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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장] 윤도장 김종대 옹
관리자(2008-06-09 23:00:47)
그전부터 쭉 허니 내려온 것을 우리가 끊어버리먼 쓰것어요
김종대 연보
1934년 전북 고창군 태생. 아버지 김영근 어머니 김계월 사이
육남매중 장남
1952년 정읍 호암고등학교 졸업
1957년 정의 백부로부터 윤도 전수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10호 윤도장 지정
1997년 일본 오사카 전시
2003년 한국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이사
2005년 충주 비엔날레 전시
2006년 미국 뉴욕 전시
2007년 남북교류전 전시(경복궁)
소질이 있어야 할 거 아녀
고향이 전북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마을이요.
여그서 우리는 여러 대 살았어요! 쭉 허니 윗대부터 살었어요. 일흔여섯. 34년 2월 1일 생인데. 그전에는 어른들이 호적을 늦게 혔어요. 그래서 호적 으는 34년 생으로 되아 있어요. 여그서 태어나고 살었지. 부모님은 농사짓고 살었어요. 어려웁게 살았어요.
윤도를 아버지가 허신 것이 아니라 백부님이 허셨어요. 백부도 아들하나고 우리도 아들 하난디, 그 양반이 돌아가시면서 인자 그 소질이 있어야 할 거 아녀. 기능이. 근디 당신 아들은 소질이 없어. 그리서 조카 헌티 물려주면서 뭐라고 허냐 먼. 이것을 가업으로 넘기기 위해서 그런다. 우리가 지금 내려 온지는 한 320년 되아요. 성씨로 보먼 성을 바꿔감서 4성이 되아요. 처음에는 전 씨가 허다가, 한 씨가 허다가, 서 씨가 허다가 우리헌티 내려오는디 우리가 아들까장 허먼은 5대. 그리서 약 한 320년 되았다고 그려요.
윤도하나에 나락을 한 서너 섬 썩 줬어
아버님은 김영근. 어머니는 김계월. 아버지는 여그가 고향이고 어머니는 저그 흥덕써 왔어요. 농사만 짓고 살았제. 나는 육이오 때 고등학교를 나오고, 정읍호남고등학교. 농협을 한 11년 다녔어요.
군대 갔다 와서. 윤도를 배운지는 50년이 넘죠. 왜냐먼 어렸을 적에 배웠으니까. 백부가 돌아가실 적으는 내가 30이 넘었지만. 그 안에 어깨너머로 봤고. 대강은 그 양반이 가르켜 줬어요. 왜냐먼 이거를 하나를 만들먼 쌀을 많이 팔었어. 윤도하나에 나락을 한 서너 섬 썩 줬어. 그런 게 인자 그 양반이 조카를 갈칠라 먼 다혀야 허는디 그 양반도 벌어먹고 살어야 헌게. 다 안 가르켜 줘. 부자였어요. 그 양반은 만들고 팔고 헌게. 논도 몇 마지기 짓고.
그런디 소질이 있으니까 돌아가시먼서 종형은 안 된 게 니가 히야 쓰것다. 그렇게 인계를 헌것이지요. 군대갔다오고 농협에 댕기고 그런 게 헐 새가 없어. 윤도를 만들 새가 없어요. 그런 게 그동안 공백이 생겼어요. 이것이 생활에 보탬이 되고 허먼은 직업적으로 허는디. 잘 쓰는 사람도 없고 헌게. 그런 게로 그냥 농협댕기고 군대갔다오고 그렸어요. 그러다가 낭중의 와서 윤도 제작만 혔지. 긍게 한 45년 본격적으로 헌 게 되나.
그래도 우리는 일꾼도 부리고 그런대로 살었어
나는 외아들여. 한나여. 여동생이 많어. 다섯. 오숙이까장 있응게. 끝에가 오숙이. 육남매지요. 다 서울로 갔어. 나는 인자 오남매를 낳어요. 아들이 넷이고 딸 하나. 긍게 인자 품앗이는 되았지. 다섯을 낳응게. 다들 서울가 있어요.
고등학교 까장은 그려도 다들 어려웁잖아. 보리밥 먹고 봄으는 독새기 보까서 먹고. 고런 것도 허고. 생채라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쑥허고 버물려서 먹고. 그렇게 어렵게 살었지. 그런 것이 일여. 왜정 때는 그렇게 살었어.
