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 |
[서평] 사육과 육식
관리자(2008-06-09 23:03:33)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동거
윤영래ㅣ자유기고가
전국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시끄럽다. 두어 달 전에는 조류인플루엔자(AI)가 극성을 부려 전국의 닭·오리 사육농가와 음식점을 공황상태로 몰고 갔었는데 말이다. 중고등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로 시작된 촛불문화제가 대한민국 시위문화의 새로운 형태를 선보이면서 매주 열리고 있고, 이런 국민여론에 놀란 대통령이 사과하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역시 국민의 힘은 위대하다고 할까. 게다가 정부의 불성실하고 미온적인 태도에 인터넷에서는 대통령탄핵서명운동까지 하고 있으니 먹거리가 불러일으킨 것 치고는 그 파장이 생각보다 크다.
사실 쇠고기야 원체 가격이 비싸니 쉽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는 아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해도 명절이나 돼야 쇠고기국을 구경할 수 있었고, 지금도 남이 사준다면야 감사하지만 내 돈 내고 먹기에는 부담스럽지 않나. 게다가 요즘은 각종 브랜드 한우들이 쏟아져서 수입산(호주나 뉴질랜드산)이 아닌 국산을 먹을라치면 한동안 지갑단속을 잘 해야만 한다.
어쨌건 요즘 미국산 쇠고기 문제의 원인은 바로 광우(狂牛), 미친소다. 미친개야 그래도 어린 시절 한두 번인가 본적이 있지만 미친소라니. 다행히(?) 모 방송뉴스화면을 통해 미친소를 봤다. 걷지 못하고 자꾸 주저앉는 소를 지게차로 무자비하게 끌고 가는 모습이었다. 미쳤다고 하기에는 측은한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과연 나뿐이었을까. 짧은 순간 스쳐지나가는 소의 눈망울에는 광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야속함이 느껴졌다. ‘다우너소’라고 하는 광우병에 걸려 걷지 못하는 소를 효용이 다했다 해서 폐기처분하기 위해서 지게차로 밀어대는 모습은 동물보호론자가 아닐지라도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했다.
빨리 살찌워 먹기 위한 인간의 효용에만 바쳐져 제 동족과 고기를 먹고 자란 소가 본성을 거역하고 미쳐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물과 인간사이의 관계가 이처럼 단순히 효용성의 문제로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일까? 이러한 물음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 책이 리처드 W. 불리엣의 『사육과 육식』이다. 이 책에서 저자 불리엣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사육’이라는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는 사육을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그리고 후기사육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불리엣이 구별한 시대개념은 연대기적 역사서술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보편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전기 사육시대에는 인간과 동물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동물은 사냥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집트신화 속 자칼의 얼굴을 한 아누비스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신화의 시대를 지나 동물과 인간을 구별 또는 분리하게 된 시기가 사육시대다. 사육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물을 철저히 대상화시켰다는 점이다. 사육동물들과 그들이 제공하는 산물들은 교환과 소비의 대상으로서 경제적?사회적 시스템의 일부로 통합된다. 물질적 용도로만 그 역할이 축소된 사육동물은 축산물의 생산에서만 역할을 담당했고, 반려동물(애완동물)은 정서적 용도에만 기여하게 됐다. 이러한 사육시대에는 가축의 도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축산물을 소비하는 데 윤리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느낄 필요도 없었다. 후기 사육시대에는 애완견처럼 일부 동물은 가족이 되어버리고 축산물을 생산하기 위한 동물들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게 됐다. 고기나 모피, 의약품 개발용 실험동물들의 존재를 당연시하면서 그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부적인 일들을 알게 되면 반발하는 것이 후기 사육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반려동물이나 야생동물은 긍정적이고 사랑받는 정서적 대상이지만, 소비시장에서 제품으로 공급되는 동물은 윤리적으로는 처치 곤란한 존재인 셈이다. 후기 사육시대에 동물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닌 인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사육동물의 시체는 부위별로 해체되고 잘 포장되어 진열대에 올라 원래 형체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고기가 되고, 동물의 시체를 먹는 것에 대한 인간의 불편한 감정 또한 사라지게 된다.
불리엣이 『사육과 육식』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분리의 문제다. 특히 야생의 반대말이 문명이 아니라 사육이라는 불리엣의 전제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왜 단지 동물뿐일까? 인간내부관계에서의 분리는 과연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인가? 복잡한 철학적 문제를 떠나 불리엣이 경계하는 효용성의 문제로 접근하자. 한국식품개발연구원에서 2003년도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연간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연간 14조 7천억 원이라고 한다. 2006년도 환경부 통계연감에 따르면 일일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이 12,977톤이다. 이는 연간 자동차수출액에 맞먹는 액수이며, 전국적으로 결식아동이 16만 명에 이르는 현실에서 엄청난 사회적?경제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동물에 대한 분리의 개념 또는 부지불식간에 가지고 있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개념들이 인간들 사이에서조차 서로를 분리하고 있지 않은가. 선진국은 엄청난 양의 쇠고기를 소비하고, 이를 위해 식량용 경작지를 사료용 경작지로 전환하거나 밀림을 개간하고.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먹기 싫은 건 다시 소에게 먹이고, 그리고도 남는 것은 후진국으로 수출하고. 사회구조적으로 나타나는 소득수준, 교육수준, 문화향유수준 또는 거주지역에 따른 분리, 경제적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분리. 마치 사육시대의 인간과 동물간의 관계 같지는 않은지. 문득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의 제7계명이 떠오른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