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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 |
[전라도 푸진사투리]
관리자(2008-06-09 23:03:04)
‘지시락물 떨어지는 자리를 뭐라고 허는공? ’ 시간이 얌전해질 때가 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옥수수 잎사귀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은 종종 멍한 눈길로 막연한 그리움을 응시할 때가 있다. 그리움에 밑줄을 긋다보면 마음 밭엔 어느새 고랑이 파인다. 고랑을 타고 시간은 흐르고 물기 촉촉한 그리움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멀리 쌍무지개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처마 끝에서는 남은 그리움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이 전라도말로는 ‘지시락물’이다. 이 ‘지시락물’을 종종 ‘지푸락’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는 ‘지시락’과 ‘지푸락’의 발음이 비슷한데다가 ‘지시락물’이 ‘지푸락’으로 이어놓은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의 유사성 때문이다. 즉 ‘지시락’은 표준어로는 ‘기스락’이며 소리 변화의 결과일 뿐 ‘지푸락’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ㄱ’ 소리가 ‘ㅣ’와 함께 있으면 ‘ㅈ’으로 바뀌는 구개음화 현상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이전 시기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난 변화이다. ‘길가>질가티, 김제만경>징게맹겡, 참기름>찬지름, 들기름>들지름’ 등이 그 예다. 또한 ‘ㅡ’소리가 ‘ㅅ’ 아래서 ‘ㅣ’로 바뀌는 ‘가슴>가심, 머슴>머심’ 등도 구개음화처럼 넓은 분포를 갖는다. 이런 변화가 적용된 방언형 ‘으시시’, ‘부시시’ 등은 표준어 ‘으스스’, ‘부스스’보다 훨씬 널리 사용되고 있어서 표준어로 고쳐 말하는 게 되레 어색하게 느껴지는 예이다.  ‘기스락’은 ‘기슭’이란 말로 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래서 ‘기스락’은 ‘처마 기슭’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으며 ‘기슭’은 ‘산, 처마, 소매 등의 끝부분’으로서의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기스락’의 마지막 음절 ‘락’에서 모음 ‘ㅏ’만 빼고 나면 ‘기슭’이 되는 것을 보면 ‘기슭’은 ‘기스락’으로부터 변화해 온 단어일 가능성이 높다. 예나 지금이나 비는 여전히 감성을 자극하는 촉매이다. 그 감성이 살아나서 꼭 표현하고 싶은 그 아리따운 정경, ‘지스락물’이 떨어지는 그 자리······. “그 파인 자리를 뭐라고 해야 쓰까잉?” “꽃심 같은 어휘 없을랑가?” 보통 ‘지시락물이 떨어지는 자리’에 ‘댓돌’이 있다. 아주 실하게 생긴 바위들로 주춧돌 앞쪽으로 둘러쌓는 돌이 ‘댓돌’이다. 아무것도 아닌 행위일망정 여일하게 하다보면 생각도 못한 일이 생긴다는 뜻으로 ‘낙숫물이 댓돌 뚫는다’는 속담도 있다. 댓돌 위에 떨어지는 ‘지시락물’은 온몸이 산화할 테고, 댓돌과 주춧돌 사이에 있는 맨흙 사이에 자리를 잡고 떨어지는 ‘지시락물’은 ‘고랑’을 만들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일상적이었을 그 자리를 일컫는 단어가 만들어지지 않은 게 되레 신기하다.     어쨌든 ‘낙숫물’에 밀려 낯설어지고 있지만 ‘지시락물 떨어지는 풍경’ 역시 언제든지 우연히 만나고 싶은 ‘내 마음의 풍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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