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8.5 |
[문화시평] 제24회 전북연극제
관리자(2008-06-09 22:40:43)
우리지역 연극이 ‘오아시스’가 되길 바라며 정초왕ㅣ전북대 독문과 교수 제24회 전북연극제가 4월 16일부터 20일까지 ‘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열렸다. 제26회 전국연극제 예선을 겸한 이번 연극제 작품들을 보러 다니는 동안, 비록 주어진 일들 때문에 의무적으로 한 것이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하고 또 몰입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막이 내린 후 며칠 동안 글이 손에 잡히질 않았으니 말이다. 그것도 일종의 공허감이라면 ‘현장’을 떠난 후 참 오랜만에 느낀 것이기도 하다. 첫날 공연된 “극단 황토”의 “태”(오태석 작, 박병도 연출)는 그 원작의 명성이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칭해질 만한 작품이다. 1974년 초연된 이래 경향 각지에서 무수히 공연이 되었고, 최근에는 33년만의 개작과 함께 다시 국립극장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극단 황토”만 해도 이미 1987년 무대화하였고, 1988년에는 전국연극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에도 공연을 올린바 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배경인 이 작품에서 핵심은 물론 ‘권력의 광기와 폭력’에 대척점을 이루는 ‘끈질긴 생명의 존엄성’이다. 한편에는 권력과 생명의 비극적 갈등 속에서 시해당하는 운명을 면치 못하는 단종, 그리고 권력의 의지를 넘어서 종의 자식과 운명을 바꿔 생명의 끈을 이어가는 박중림의 증손자(박팽년의 손자)가 있고, 또 한편에는 상전 집안의 대를 잇게 하려고 자식의 목숨을 바친 박씨 집안 종부의 넋이 나간 울부짖음이 있다. 역사와 인간, 집단과 개인, 권력욕과 인간애, 혹은 탐욕과 도의 등의 대립과 갈등을 이처럼 짜임새 있게 독특한 표현방식과 성격묘사, 맛깔스러운 대사를 통해 형상화해낸 작품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이 날의 “황토”의 공연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서는 탓할만한 게 눈에 띠지 않을 만큼 연출역량이나, 배우들의 연기력, 무대의 시청각 요소들과 어우러지는 앙상블 등이 관극의 재미를 맘껏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어떨까. 전국 무대에 나간다면? 결국 ‘참신성’이 관건이 될지도 모르겠다. 18일 공연된 “재인촌 우듬지”의 “The Cat”(김영오 작, 연출)은 자칭 ‘스릴러 창작극’을 표방하면서 미스터리(?) 서술구조를 바탕으로 ‘거액의 유산을 놓고 벌어지는 한 집안 가족 구성원간의 암투’를 다루고 있다. 문제는 이른바 ‘스릴’이라 하는 것이 극본에서 다루는 사건의 극적 개연성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짜임새, 인물들의 성격묘사에서 허점이 없고, 현장공연을 통해서도 연기를 비롯한 제반 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시청각적으로 수준 높게 형상화되었을 때에 가능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일일이 그 예를 거론하기에 지면이 부족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성격과 언행, 상황이 주는 ‘이해곤란함’이 ‘스릴’이나 ‘미스터리’등으로 포장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 관람 후 극본을 읽다보니 이런 ‘지문’이 보인다: “어머니: (의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다.{뭘 더 바래나! 연출의 능력과 배우의 능력이다.})”. 아마도 인물 형상화가 연출과 배우의 힘으로 완성되기를 기대한 듯한데, 이 작품은 작가와 연출가가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극본 자체에서 드러난 허점들은 공연을 통해서도 극복되지 못했다. 특정 장르를 시리즈로 창작하려는 시도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연극제 경선 참가작이 아닌 자체 공연(혹은 ‘워크숍’ 공연)이었다면 아마도 기꺼이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19일 아하아트홀에서 공연된 “극단 명태”의 “그남자 그여자”(장진 작, 오장렬 연출)는 이미 같은 극단이 “서툰사람들”이라는 본디 제목으로 여러 차례 공연했던 작품이다. 다수에 걸친 공연경험은 한편으로는 이전 공연을 판박이처럼 ‘답습’하지 않는 뭔가 새로운 해석을 가미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기에 도리어 난점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재미있는 연극’이라는 틀에 담는 극작가 장진의 메시지가 그리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중학교 영어교사와 그 집에 침입한 동갑내기 서툰 도둑이 하룻밤의 우여곡절 끝에 서로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된다는 것인데, 도둑과 여교사의 이 같은 사랑(?)