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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5 |
[전북대학교 제2기 박물관 대학 ] 조선시대 초상화 -경기전 태조 어진(御眞)과 초본(草本)을 중심으로
관리자(2008-06-09 22:42:02)
전북대학교 제2기 박물관 대학 ◎ 조선시대 초상화 -경기전 태조 어진(御眞)과 초본(草本)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초상화의 비밀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조선시대 어진 어진(御眞)이란 왕의 초상화를 말하며 어용(御容), 수용, 진용(眞容), 성용(聖眞)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어진이 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분명히 어진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태조진전을 경기전 등 전국에 세우고, 역대 왕과 왕후의 수용은 한양의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하는 등 어진봉안의 체제를 갖추었다. 기록상으로는 태조의 초상화가 26축 이상이나 되며 다양한 복식과 자세로 그려졌다고 하여 매우 많은 수량으로 역대 왕들의 초상이 제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활발한 어진제작에도 불구하고 현재 온전하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 어진으로는 경기전의 태조어진과 영조어진 반신상 2점에 불과하다. 이밖에 영조 연잉군 때의 초상 및 철종, 익종어진 등은 부산피난 시절 보관창고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상되어 일부분만이 전한다. 어진은 생존하는 임금을 그리는 도사(圖寫)일 경우 왕의 용안을 올려 보면서 그리게 되고 모사(模寫)의 경우는 범본을 밑에 받치고 그리게 된다. 어진 모사 과정을 보면 먼저 이를 담당할 기구나 인물을 선정하게 된다. 체계적으로 그 임무가 수행되기 위해서는 때로 도감(圖監)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일정한 시험이나 추천으로 담당할 화원을 뽑은 후에는 밑그림을 제작하게 된다. 초본을 올바로 내기 위해서 여러 차례 초본을 거듭 내기도 한다. 이어서 밑그림 위에 비단을 두고 좌우에 내왕판(來往板)을 깔고 화원이 그 위에 올라가 비단 위에 밑그림을 올린 후 채색을 한다. 채색 과정이 끝나면 왕과 신하들의 점검을 거쳐서 미심한 부분은 보완하게 된다. 화면의 제작이 끝나면 장황(표구)을 하고 표제를 쓴 후 진전에 봉안하게 된다. 매 단계마다 왕과 대신들의 심사 과정을 거치고 길일길시(吉日吉時)를 택하여 진행하는 등 국가의 지대한 배려 가운데 어진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 어진의 제작 영흥 준원전(濬源殿)과 경주 집경전(集慶殿)의 태조어진이 태조 재세시에 태조의 명령으로 봉안된 것이라면, 전주의 태조어진은 1408년 태조가 승하한 후 1409년에 전주부의 요청으로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하여 1410년에 전주부에 봉안한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경기전본이 다른 태조진전보다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임진병자 양란 이후 영흥의 준원전본과 함께 경기전본 태조어진이 무사히 보존되어 한양의 남별전(이후 영희전으로 개칭)에 봉안할 태조어진 제작의 범본이 되는 등 상대적인 중요도가 높아진다. 이후 1763년(영조39)에 한 차례 수리를 거친 1410년 제작의 태조어진은 1872년에 그 소임을 다하게 되고 현재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어진이 새로 제작되었다. 그 배경을 보면 한양 남별전의 제1실에 봉안되어 오던 태조의 어진과 제3실에 봉안되던 원종(元宗, 1580~1619)의 어진이 희미하게 되어 이들을 새로 만들고 같은 기회에 경기전에 봉안되어 오던 태조 어진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였던 것이다. 태조 어진 2본과 원종어진 1본 등 3본을 모사, 장황(표구)하는 작업이 1872년 4월 8일에 시작되어 5월 30일에 완료되었다. 이 과정을 기록한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는 현존하는 경기전 태조어진의 제작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이 의궤는 국립문화재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모두 뒷부분이 많이 없어졌다.   제작에 참여한 화가 명단을 보면 조중묵(趙重  ), 박기준(朴基駿), 백은배(白殷培, 1820~1900), 유숙(劉淑, 1827~1873), 이창옥(李昌鈺), 박용기(朴鏞夔), 박용훈(朴鏞薰, 1842~?), 안건영(安建榮, 1845~?), 조재흥(趙在興), 서두표(徐斗杓) 등 10명이다. 조선시대 초상화 초본 초상화 초본은 초상의 틀을 처음으로 잡으며 그린 그림을 가르킨다. 이런 뜻에서 초본을 ‘밑그림’이라 부를 수 있다. 초상화의 성격에 따라 초본을 제작하는 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생존하고 있는 인물을 그리는 도사(圖寫)이다. 이때 화가는 인물을 직접 보면서 초본을 그렸다. 둘째는 이미 제작된 초상을 다시 베껴 그리는 모사(模寫)로 기존의 초상 위에 종이를 올려 놓고 초본을 떴다. 