내가 왜정 때 열세 살 먹어서 그 안에 먹고 사는디. 어려웁게 살었어. 쌀이라는 것은 보들못 허고. 그때는 농사를 지먼 물이 없으먼 농사를 못 지어. 그런 게 녹두 콩 같은거 많이 갈어 먹었지. 지금은 지하수가 있어가지고 땅 속으서 막 나온 게 문제가 없어. 비가 안와도. 그러고, 농사짓는 방법도 기계화로 되아 가지고. 농사를 잘 짓고. 그전에는 쟁기로 갈어서. 써레질을 혀서. 손으로 다 심고 그렸지. 능률도 안 오르고, 한 20마지기 짓는디. 그렸어.
그래도 우리는 일꾼도 부리고 그런대로 살었어. 괜찮허게 살었어요. 그런 게 고등학교도 갔지. 여그를 떠나본 적은 없어요. 성내 농협 다녔어요.
여그 우리 동네서는 한 셋인가 밖에 없어. 고등학교 나온 사람은. 공부는 잘 못혔고. 아버지가 못 배워논게 고등학교는 갈쳤어. 대학교는 못 갔잖어. 아버지가 초등학교도 안 나왔잖아. 그전에는 언문이라고 그렸는디. 양학을 그 양반은 언문만 배웠지. 그리서 한글은 잘 알었어.
바퀴 윤자 써서 윤도라 그려
백부님은 김정의, 할아버지는 김권삼. 그 전부텀 조선시대는 윤도가 그 우리 일상생활 헐 때 많이 썼어요. 그때는 이렇게 마을만 혀도 늑대가 댕긴다허고 호랑이가 댕긴다 혔어요. 왜그냐면 그렇게 산이 울창혔어. 긍게 애들이 이런 뒷동산으로 못 나가게 혔어요.
근디 지금은 정리혀버리고 헌 게. 그때는 과거를 보러간다든지 선비들이 그러먼 선추라고 방향을 볼라고 갖고 다녀. 부채 으다 달고 다닌 거. 항해 허는 디도 많이 썼어요. 뱃사람들이 방향을 볼라니까. 그리서 여그서 많이 제작을 혀 갔는디. 지금은 나침반이 나와 가지고 그러지.
나침반은 360도만 되잖아요. 동서남북 방향만 가잖아요. 윤도 안 으도 360도가 다 들어 있지요. 그전으는 많이 사용혔지. 천성이라고 별자리를 연구헌다든지. 사주를 보고 그럴 때도. 그전 으는 음택 양택. 죽으먼 묏자리. 사는디 정헐 때.
이거를 제대로 헐라 먼 우리나라 치는 24층까지 있는디. 바퀴가 한 층 두 층혀서 24층 까장 있어. 바퀴 윤자 써서 윤도라 그려. 그거를 해득을 헐라 먼 그전에는 주역을 읽으 먼 해득을 많이 혔는디. 지금은 주역 읽은 사람이 어디가 있어요. 대학을 나와도 못 허는디. 그런 사람은 없고. 다만 인자 방위만 보고 묘 자리나 집터를 잡고 그러지.
그전부터 쭉 허니 내려온 것을 우리가 끊어버리먼 쓰것어요
작업을 허먼 이 윗집인디. 가서 구경도 허고 내가 소질이 있으니까. 가서 인자 그러먼 그 양반은 조용헌것을 좋아혀요. 왜냐먼 조각을 허고 그런 게 정신을 거그다 써얀 게. 못 오게 혀. 나는 그걸 다 한번 깍어도 보고 말여. 좀 말도 들어보고. 이랬는디. 그리서 그 양반이 그런 디에서 나보고 소질이 있으니까 나 헌티 맥을 이으라고 맺긴 거여.
그전부터 쭉 허니 내려온 것을 우리가 끊어버리먼 쓰것어요. 가업으로 남기기 위해서. 본업으로는 허지 말어라. 그랬어요. 왜냐먼 벌이가 많든 안 헌게. 가업으로 맥을 이어라 그래서 해온 것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었어요. 96년에.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무형문화재는 도나 시지. 나는 국가지정. 그 사람들 허고 우리하고는 달라요.