을 일회성의 해프닝이나 스캔들로 치부하지 않고, 상식을 뛰어넘어 인습의 탈을 벗고 허위의식을 깨치고서 받아들이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저도 몰래 고개가 끄덕여지는, ‘강요됨이 없이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마음’이 아닐까. 대단히 애석하게도 이번 공연을 보고서 이런 마음이 들기는 어려웠다. 과장된 연기와 불안한 극적 흐름은 ‘코미디’와 ‘개그’의 구분도 모호하게 한 측면이 없지 않으며, 연출의 의도와 인물해석력에도 머리를 갸웃하게 하였다. - 단 일회의 조그만 지하소극장 공연에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찬 관객들, 생각해보면 참으로 ‘착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관객들’ 가운데 섞여 불현듯 ‘불이라도 나면 어쩌지’ 걱정하며 극단의 처사를 속으로 비난한 나는 ‘나이 들어 비겁해진 초라한 중년’에 불과했을까? 20일 4시, “극단 사람세상”의 “고향역”(김영희 작, 최균 연출)을 보기 위해 군산사람세상소극장으로 갔다. 가난한 냄새 물씬 풍기는 소극장에 관객들도 많지 않았으나, “창단 10년 만의 자체 창작극”, 그것도 “우리 지역의 이야기를 우리 손으로 써서 무대에 올릴 수 있다”는 감격과 자랑스러움 때문일까, 소극장 입구에서 마주친 얼굴 검은 연출자의 표정은 ‘할 수 있는 일 다 해놓고 하늘의 축복을 기다리는’ 농부를 닮았다.  작품의 무대는 물론 군산이다. ‘선주 집 아들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나 풍랑으로 아버지와 형제를 잃고 어머니가 하는 포장마차로 연명하던 기철이. 처지를 한탄하며 술에 빠져 살던 그는 사랑하는 여인 혜숙에게 홀어머니를 맡기고는 돈 벌어 오겠다는 일념으로 군산을 떠난다.’ ‘악극’을 표방하고 있듯이 결말은 물론 ‘해피엔딩’이다. 기철은 돌아오고, 쓰러졌던 어머니도 정신이 돌아오고, 도시는 새로운 발전의 기대에 활력이 넘치고, 두 연인의 앞날을 밝아 보이는 것이다. 작품의 규모에 비해 무대가 너무 협소했고, 가창력에 있어 안정되지 못한 부분도 있는 등 아쉬움도 없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는 기대이상의 선전(?)이라 평가된다. 무엇보다 연기의 기초가 닦인 배우들의 고른 연기가 이루는 앙상블이 좋았고, 오락성 짙은 악극임에도 과장하지 않는 표현, 진지한 자세를 높이 사주고 싶은 마음이다. 같은 날 7시 30분 연지홀에서 공연된 “문화영토 판”의 “Timeover”(송유억 작, 정진권 연출)는 이 지역출신 신진작가의 창작극이라는 점에서 우선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내용을 압축 요약해보면 대략 이렇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고로 혹은 자살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저승사자의 인도를 받아 저승과 이승의 중간지역인 명부로 모여들고, 이들 중 자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의 항변에 재판관은 이들의 이승행, 즉 다시 살게 해주는 조건으로 자살자의 시도를 막으라는 임무를 부여하지만, 당연히 이들은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다. 정해진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니.’ - 그런데 왜 ‘된장남’과 자살한 여학생은 살려 보내지? 일관성이 없는 것인가, 아님 고차원의 유머일까? -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결국 단 한번 주어지는 소중한 삶의 시간을 소비적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뭔가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일 것이다. 너무 속 드러나 보이는 주제일까? 설익은 감이 없지 않으나, 경쾌하고 발랄한 대사와 극적 흐름은 일면 공연을 보는 재미를 더해주었던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대사와 몸짓, 상황에서의 지나친 희화화는 내재되어 있는 메시지의 의미를 곱씹기 어렵게 만들었고, 무선마이크를 비롯한 음향과 조명 등 무대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연기자들의 대사와 노래가 잘 전달되지 못한 문제점을 보인 것은 결과적으로 공연상의 결정적 약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경박함과 경쾌함의 차이를 모르고,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의 장단점도 헤아릴 줄 모르는 얼치기 연예인 같은 연극인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게 있다면, 동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동시대에 어울리는 틀에 담고자 밤을 새워 노심초사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우리 지역의 연극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 선인장으로 살아남는 걸 넘어서 나무들 울창한 오아시스가 되기를 마음 깊이 바란다. 정초왕/ 원성균관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브레히트’를 전공했다.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을 지냈으며, 전북대 교수로 있으면서 연극론과 영화의 이해, 독일 시 등을 강의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