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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 |
[지상중계 ] 조선의 美學, 그 장엄함에서 익살스러움까지
관리자(2008-04-18 15:41:02)
전북대학교박물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제2기 박물관대학을 개설했습니다. 3월 19일부터 시작되어 6월 4일까지 열리는 올해는 조선의 미학을 테마로 장엄함, 깨끗함, 기품, 긍지, 아름다움, 낭만, 익살, 조촐과 분방 등의 소주제를 가지고 총 10번의 강의를 열어갑니다. 강사진 역시 조성의 사상적 배경, 회화, 초상, 도자기, 의복 등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화저널이 전북대박물관과 공동으로 이번 제2기 박물관대학의 강연내용을 지면으로 옮김니다. 김기현 전북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 선비의 청빈淸貧사상 인간은 그의 존재가 확정되지 않은 유일한 동물이다. 여타의 모든 동물들은 자연 또는 신의 직접적인 규제 속에서 그 각각 정해진 존재방식에 따라 본능적으로 살아나가는 데 반해, 인간은 자연 또는 신으로부터 그의 존재본질을 위임받아 자신의 정신적 역량, 즉 이성으로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개척해나가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치 “페르시아의 양탄자를 짜듯이”(서머셋 모옴) 각자 자신의 존재를 죽는 순간까지, 그것도 다양한 방식으로 직조해나간다. 학자들이 인간을 일컬어 “열린 존재”라 하거나, 또는 “가소성可塑性을 띤 존재”라고 말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동서양 각 문화 속의 다양한 인간상이나, 또는 각종의 종교적 인간관은 그 역사적 증거물들이며,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행하는 순간순간의 선택과 결단도 따지고 보면 우리들 각자의 ‘존재의 양탄자에 한 땀 한 땀의 수놓기’에 다름 아니다. 퇴계가 “천만의 갈래 길에 양주의 눈물” 운운한 것도 사실은 그가 인간존재의 이와 같은 미확정성과 가변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방으로 열린 존재의 길 가운데 향상의 길을 버리고 타락의 길을 택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개탄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완성적인 존재를 어떻게 수놓아나가고 있을까? 그 세부적인 내용과 방식은 사람에 따라 다양성을 보이고 있어서 일률적으로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현금의 사회에 만연한 인간관의 한 유형을 본다. 소유 지향적인 인간관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제일명제는 “나는 소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소유로써 채워 완성하고 또 그것으로 자긍하려 한다. 이 때 소유의 대상은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이 남들 앞에서 과시하고 행세할 수 있는 힘이면 무엇이든 소유의 대상이며, 여기에는 권력이나 명예도 당연히 포함된다. 이러한 힘에의 의지가 사람들의 삶을 끊임없이 지도하고 조종한다. 그들의 배금주의拜金主義는 양심을 뒷전으로 한 채 온갖 부정과 부패를 마다하지 않고, 권력의지는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살상하는 광란과 폭거를 자행하기도 하며, 명예욕은 절친했던 우정도 하루아침에 원망과 욕설로 바꾸어버린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힘이야말로 사람됨(존재)의 평가척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힘을 크게, 많이 가질수록 그는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힘은 과연 믿을만한 것이며, 사람됨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힘의 원천인 권력과 부와 명예는 득실이 무상한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주어지는가 하면 이내 박탈당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항상 근심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 사는 커다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들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고심하고, 얻고 난 뒤에는 또 잃지나 않을까 걱정”(『논어』)할 수밖에 없겠기에 말이다. 이는 근원적으로는 그들이 그들의 존재 밖에 있는 것을 소유하려 하는 데에 기인한다. 만약 그것들이 그들의 존재에 본질적인 것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그들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질(사랑과 의로움의 정신)을 비본질적인 것(부귀공명)과 대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하면 얻으리라.…구하는 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구한다 해서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구하는 것이 내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 안에 있는’ 것의 실현보다는 ‘내 밖에 있는’ 것의 획득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내 밖’의 부귀공명의 소유를 위해 ‘내 안’의 존재를 과감히 포기하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는 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소외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칼 맑스의 이른바, “존재의 절대 빈곤”을 겪을 수밖에 없다. 존재와 소유의 반비례 원리상 그들의 소유 감각이 존재에의 의지를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학자로서 훌륭한 명예를 얻었음에도 늘그막에 자기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려 했던 것도 사실은, 명예로는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빈곤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유의 풍요를 얻었음에도 무언가 공허감을 면치 못하는 것 또한 근원적으로는 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방황 끝에 뒤늦게나마 존재의 안식처를 찾은 파우스트와 달리, 어리석게도 그러한 자신들을 회의할 줄 모르고 줄기차게 존재의 허기를 부귀공명으로만 채우려 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천국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풍요를 얻은 자를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세를 기다릴 것도 없다. 