어려운 점 많이 있었어요. 그렇게 인자 종형이 계셨어요. 큰 백부 종형. 나를 갈친 사람은 중백부고. 큰 종형이 그것을 따라서 혔어요. 잘 혔어요. 근디 종형도 나이를 먹고 백부도 나이를 자신 게. 맥을 이어야 헌디, 종형한티 줄 수가 없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건 게 나헌티 준거여. 그 양반이. 백부한티 많이 배웠어.
그 양반이 급작히 돌아가신 게 유언을 험서 김종대헌티 주어라 그렸지. 그려서 종형이 나 헌티 가르쳐 준거여. 그 양반 허고 나이차가 많이 나지요. 지금 살어 계시먼 95세정도 될 란가. 돌아가셨응게 종형도.
그 양반도 인자 배웠던 것을 잘 못 배워가지고. 도식설명을 잘 못 혀. 도식을 어떻게 어디다 써먹는지를 몰라. 그리서 내가 연구를 많이 혔어요. 24층을 만들면 나누는 정간이 정확혀야혀. 딱 맞어야지. 조금만 틀어지먼은 못써. 왜냐먼 0,000m만 틀려도 못써요. 그리서 그런디가 어렵드란 말이지. 그리서 연구를 혀서 자득을 헌것이지요.
그전 으는 평철이라고 동그란 거 그것만 만들었어요. 원래는. 그러고 선추라고 부채에 달고 다니는 것. 그런 것만 만들었어요. 다량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어쩌다 하나씩 만들고. 나는 연구를 혀서, 개발을 혀서 거북이도 만들고 여러 가지 만들었지. 네 가지 정도. 보통 것을 평철이라고 허고. 선추, 면경철, 거북이 패철. 이렇게 네 가지여.
긍게 우리는 제작만 허지요
주역이나 음양오행 원리를 알어야 허는디. 근디 인자 우리는 주역 까장은 몰르고. 24층에 대한 설명은 혀요. 제작과정만 알지. 사용은 주역을 읽어야 허지. 방법을 알고. 내가 만드는 것은 제작과정만 만드는 거여. 사용을 헐라 먼 공부를 혀야 허고. 제대로 허는 사람이 없어요. 대학교 교수들 지리학 연구 허는 사람들. 뭐 그 사람들도 와 보먼 별것도 아니 드라고. 풍수 보는 사람들도 보먼은 별시런 사람이 다 있어요. 전국적으로 내가 상대를 허는디. 자기 나름대로 잘 헌다고 허는 거여. 다 틀려요. 긍게 우리는 제작만 허지요. 사용 허는 방법이 다 틀리고 그러니까.
대만에서도 만들고, 중국제도 많이 있고. 동양에서만 이것을 사용헌 게. 재작년에 국가에서 가라니까 뉴욕을 갔어요. 전시허로. 가서 인자 미국사람들도 보고. 전시를 11동안인가 혔는디. 거그 가니까 추석맞이 축제라고 그러고 있등만. 한인들이 뉴욕에 10만이 살등만요. 많이도 살대. 엄청나게 살드란 게. 그 사람들이 전시를 허는디. 나는 하나라도 팔 줄 알었더니. 생각지도 안드라고. 모릉 게. 쓸 줄도 모르고. 거문고, 가야금은 몇 개 팔고 그랬지요.
얼굴도 보도 안 허고 사주만 보고는
종형한티 한 4,5년 배웠을 거여. 종형은 김종길. 그 양반도 인자 나이가 들으니까 갈쳐줄라고도 안 허고 내기다 맡겨 놓고는 그렸어. 긍게 나는 인자 책자를 보고, 이것은 어떻게 희야 쓰것다. 그렇게 연구를 혔어. 그 양반이 똑바로 갈쳐 준 것도 아니여.
모친은 작년의 돌아가셨어. 93세에. 부친은 85세에 가셨응 게 15년되았나. 그러네
안사람은 중매로. 그전에는 연애가 없잖아. 우리 매부가 고창군 부안면이라고 있어요. 거그 사시는데. 그 동네 처녀가 괜찮허다고 그려갔고. 중매를 혔당게. 얼굴도 한번 못보고.
