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5 |
[신귀백 영화엿보기]
관리자(2008-06-09 22:38:18)
훑지 않고 단면을 썰어대는 네오 웨스턴, <데어 윌 비 블러드>
겸손한 카메라
‘구글 어스’ 프로그램이 있기도 전, 카메라는 저 창공에서부터 안을 들여다보듯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대자연의 장관을 보여준다. 빨려들듯 위에서 아래로 협곡을 내려가던(tilt down) 카메라는 이제 좌에서 우로 한참을 훑고(pan) 지나가면서 광야를 자랑한다. 마치 ‘니들 이런 거 없지’ 하면서 카메라가 멈추는 지점에서 말 탄 사나이들의 서부극이 펼쳐지지 않았던가. 올드 웨스턴의 매력 포인트는 앞서 말한 경관과 스타급 배우다. 서부라는 공간 차용문제는 더 생각해 볼 논제지만,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 블러드>에서는 이런 것 없다. <블러드>에서의 땅은 올드 텍사스의 광야지만 네오 웨스턴의 카메라는 함부로 좌에서 우를 훑진 않는다. 단지 카메라는 앞으로 향했다가 뒤로 조금 물러날 뿐, 쉽게 팬(pan)하지 않는 겸손함이 있다. 줌아웃에 가끔은 클로즈업도 있지만 좌우 팬이 없는 것이 마치 땅속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리는 작업을 하는 것과 같다. 대니얼 루이스가 최고의 배우라는 말은 성립하지만 스타급 배우라는 것도 어색하지 않은가. 일단 보자.
외로운 형, 듣지 못하는 아버지
1889년, 무일푼이지만 집념의 소유자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달팽이만한 수직갱도에서 은을 채굴한다. 어둠 속 이 남자가 던지는 곡괭이와 정이 내는 소리, 기계라곤 수동 도르래가 전부인 그의 지난한 노동과 수고가 초반 20분의 말없는 스크린을 채운다. 뼈가 녹아나는 잔혹한 노동의 수고 끝에 그는 광물을 발견하나 갱에 추락하여 오래도록 불구의 다리로 살아가게 된다. 신념을 가진 이 근면한 사나이는 우연처럼 석유를 발견하지만, 심봤다 하며 물 한 모금 시원히 마시는 장면이 없다. 이 영화, 끝없는 갈증을 퍼 올려야 하기 때문에. 석유를 찾는 구체적 과정들은 저 옛날 남자 둘 여자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바닥에 깐 유정 뒤로 해가 지던 <자이안트>의 서부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직은 가내수공업적 상황을 면치 못한 그에게 젊은 청년이 찾아와 기름이 나오는 땅을 알려준다. 이제 제법 옷꼴을 차려입은 그는 석유값은 아니어도 메추리 값은 드리겠다면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베팅을 하면서 농부들의 땅을 사들인다. 그는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라고, 교회와 학교를 짓고 나면 우리 커뮤니티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라며(미국판 뉴타운 공약?) 땅을 매집한다.
한 문이 열리면 한 문이 닫히는 법. 검은 기름이 유정을 뚫고 콸콸 쏟아져 나오는 기쁨도 잠시 그의 아들은 그 폭발음에 청력을 잃는다. ‘내 석유를 나 혼자만’ 사용하겠다는 이 남자는 성공하지만 말을 잃은 아들은 사랑까지 잃는 귀머거리가 되고 마는 것. 돈을 쥐게 된 아버지는 마음의 귀를 닫고야 말고. 베트남에서 돌아오라고 하던 아들의 말을 듣지 않던 아비가 가고 없는 오늘, 이제 아비가 된 그 아들은 그 아들이 이라크에서 돌아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나 더, 이복동생이 찾아오자 그는 대뜸 신분증을 요구하다가 결국은 가짜 동생 헨리를 쏘아 죽인다. 우리가 이런 동생은 아닐까.
미성숙의 나라
그는 굴착기술 현대화와 함께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이용하려는 제3계시교 엘라이 선데이(폴 디노, 1인2역)와 적당한 상호적 계급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경제가 피어나 노동력이 모여들고 피 같은 신도가 늘어나는 것에 이 둘은 개와 고양이의 관계를 유지한다. 유정사업에 가족을 입에 담는 플레인뷰가 석유사업 활성화와 함께 변모하는 마을의 풍경 속에서 엘라이 교회의 퍼포먼스(아직도 우리네 교회에서 벌어지는)는 서로가 닮은꼴. 부흥강사 스타일의 선데이는 플레인뷰의 대척점이자 내면의 또 다른 자아이기에 그들은 서로 필요할 때만 협력하는 것. 귀때기 새파란 목사를 보자니, 아하 대한제국시대 선교사로 파송된 언더우드나 알렌 같은 젊은이들의 나이가 모두 선데이 정도의 나이라는 것, 아으. 플레인뷰는 자신이 퍼 올린 기름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집유소로 가기를 바라지만 자신이 구입한 땅이 아니다. 송유관을 묻으려면 죄사함을 받으라는 땅주인의 전도의 말씀에 이 실용의 장사꾼은 무릎 꿇고 귀싸대기를 맞아가며 참회하는 척 굴욕을 견딘다. 그는 마녀에게 영혼을 팔듯 교회에 가서 수모를 겪은 후에 파이프라인의 통과권을 얻는다. 수원(水源)을 갖춘 농장주를 설득하지 않고 곧바로 총질하던 서부극과는 다르다. 비용과 효용사이를 철저히 계산하는 그가 사는 나라가 도덕성보다는 계약성에 집중하는 나라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제가 우위에 있는 기름장사의 사적 탐욕이 신앙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해결 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원작자 업튼 싱클레어의 장치일까. 절묘하다.