사랑과 의로움으로 사는 사람의 풍요로운 존재의 삶은 그 자체가 천국이요, 부귀공명의 갈망 속에서 ‘내 밖의’ 세계만 헤매는 존재의 빈곤은 지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성질을 띤 소유의식은 남들과 대립 갈등을 일으키면서 암암리에 인생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여기게 될 것이며, 남들에 대해 갖는 부러움과 질투심은 목표물을 남들보다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자기 안에 비열한 인간성을 키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타간 공동체적 유대감보다는 단독자적 고립과 불안의 감정에 빠져들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한없이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지옥과도 같은 삶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와는 반대로,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내 존재의 소명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자문하는 사람은 부귀공명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의 저와 같은 의문 앞에서, “부귀는 허공중의 연기나 다름없고/ 명예는 이리저리 나는 파리와도 같은 것”(퇴계)으로 여겨지겠기에 말이다. 어느 유학자儒學者는 말한다. “자신의 존재 내부에 참으로 귀한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부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부귀를 쫓아 남들의 환심만 얻으려 할 것이다.” 그러면 삶의 의미를 충만케 해줄 존재의 소명은 무엇인가? 선비철학 상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역시 진리와 도의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는 진리와 도의를 추구하지 먹고사는 일을 추구하지 않는다.…군자는 진리와 도의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논어』). 그가 추구하고 또 걱정하는 진리와 도의는 물론 책상머리나 또는 강의실내 언어문자 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실천됨으로써 그의 사람됨을 향상시켜주고 풍요롭게 해줄 인간의 참다운 존재양식이다. 이와 같이 존재를 지향하는 사람이 선비라면, 성인聖人은 자신의 존재를 성취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러한 사람을 세 분 내놓았다. 석가와 공자와 예수가 그들이다. “인류는 형제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사는 이웃[民吾同胞 物吾與; 퇴계]”이라는 생각 속에서 가졌던 바, 인간과 만물을 존재 깊이 품어 안는 그들의 우주적 대아는, 그들이 먼 옛날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남아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삶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고 테레사 수녀가 “성자聖者”로 추서된 근거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비록 세속적인 힘 무엇 하나 소유한 것이 없었지만, 더할 수 없이 드넓은 존재의 품안에 인류를 사랑으로 아우르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성현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존재의 풍요로움은, 세상을 휘두르는 힘을 소유하고도 사람됨에 있어서 평가절하를 당하고, 또 죽음과 함께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마는 소유 지향적인 사람들의 존재의 빈곤함과 잘 대조된다. 그렇다고 해서 선비가 부귀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퇴계는 말한다. “부귀富貴와 복택福澤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려는 것이요, 빈천과貧賤과 우환憂患은 나를 옥처럼 아름답게 완성시켜주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삶의 풍요’란 화려하고 풍족한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도의의 사회적 확대 실천을 함의한다. 진리와 도의로 박시제중博施濟衆할 때 나의 삶은 더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부귀복택富貴福澤’도 여기에서만 의의를 갖는다. 맹자가 임금들에게 그들의 부귀를 “저 혼자만 즐기려[獨樂]” 하지 말고 “백성들과 함께 즐길 것[與民同樂]”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다. 이는 선비의 정치사상에 백성들과 진리와 도의를 함께 하려는 정신이 올올이 배어 있음을 암시한다. 맹자의 웅변을 들어보도록 하자.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사랑]에서 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른 자리에 서며[예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길[의로움]을 걷나니, 뜻을 펼 기회가 주어지면 만민과 더불어 그것을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이라도 그 길을 가리라. 부귀도 이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이 뜻을 변절시키지 못하며, 권세나 무력도 이 뜻을 꺽지 못할 것이니, 이를 일러 대장부大丈夫라 한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그러나 선비의 진리 수행의 이념은 현실 정치사회의 벽에 부딪쳐 뿌리를 내리기가 어려웠다. 이해득실과 권모술수가 지배하기 마련인 정치사회의 현장에서 그는 끊임없이 ‘악화惡貨’의 구축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비로 하여금 벼슬길에서 물러나게 하는, 어쩌면 예정된 수순을 밟게 만들었다. 이어 그가 만나는 삶의 상황은 역시 가난이었다. 퇴계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과 궁핍은 선비의 일상사인 것을, 개의할 일이 또 무엇 있겠느냐. 네 아비는 그 때문에 남들로부터 웃음을 많이 샀다만, 꿋꿋이 참고 순리대로 처신하면서 스스로를 닦으며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지만 선비가 그렇게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진리와 도의로 “스스로를 닦으며 하늘의 뜻을 기다렸던” 정신은 그를 “옥처럼 아름답게” 완성시켜주면서 사회에 빛을 뿌려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의미 있고 가치로운 것인가를 자신들의 실천 속에서 무언으로 깨우쳐주었던 것이다. 『주역周易』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은 곤고하지만, 네가 지키는 진리는 세상을 형통케 하리라[身否道亨].” 선비의 청빈淸貧사상은 바로 이러한 존재 지향의 정신을 깊게 담고 있다. ‘청淸’은 존재의 맑음을 뜻하며, ‘빈貧’은 그와 같은 존재 지향의 삶이 결과하기 마련인 소유의 가난을 함의한다. 진리와 도의의 수행 속에서 존재를 맑히고 순수하게 하려는 삶의 정신은 아무래도 소유에의 관심을 적게 가질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뜻이 또한 여기에 있다. 