나 스물네 살 때. 그때 고등학교 댕길적으여. 늦게 가가지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갔어. 얼굴도 못보고. 안식구는 스물한 살이고. 왜냐면 그때는 군대 안 갈라고 연기를 자꾸혔어요. 영장이 나오먼, 학교 댕기먼 안 간게. 그려서 그렇게 늦어버렸어. 초등학교도 열두 살 먹어서 왜정 때 갔어. 시험 봐가지고 가는디. 일본말을 헐 줄 알어야지. 그렸어. 중학교도 바로 못가고. 그때는 다들 그렸어.
중매여. 얼굴도 보도 안 허고 사주만 보고는. 장일선이여. 이름이. 일흔 셋이여. 나 허고 세 살 차이여. 결혼 헐적으는 고등학교 때 가는디. 겨울에 갔어요. 그때는 가마타고 갔어. 그러고 그 우인들이라고 따라 갔어 학생들이.
여그서 자고는 걸어서 눈이 이렇게 쌓였는디 거그까지 걸어갔어요. 부안면 수남 마을로. 거까장 걸어갔어요. 새벽에. 이렇게 도로나 좋았간디. 그전에는 도로가, 지금은 아스팔트 깔어논 게 좋지만은 그때는 그루마를 목 구루마라 그랬어요. 소가 끌고 댕기는. 그러먼 길이 흙으로 되어 있응 게 발통이 쑥 들어 가가지고 그랬어요. 질어서 댕기들 못혀. 장화가 어디가 있어. 나막신이나 짚새기 그런 거 신고 댕겼지. 고생 많이 혔지 그때는.
결혼날짜를 받어서 그때 가서 봤어요. 거그서 첫 날 밤허고. 우리 안사람도 나를 못보고. 우인들이 나 허고 열 살, 여섯 살 그렇게 차이가 났어요. 그때는 판이 그랬어요. 개판이었어. 아이고 그리도 배운다고. 안배우먼 거시기 헌다고. 아버님이 고등학교는 나와야 헌다고. 원이 되아가지고 그랬지.
농협 다닐 때는 윤도는 손을 못대았지.
결혼 허고는 여그서 살았어요.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헌 게로. 겁나게 어려운 것이 드랑게. 작년에 어머님은 돌아가셨다니까. 그전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헌티 굉장히 고약허게 혔잖아요. 그런 게 문제가 있고. 우리 안식구는 심허게 허든 안 혔지만. 다들 그렸어요. 대개 보면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괄시를 허고 그렸어. 지금은 시어머니가 며느리헌티 그러면 살들 안 허지. 그전에는 인자 그 사람 아니면 못 산다. 그런 게 가지도 못 허고 그렇게 살었지. 결혼 허고 집에서 일 좀 허고 군대를 갔어요 바로.
학교를 졸업 헌게 영장이 나오등만. 그리서 군대를 갔어. 제대로 갔으먼은 전시 때 갔어야 허는디 육이오 때. 우리는 가자마자 인자 휴전이 되아버렸어요.
육이오 때 피난 댕겼지. 산으로. 진주로도 가고. 막 쫒아낸 게. 군인들이. 아군들이. 후퇴 헐 때 같이 갔어요. 그렇게 쫓겨 댕겼다니까.
고창군 아산면이라고 선운사 있는 디에 일가가 살었어. 산 속으서 그리서 은곡이라고 거그로 가서 피난도 허고 그렸지.
군대 갔다 와서 시험 봐서 농협의 들어갔어요. 여러 가지 것을 혔지. 처음에는 연세점을 줬어요. 거그 지배인으로 딱 혔어. 그러다 사무실도 들어가고. 예금계도 보고. 구매계도 보고. 별것 다 봤지. 11년 된 게로 장기 근속혀 가지고 다른 디로 발령을 내드라고. 우리는 아들이 하난 게로 여그가 있어야 허는디. 나는 안 간다 그랬어요. 그래서 사퇴를 혔지.
