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5 |
[이흥재의 마을 이야기]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오메마을
관리자(2008-06-09 22:38:49)
15세, 장가갈 때 썼던 초립을 간직하고 있는 90살의 권희문 옹
큰대문을 두 번 들어가면 비로소 안마당이 나온다. 안방에는 동그란 안경테를 눌러 쓴 90세의 ‘오메사는 권가’ 할아버지가 계신다. 지금도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버선을 신고, 댓님을 치고 생활하신다. TV드라마 사극이나 영화에서 본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촬영을 위해 일부러 만든 새옷이지만, 권희문 옹이 입은 옷은 매일매일 입고 생활하는 평상복이다. 내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둔덕이 李씨”라는 것을 알고 반가워한다. 며느리, 고모, 대고모 모두가 둔덕이에서 시집온 전주 이씨들이라 친가처럼 가깝게 나를 맞이했다.
거창현감을 지낸 선조때부터 이곳에 살아온지 300여년이 되는 안동 권씨들의 오메마을, 이 마을 대표선수는 바로 이 권희문 옹과 권희문 가옥이다.
이 집은 영조 49년(1773년)에 짓기 시작하여 100여년에 걸쳐 지었다 한다. 안채, 사당채, 서쪽채, 바깥채, 아래채, 문간채, 나무간채, 그리고 헛간재 등 8채나 되고 대지도 천평이나 된다. 호남 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양반가옥과는 약간 다른 몸채는 ㄱ장형 이고 기둥도 대개 4각인데 둥근 원형으로 7칸집이다. 사랑채인 의왕서는 산이 높고높고 물이 왕왕 소리나게 흐른다는 뜻으로, 단순한 사랑채가 아니라 서원(書院)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다. 구례 순천 여수에 사는 선비들이 남원 수지면의 죽산 박씨들 몽심재에서 자고 이곳 산서 의왕서를 지나 서울에 갔다. 일반행인도 자고 갔을 뿐아니라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도 하고 선비들이 공부하는 곳이기도 했다. 사랑채 맨 구석 조그만 공간에는 관세음보살 탱화를 걸어놓고 기도를 하는 공간이다.
사랑채 대청에는 “安心如海 - 편안한 마음이 바다와 같다”는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글씨의 현판이 있다. 조광진은 본래 말더듬이여서 스스로 어눌할눌(訥)을 써서 눌인(訥人)이라 호를 붙여 불렀는데,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李三晩)과 눌인 조광진을 조선후기 3代 서예가로 꼽는다. 추사 김정희가 창아(蒼雅)하고 기발(奇拔)함이 “압록강 동쪽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한바”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리고 사랑채 천장에 둥근갓 2개와 초립 1개가 8괘가 그려진 갓집에 걸려있다. 이 초립은 15살 장가갈 때 쓴 모자라면서 90세의 권희문 옹은 허허하며 웃으셨다. 75년전 1923년 일제 강점기에 결혼을 한 권옹은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 4·19, 5·16, 5·18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묵묵히 겪어오면서도 결혼때 쓴 초립을 지금까지 잘 보관해 오고 있었다. 결혼전 꼬마아이들이 이 모자를 써서 옛날에는 초립동(草笠童)이라 불렀다.
농사를 지으며 한문공부도 하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대지가 천평이란다. 잡다한 생활용품을 넣어두는, 요즘 다용도실 같은 ‘잡방’ 통풍구에는 “卍”자 문양이 새겨져 있다. 흔히 만(卍)자는 불교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알고 있지만,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경기전 외신문(外神門)이나 양반집 사당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원래 선한 세력에 의해 움직이는 사방위를 뜻하는 문양으로, 착하고 선한 기운이 여기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라는 의미이다.
아직도 운동서당(雲洞書堂)이 있는 이 마을의 특징은 골목길이 시원시원하게 연결이 돼 있다. 집터가 천여평이 넓는 집이 많고 집집마다 철쭉이며 꽃잔디, 튜립, 금낭화등의 꽃이 피어 있다. 다른 시골 마을에 가면 터도 좁고 옹색한 집들이 옹기종기 있는 모습이나 오매마을은 마치 잘 가꾸어진 별장동네를 보는 느낌이다.
이 마을에는 고조이상 선대의 시재를 모시는 재실이 6곳이나 된다. 타성받이 재실은 없고, 모두 권씨들 재실이다. 재실도 건물이나 터의 위세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는 건물이다.
열녀학생권희언처 남평문씨지려
(烈女學生權希彦妻 南平文氏 之 閭)
마을 입구 큰 길 가에는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남평문씨 할머니 열녀문이 있다. 열녀나 효자비 하나 없으면 명문가라고 자랑할 수 없던 시절의 가문의 영광인 상징물이다.
마을 어른들이 제일 먼저 자랑하시는 분은 열녀문씨 할머니이다. 문씨 할머니는 결혼한지 다섯달만에 남편이 홍진으로 죽게 된다. 이에 남편의 장례에 정성을 다하고 일년이 되는 첫기일을 맞아 제사를 마친 후, 시댁 형제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1778)하였다.
그 유서에 보면 초상시에 바로 부군의 뒤를 따르려했으나, 상복중에 부군의 일점 혈육이라도 생길까 기다렸으나 허사였고, 조카를 양자로 삼았으나 그 양자마저 어려서 죽었다. 이에 부형(夫兄)들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부군의 뒤를 따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가 음력 시월인데도 여름에 입는 모시옷을 입고 죽은 것은, 여름에 결혼하여 부부 함께 있는 날이 겨우 17일 뿐이라, 저승에 가서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 생존시 입었던 옷을 입어야 서로 알아볼 것 같다는 애절한 사연이 유서에 적혀 있다. 29개 고을 선비들이 적극 추천하여 정조 7년(1783) 왕이 원릉행차시 부인의 종 가현이 바라를 쳐 직소하여 명정(銘旌)의 특전을 받아 정문(旌門)을 세웠다 한다. 유서와 당시 유림들이 돌린 통문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자랑스런 열녀문을 둘러싼 담이 비바람에 허물어져 있고, 잡초가 무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