이는 선비가 가난 자체를 편히 여겼음을 뜻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고 도의를 실천하는 삶의 즐거움이 가난의 고통을 잊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어떤 학자는 선비의 청빈을 나약한 생각이라 여기면서 대신 청부淸富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존재[淸]와 소유[富]의 반비례성에 대한 몰이해의 소치일 뿐이다. 아래에 서경덕徐敬德(號 花潭: 489-1546) 의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젊어 글 읽을 시절에는 세상의 경륜에 뜻을 두었지만         讀書當日志經綸 늘그막에 이르니 안자顔子의 가난이 도리어 좋구나         晩歲還甘顔氏貧 부귀는 다투는 사람 많으니 손 내밀기 어렵고                     富貴有爭難下手 숲과 샘은 막는 이 없으니 몸 편안히 할 수 있어라          林泉無禁可安身 산나물 캐고 낚시질하여 그런 대로 배를 채우고                  採山釣水堪充腹 달을 노래하고 바람 읊조리며 정신을 소요한다          詠月吟風足暢神 배움이 회의懷疑를 넘어 쾌활함을 알겠으니                學到不疑知快活 인생 백년 헛된 삶은 면했어라                          免敎虛作百年人 가난을 찬송하는 듯 한 그의 이러한 삶은 일견, 나쁘게 생각하면 그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좋게 평가한다 해도 초연함을 가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세상의 경륜”에 관해서는 공부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인생을 경영할 능력조차 갖지 못하여, 체념 속에서 인생을 달관한 듯이 자기 호도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리행위를 마치 “기름으로 옷을 더럽히는 짓”(蘇齋 盧守愼; 1515-1590)처럼 여겨 혐오했던 선비의 결벽스러운 정신은, 부귀는 고사하고 이해관계로 얽힌 현실의 삶에 “손 내밀기 어려운” 무능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다운 능력으로 따지자면 가난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도의를 수호하려는 정신만큼 이 세상에 강인하고 창조적이며 위대한 힘은 없을 것이다. 산림山林의 가난한 선비 한 사람이 왕비 열 명을 누를 기개를 가졌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선비가 임금 앞에서 그렇게 당당했던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었다. 조식曺植(號 南冥: 1501-1572)이 상소문에서 명종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면서, “임금은 나이 어린 고아요 대비大妃는 구중궁궐에 갇힌 과부”라고 독설을 퍼부은 것도 저러한 기개의 발로였다. 다른 한편 생각하면 자기의 삶을 유능하게 경영하면서 동시에, 진리와 도의를 수호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자는 전자의 희생 위에서만 성취 가능한 일이겠기에 말이다. 맹자는 말한다. “부자는 사랑을 모를 것이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다.[爲富不仁 爲仁不富].” 오늘날의 일을 예로 들어보더라도, 소수의 독실한 종교인들이 존경스럽게도 자선과 사회의 구원에 헌신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삶을 경영할 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는 삶의 소유보다는, 사회의 구원이야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이요 존재의 소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에 대해 양자를 겸전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역시 “부자가 천국 가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화담의 시나 선비의 결벽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우리들의 소유 지향적인 인생관의 투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그에 대해 일말이라도 공감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존재 지향의 염원이 감발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소유를 지향하면서도 또한 누구나 ‘존재’를 그리워한다. 그리하여 존재 지향의 삶을 사는 선비정신은 그들에게는 어두운 삶의 길을 안내해주는 빛이요, 그들 존재의 안식처가 되었다. 퇴계가 선비를 “나라의 원기”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또한 말한다. “맹자의 말씀에, ‘선비는 뜻을 숭상한다’고 한다. 선비가 무엇을 숭상하느냐에 따라 세상의 타락과 융성이 좌우되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그 구체적인 사례를 한 가지 인용해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어 청빈사상의 보편적 의의를 미국의 실용주의자였던 W. James의 말을 통해 들어보도록 하자. 언젠가 큰 눈이 내린 날이다. 사경士京이 자기 집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당시 정승이 된 지 오래였건만 방안에는 바람을 막는 병풍 하나 없더구나. 홑이불이라고 있는 건 헤어졌고, 자리 곁에는 몇 권의 책이 있을 뿐이었다. 옛날 안성에서 포의布衣로 지낼 때와 똑같더구나. (중략) 날이 샐 무렵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의 폐단을 없애는 방안이었는데, 이야기 도중 문득 탄식을 하면서 자신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하기도 하였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내 생각으로는 전쟁을 압도할만한,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인 것을, 다소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 같이 보일는지 몰라도, 우리는 옛날 수도자들이 누려온 청빈사상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중략) 오늘날 우리에게는 새삼스럽게 가난을 위한 찬송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중략) 모든 일마다 성급하게 달라붙거나 혹은 돈을 탐내서 허둥지둥 대거나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생각이 모자란다고 하거나 명예욕이 없다고 비난을 하지만, 나로서는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새삼스럽고 진지하게 숙고하도록 권장하고 싶다. 참으로 교양 있는 사람들까지도 맹목적으로 가난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현대인이 시달리는 최악의 도덕적 병폐이다.(진교훈, 「철학적 인간학에서 본 문화의 이념」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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