여그서 농사지었어요. 농협의 다닐 때 여그다가 젓소를 키웠어요. 젓 소 한 30두를. 그리서 그거 안 혀도 먹고 살것드라고. 그리서 첨에는 30두 허다가 한 70두 되았는디. 다 치워버리고 그랬어요. 농협 다닐 때는 윤도는 손을 못대았지. 고치로 온 놈만 고쳐주고 그랬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그만두고 제대로 헌지는 한 30년 되았나 그러네요. 농사지음서 부업으로. 돈은 안 되니까. 주문 들어오먼 하나씩 허고. 한 나락 석 섬 지금 말허자먼 45만원. 큰놈 팔으먼 좋은디.
종류는 네 가지여 보통패철은 동그란 헌 놈이고, 선추라고 부채에 달고 다니는 거, 거북패철, 그리고 면경철이라고 거울이 달려있어요. 그 네 가지여. 제대로 만든 것은 한 4개월 걸려요. 그런 것은 1,200만원도 받어요. 조각도 허고 그런 게.
다 다듬어야 혀요 손으로.
윤도를 만들려먼 처음에 치목을 혀야 혀. 나무를 다듬어 대추나무를. 빨간색이 돌아야 혀. 대추나무라도. 치목 헌 다음에 정간을 허고. 바르게 나눈다고 혀서 정간. 그 다음에 인자 각자를 혀요. 도장 새기듯기 새기는 거이 각자. 그러고 먹으로 색을 입히고 나서 옥돌가루를 내서 하얗게 칠해요. 그러고 각자 다음이 바늘을 만들어요 나침을. 나침을 만들어 가지고 자석에 올려요. 자력을 얻어야 헌 게. 바늘은 그전 으는 우리가 독바늘이라고 큰바늘이 있었어요. 거기다 납작 허니 두드려야 헌 게 불속에 달궈가지고 두드려 썼는디. 지금은 강철이 있어가지고 그것을 끊어서 써요. 강철을 끊는디 다 다듬어야 혀요 손으로.
겁나게 걸려요. 45만 원짜리는 한 5일정도걸리고, 선추는 열흘정도 걸리고, 제대로 된 것은 한 4개월 걸리고 그래요. 선추는 한 백만 원 받고.
정간이 젤로 어려운 것이여.
나침은 언제든지 남북만 가르키는 거여. 그러고 이 정간이라고 허거든 이거는 다 세밀허게 띠어야혀. 대추나무에다가 각을 허는 거여. 정간이 제일 힘들어. 조금만 틀려도 안 되니까. 정간이 젤로 어려운 것이여. 편차가 나니까. 이렇게 금을 잘 못 긋으먼 편차가 굉장히 나지. 멀리 나가먼. 도식대로 허먼 글자가 한 4,500자를 새겨요. 적은 것은 좀 적고. 한자를 그렇게 새겨요. 겁나게 들어가요.
대추나무는 그전에는 청산, 보은에서 가져오다가. 충청도. 근디 제천에서도 가져오고. 요새는 없어요. 나무 구허는 것도 쉽들 안 혀. 인자는 없어. 존 놈 없어. 그리서 많이 구해놨어요. 한 이천만원어치 구해놨어요. 근디 대추나무가 안 뜬 놈이어야혀. 금이 안 가야혀. 쓸어 보먼 금이가 있고 그려요. 옹이도 없어야 허고. 대추나무가 단단허고 각을 허먼은 잘 떨어져. 다른 나무는 인자 쪼가리로 떨어지고 그런디. 이거는 연허먼서도 단단혀. 아주 존 것이여. 그리고 대추나무를 가지고 다니면 사람헌티 좋디야.
이번에도 한 세 개 들어왔어요. 주문이. 일 년에 한 삼십 개 허는가. 다 쬐깐씩 헌거. 큰 놈 들어오면 돈 벌지.
흥덕패철이 유명혔어요.
거북바위가 있는디. 거그는 동서로 되아 있어요. 머리하고 꼬리가. 가운데다 나침을 놓고 보면 정확혀. 동서로 되아있어서. 과학적으로 봐서는 증명 헐 것은 없지만. 윤도를 갖고 가서 나침이 움직인다든지. 잘못 되았는지 그런 것을 봐요. 그러먼 동서남북이 딱 맞는 거여. 그리서 거그 가서 한번 맞춰보지.
