소리, 입안을 가득 채우던 미더덕의 향, 달아공원의 기분 좋던 바람, 무엇보다 우리의 두 눈을 가득 채우던 봄바다의 푸르디 푸른 색감으로 통영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재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