위인의 전반부 삶이 피로 그 자체라면 그 후반부는 과연 유복할까? 그는 새 삶을 찾으려는 아들에게 ‘내 핏줄이 아니라 바구니에 담긴 개자식’ 이라는 말로 영원한 고독의 갱 안으로 자신을 가둬버린다. 자식(유사 자식)과 건너지 못할 불화를 겪은 이 성공한 노인에게 다시 선데이가 찾아온다. 경제 불황에 견디지 못한 엘라이는 ‘나는 거짓 예언자’라며 목사가 장사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장면에서 이 나라가 자본도 종교도 서로가 미쳤음을 확인시켜준다. 한번은 수비로 때론 공격으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인데, 우리 동네에서 '믿슈미까’하는 분의 종교와 자본이 만나는 지점은 또 없을까.
이 영화 서부극의 포즈가 아니다. 돈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미국의 자본주의 신화에의 대유이고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불능의 상황을 예리한 단면으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와일드 번치, 1969>가 킹목사가 죽어가던 극도로 불안한 미국사회의 은유라면 ,코엔 형제의 작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나 범인이 누구인가 알지만 처벌할 수 없는 <조디악> 같은 영화들은 성숙함으로 가지 못하고 맨날 쌈질이나 해대는 피로한 나라, 통제를 상실해가는 미국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광물성 배우, 대니얼 루이스
<블러드>가 보여주는 저 유년 서부의 벽화와 오늘날 팍스아메리카나의 광기는 닮은 점이 많다. 허나 이 벽화에 그려진 광대한 평원에는 어린 메리 말고 단 한명의 여자가 없다. 아들 H.W.를 키우면서 동냥젖을 먹일 만도 하겠지만 철저히 여성이 배제되어있고 어디에도 안락한 가정이 없다. 이 미국영화에는 이들 영화가 우위에 두는 가정이나 그 흔한 성조기조차 나오지 않는다. 일찍이 없던 스타일 아닌가. 배우 역시 스타일리시와는 거리가 멀다.
땀 냄새, 기름 냄새와 먼지가 날아와 앉을 듯한 화면 어디에도 서부의 아름다움은 없다. 여기 한 배우가 홀로(거의) 160분을 채워도 넉넉할 수 있으니 '괴물'이다. 결코 맑지 않은 그래서 전혀 귀족적이지 않은 피부, 함부로 섞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눈, 초가지붕 같은 콧수염, 고통을 빤히 바라보는 무표정, 불필요한 살점이 없지만 근육질이지 않은 몸피의 대니얼 루이스는 새롭게 조명된 고전양식의 배우이다. 한 번도 쿨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스산한 인물에 광물적 무채색 영혼을 불어넣는 메소드 연기를 펼친 그에게 오스카가 주연상을 준 것은, 흐음 이 동네 예술인들이 아직도 제 정신이 있다는 말씀인데…….
스타일리시하지 않은 서부, 그 반성문
<천민이 돈을 벌면 작위를 사고 족보를 산다. 어찌 먼 나라만의 이야기겠는가. <베오 울프>는 사실적 CG의 재현으로 화제가 된 작품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 영화는 미국인들의 역사부재에 따른 신화세계의 추종이라 말할 수 있을 터. 미국인에게 신화로서 인디언 이야기를 하자니 자신들의 죄과가 너무 엄청나고 서부시대의 무법자 이야기를 하지나 영화 속 총잡이 이야기는 허구(사회학자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라는 게 일반적인 중론이다. 그렇다면?
광대한 평원에서 폼나게 죽어가던 총잡이들 그리고 휘파람과 함께 대지를 울려대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의 주인공들은 관계를 따로 설명하지 않고도 그저 스피디한 동작과 과도한 죽음을 통해서 금방 악당과 주인공을 구별할 수 있었다. 매력 넘치는 총잡이들이 광야를 질주하는 서부영화가 시들해질 때, 할리우드는 엘에이에서 뉴 올리언스까지 <이지 라이더>가 여러 날에 걸쳐 달리던 땅. 이들이 달리던 광야가 너무도 길고 너무도 거대해 보였는데, 오늘 <블러드>가 보여주는 그 광야는 스타일이라 말할 그 무엇이 없다. 담백하다.
<터미네이터>와 <스타워즈>가 저 과거로 사라진 오늘, 케이블 텔레비전에서는 매일같이 CSI 수사대원들이 범인을 잡아낸다. 신이 저 하늘과 바다를 잇는 마이애미의 수평선을 만들어냈다면 이 서부의 후예들은 매일같이 살인이 들끓는 욕망의 덩어리 인 저 수직의 건물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TV가 도심의 살인사건을 잡아낼 때 일군의 할리우드(우리가 우습게 여겼던 총칭으로)는 그들 신화의 세계에 해당하는 새로운 서부를 그려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의 보안관 토미 리 존스는 마이애미 수사대 호레이쇼 반장처럼 적극적으로 범인을 쫓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흘러만 간다. <노인의 나라…>가 피로한 미국을 보여 준다면 <블러드>는 지나온 역사에 대한 반성문이다. 반성문의 끝에 이 쓸쓸한 부자 노인네는 'I'm finished!' 라고 자신의 볼링장에서 뒹굴지만 이런 네오 웨스턴을 만드는 나라의 반성문의 문체를 보면 아직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곁눈질(pan) 보다는 좁은 우물(갱)일지언정 이토록 부지런히 길어 올리면서 그 단면을 썰어대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