조선시대에 무주서도 만들었고. 거기는 박달나무로 만들었고. 여그는 대추나무로 만들었는디. 조건이 여그서 만들 것이 좋았어. 흥덕이 그전에는 원이었었어요. 흥덕원. 지금으로 말허먼 군 인디. 흥덕패철이 유명혔어요. 거북바위에서 맞춰서 나간다 그렸어요.
무주는 없어져 버렸고. 전국에 한나밖에 없어요. 여그서 만든 거. 이북가서는 좀 있는 갑대요. 320년 전 부텀 내려 왔다고 그려요. 증거는 없어. 내가 생각 헐 적으는. 어른들헌티 말 듣고 그런 것이제.
성씨를 바꿔감서. 왜냐면 소질에 따러서 히야는디 안되니까 그려요. 우리도 문화재로 지정 받어 가지고 광주사람을 하나 이수를 시켰더니 안 헐라고혀요. 그리서 아들을 시켰어요. 억지로. 그래서 이제 조교로 되았어요. 이번에 문화재 위원들이 와가지고 시험을 봤지. 만드는 과정을 다 보등만. 이수자를 둘을 세워가지고 잘 허는 사람을 조교를 시켜요. 그리서 지금 우리아들이 조교여.
어디서 자르고, 어디서 시작 허는지 정확히 맞춰야 혀.
24층으로 되아 있어요. 일층은 태극이다. 이층은 팔 쾌다. 삼층은 뭐이다. 이렇게 되아있어요. 그래서 24층이 되아요. 다 뜻이 있어요. 그 안에 한 4,500자 들어있어요. 주역을 알어야 사용 허지. 해득을 헐 라먼. 도식이 한 백오십년 되았지요. 내려오는 것이.
현종 14년에 제작을 혔디야. 정간을 딱딱 맞춰서 히야혀. 이거는 도식이라 대강만 히논 것이고. 우리는 인자 도식을 기준으로 히서. 어디서 자르고, 어디서 시작 허는지 정확히 맞춰야 혀. 우리는 제작과정만 허는 것이지. 해득을 헐라 먼 주역을 혀야 혀요.
참 좋등만. 문화재가 되고나니까.
문화재가 된 것은 1996년도 12월 31일자로 되았어요. 문화재가 될 라먼 상당히 어렵드란 게. 그전의 문공부제. 군청 으서 고리 신청을 혔어요. 처음에. 신청을 혔는디 전라북도로 갔어요. 도 지정을 받을라고. 도에서 보고는 이거는 도 지정이 아니고 국가지정이 맞다 그려가지고 문화재관리국으로 올렸어요.
그래가지고 신청헌 뒤에 한 일 년 있응 게. 숙대 김성수 교수 허고 용인대 박용규 교수 허고 왔어요. 뭣을 보러 왔냐허먼 선추를 볼라고 왔다고 그러등만. 그걸 보고는 갔는디 전문위원이 한 열 두 명 있는디 심사를 혀서 결정헌다 그러등만. 그런 줄만 알고 보내 버렸어여.
한참 기다리는디. 군에다 연락허먼 빠꾸도 아니고 되도 안고 그러는디. 한 삼년 된 게로 연락이 왔어요. 바로 해가지고 오라고, 사진 한 서른 두 장인가 준비혀 가지고. 문화재 관리국으로. 그전으 경복궁 안에 있었지. 왔더니 나중에 지정이 되았다고 허대요.
그때는 진짜 좋았지. 박창수, 이재만이 나. 춤 선생 이 뭣인가 그렇게 네 명이 받었어요. 그때. 참 좋등만. 문화재가 되고나니까 대우허는 것이 좀 나아져요. 그전에는 쇠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랬는디. 문화재가 되니까 사회인들이 인간문화재라고 대우를 해주등만요. 주문도 늘어나고. 매스컴을 많이 타잖아요. 방송, 신문에 내고. 그걸 보고는 오는디. 값이 비싸서. 물어보는 사람은 많으디 그려요. 매스컴이 무선 것이드란 게. 한번 타 먼은 전화가 많이 와. 뭣으로 만드냐 가격은 얼마냐 그러고.
누구한티 아쉰소리 안 허고 살었어요.