셋째는 이미 돌아가신 인물의 초상을 상상해서 그려야 하는 추사(追寫)이다. 이 경우, 생존시 옆에서 가까이 모시던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초본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초본이라 하면 대강 그린 것으로 예상하기 쉬운데,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초상화 초본을 보면 거의 완성본에 가까울 정도로 얼굴의 묘사가 자세하다. 초본은 비단에 그 윤곽을 정식으로 옮기기 전에 미리 그 결과를 볼 수 있게 만든 샘플작이라 할 수 있는데 초상화의 주문자들은 초본을 기준으로 수정, 보완을 거쳐 정본의 제작 방향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초상화의 비밀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수리할 때 뒷면의 배접지를 제거한 후, 뜻밖에도 화면의 뒤에 채색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초상화의 뒷면에 채색하는 것을 ‘배채’라 하는데 뒷면에 색을 칠하면 앞에서 칠할 때보다 채색이 떨어질 염려가 적을 뿐만 아니라 비단 사이로 그 뒷면에 칠한 색이  비춰 보이게 되어 은은한 색상 효과를 살릴 수 있었다. 초상화 초본을 그릴 때에도 배채법을 적용하여 초본의 뒷면에 채색을 한 후 색감이 앞으로 비춰 보이는 것을 참고하면서 앞에서 얼굴 묘사를 마무리 하였다. 초상화 제작 과정에서 눈여겨 볼 것은 기름종이, 즉 유지(油紙)에 초본을 그린다는 것이다. 종이에 기름을 먹여서 반투명한 유지에 초본을 그리면 뒷면에 칠한 채색이 쉽게 비춰 보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야만 앞에서 칠한 전채(前彩)와 뒤에서 칠한 배채(背彩)의 색상이 합쳐져 생기는 종합적인 효과를 미리 볼 수 있다. 유지 초본에 이뤄진 이러한 채색 결과를 바탕으로 차후에 이어지는 비단 정본의 작업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유지초본을 보면 세월이 흘러 반투명했던 유지가 불투명한 갈색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작 당시에는 채색이 전혀 없는 비단 바탕처럼 노란 색조였을 것이다. 이름난 인물들의 초상, 名賢畵像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름난 인물들의 초상, 名賢畵像>은 조선 후기 영조, 정조 임금 시대에 활약한 이름난 인물들의 유지 초본 33점으로 구성되었다. 다양한 크기의 유지油紙에 모두 인물의 가슴 부분까지만 그렸다. 얼굴의 묘사가 매우 자세하고 붓질이 능숙하여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초본을 뜬 것으로 생각된다. 낱장으로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초본의 뒷면까지 볼 수 있어서 유지 초본의 제작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안집 (安集, , 1703~?) 초상 초본>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유탄으로 대략적인 윤곽을 잡은 후에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얼굴 모습을 그리고 몸체는 자유롭고 활달한 붓질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세밀하고도 섬세한 얼굴 표현에 비해 몸체는 대담한 붓질로 처리하였다. 단령 목 주위의 깊이 및 몸체의 크기를 조정하여 굵은 붓으로 옷주름을 마무리하였다. 직접 대상 인물을 대면하여 초본을 낸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완벽한 완성도를 보인다. 우상부에 “정본차(正本次, 정본에 쓸 것)”라고 쓴 묵서가 있어서 이 작품 외에 더 많은 수량의 초본을 그렸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동일 인물을 그린 여러 개의 초본을 비교해서 정본을 완성할 초본으로 이 작품을 선택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명현초상화첩>>의 초본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물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가운데 각 인물이 지닌 특유의 성정까지 느껴진다. 정성스럽게 채색된 비단 정본 초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완벽성과는 다른, 얼굴의 표현에만 묘사력이 집중되면서 생기는 여유로움이 있다. 또한 ‘유지油紙’라는 매체가 형성하는 비형식적인 매력 때문에 유지초본은 정본正本 제작을 위한 수단으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감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유지초본이 이처럼 얼굴 표정을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배채법’이 있다. 배채법은 화면의 뒤에 채색을 하는 것으로, 뒤에 칠한 색감이 앞으로 비춰 보이는 것을 참고하면서 앞에서 얼굴을 묘사하는 것이다. 비단의 경우, 올 사이로 채색이 비춰 보이게 되는데 이 효과를 초본에서는 유지를 사용함으로써 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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