나는 인자 아들 독자로 커놔서 그렇게 뭐 어려운적은 없었어요. 작품 만드는데 내가 몰라가지고. 꼭 해야 쓰것는디 누가 갈쳐 줄 사람도 없고. 다 완성을 못 혔을 때가 젤로 어려웠어요. 내가 자수를 히야헌 게. 내가 가정적으로는 어려운 점이 없었어요. 누구한티 아쉰소리 안 허고 살었어요. 문화재 되았을 때가 최고로 좋았지. 왜냐먼 어깨가 팍 올라가드란 게. 나는 안 될 걸로 알았는디. 그렇게 해주고 간 게. 정말로 고맙드라고.
큰 딸이 쉰 두 살. 아래로 아들이 넷이여. 큰아들이 조교로 되았는디. 재작년의 안산 백화점에 있었는디. 그만뒀어요. 암 것도 안 허고 이것 좀 허고 있어요. 안양의 살어요. 작업허먼서. 자석들은 그리도 잘 되았어요.
소질이 없으먼 못 허는디.
보통편철, 패철이라고도 허고. 패철을 가지고 다니면 방향도 보고 그런디. 선비들도 갖고 다니고 그랬어요 옛날 으는. 언지나 남북만 가르키는 거이라.
기억에 남는 분은 장일환 변호사 헌티 700만원에 팔었어. 전주사람. 가지고 있을 거요. 잘 안 게 사갔것지. 싸게 판 편여. 그때는 문화재 지정을 못 받었을 때라. 그리서 낙관도 없어.
전수를 받은 사람은 조교까지 다섯 명이고만. 장학생들도 배우고, 아들도 배우고. 배워서들 조금씩 혀요. 소질이 있응 게 갈쳐 논 게 허는 것이지. 소질이 없으먼 못 허는디.
전수관은 1억5천이 군비로 나왔어요. 그려서 지었어요. 모두 2억 3천 들어갔어요. 자부담을 혔지요 내가. 부자는 아니라도 보탰지. 짓다 말수는 없고. 도비, 국비 받었으먼 좋을 텐데 그러들 못혔어.
장단이 있어요. 내 자산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렸어요. 국비를 받으먼 내거이 아니지. 내 힘으로 히논 게 국가에서는 관리를 안 혀. 안 좋은 편이지만. 내 앞으로 등기가 내논게로. 괜찮아요. 그것이 그려요.
문화재청에서 장학생을 둘 두먼은 4년간을 연수를 시켜. 한 달에 15만원이 나오는디. 그것 보고는 누가 안 헐라고 허지요. 그리서 아들들 한티 시켰어요. 넷 다. 다 각을 잘 혀요. 4년간 허고 나면 이수자가 되아요. 그리고 이수 허고 한 4년 더 연장을 혀서 배우면 조교가 될 수 있는디. 조교는 한사람밖에 안 되아요. 조교는 50만원이 나와. 모다혀서 다섯 명여 딱. 한 4년 배우면 좀 해요. 재질이 있으면 곧 배울거이고. 그렇지 뭐.
술 담배는 전혀 안 혀요. 그리도 건강허도 안 혀. 다리가 아퍼 가지고. 전라남도 여수 병원에 다녀요. 무릎이 연골이 달아가지고. 수술을 히얀다는디. 안 헌다고 혔어. 왜냐먼 수술해가지고 잘못되먼 어쩌. 늙어서 그런 것인디. 약을 갖다가 먹는디 애려서 죽겄어.
나이가 먹으니까 인자 죽는 거만 생각 되아.
재료는 대추나무, 쇠, 먹물, 옥돌, 유리, 대나무가 쓰여요.
대나무는 태선에 들어가고. 제일 중요헌거이 대추나무지. 대추나무는 중국산을 한번 구입 할라고 했는디. 중국에도 없드란 게. 중국산은 또 대추나무가 대추를 딸 때 두드려서 딴대요. 그래서 대추나무가 안 좋아요. 그전에는 청산이나 보은에서 가져 왔는디. 제천에서도 가져오고. 거그치가 좋았어요.
인자 늙어서 아무 소망도 없고, 늙으먼 잘 죽어야지. 나이가 먹으니까 인자 죽는 거만 생각 되아. 죽을적으 어쩌케 죽나. 잘 죽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 욕심 컷 만들어 보들 못 혔어. 작품을 혀도 진짜 정말 맘에 든다 허는 작품은 없어. 어딘가가 안 좋아. 완벽한 게 없드란 게.
옛날 것은 참 좋은 거 있어요. 어른들이 만든 거. 살라고 그랬는디 안 팔어요. 내가 만든 거 하고 바꾸자고 해도 안 바꾸고. 한 씨 어른이 만든 거 같은디. 안 팔아요. 한 백오십년 이백년 된 것인데 안 팔지. 이 근방 으도 먹고 살만 헌 집으서 갖고 있는디. 가보로 물린다고 안 팔아요.
다시 태어난다면 이것 허것어. 다른 거 혀야지.
배우러 온다는 사람도 없어요. 인자. 몇 년을 배워야는디. 대번에 하루 이틀에 배우는 것도 아니고. 누가 배우러 오것어. 전수관은 아들이 이어가것지요.
둘이 살응게 인자 죽는 것이 어떻게 죽냐 그 생각만혀. 다시 태어나면 안 혀. 고단혀. 못 허것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배운 것인 게 허지만은. 다시 태어난다면 이것 허것어. 다른 거 혀야지. 문화재 되았다고 혀도 누가 알아주는가. 우리마을사람은 문화재란 게 뭣 인지도 몰라요. 안 알아줘. 저 사람은 쇠 만드는 사람이다 그려요.
서양문명이 온 게로 인자 다 없어지고 말었지.
아마도 원래 중국에서 들어왔을 것이요. 중국은 지금 36층을 써요. 우리는 24층. 긍게 중국에서 들어왔지 들어오기는. 우리나라에서는 경주가먼 김유신장군 묘를 가먼, 12지로 딱허니 되아 있어. 그때 부텀 사용혔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가 지금 조선시대에 서원관에서 대대적으로 혔어요. 서울 서원관에서. 그러다가 인자 조선시대에 많이 전파가 되아가지고 그랬는디. 서양문명이 온 게로 인자 다 없어지고 말었지. 그서 문헌을 찾느라고. 윤도라고. 바퀴윤자, 그림도자. 문화재청에서 지정을 혀주면서 마땅헌 이름이 없어요. 그래서 중앙도서관에서 이걸 찾았어요. 윤도라는 명칭을. 그래서 그렇게 올렸어요. 문화재청으서도 그거를 몰라.
그래도 정성이 들어가게 만들어야지.
맥이 끊어지든 안 허것지. 기와 같은 거 그런 건 끊어지드란 게. 나는 이걸 만들먼 소장 허는 사람도 가져갈 거이고. 지관들도 가져 가는디. 그런 게 맥은 끊어지들 안 헐 거여. 내 생각이 그려.
주업으로는 못 허고, 부업으로. 나는 지금 문화재가 된 게 한 달 으 백만 원이 나오고. 내비게이션 회사하고 결연을 맺어줘서. 거그서 좀 나오고. 나도 방향을 가지고 허고. 거그도 방향을 가지고 헌 게. 보수가 적응 게 그렇게 맺어주드라고.
내일 모레 안양으로 전시가요. 개인전시. 문화재청에서 해줬어요. 도록도 만들고. 플래카드도 허고. 초대장도 허고. 초대장은 안 헐라고. 누가 오도 앉혀. 작년까지만 혀도 익산 미륵사지에서 허고. 전주박물관에서 허고. 그랬어요. 세 번썩 했어요.
개인전시 말고 공동전시가 있어요. 문화재 작품들만 모아서 허는 거. 경주비엔날레 가서 시연도하고, 전시도 허고 그랬어요. 대우를 잘 해줍디다. 뉴욕전시는 여그서 신청을 혀요. 그래가지고 재작년으 갔어요. 네 분이 갔어요. 화신, 윤도, 염장이라고 발, 거문고, 가야금, 그렇게 갔어요. 부수적으로 매듭, 화가들 고런 것들이 따라갔어요. 열 댓 명 따라갔어요. 중국은 각을 안 허등만 찍어서 나오지. 방향을 가르킨 게 찍어서 혀도 쓰기는 쓰지. 그래도 정성이 들어가게 만들어야지. 손수 그전 법대로만 허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