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 |
[서평] 도시의 기억
관리자(2008-04-18 15:40:20)
낯선 도시 위에 선
어느 ‘이방인’의 시선
이휘현ㅣ전주KBS방송총국 PD
글쟁이 고종석
나는 ‘글쟁이’ 고종석을 좋아한다. 물론, ‘-쟁이’라는 어미가 가진 폄훼의 뉘앙스가 ‘좋아 한다’라는 서술어와 호응하기 힘들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허나 적어도 나에게 ‘쟁이’라는 말이 ‘글’이라는 것과 만나면 그건 최대의 찬사가 된다. ‘글쟁이’에서의 ‘쟁이’는 어떤 숙명의 느낌이 진하게 배어있을 거라는 내 주관 탓일 게다. 나도 한 때는 정말 좋은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글로 밥값 하겠다던 내 계획은 어긋났다. 그게 결과적으로 나에게 해로운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로운 것이었는지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저 현재에 충실할 수밖에! 그래도 미련은 남아서 좋은 글을 읽는 것으로 못다 이룬 인생의 꿈을 채우고는 하는데, 그때 나에게 좋은 양식이 되어주는 게 바로 고종석의 글이다(이것도 내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고종석은 이 나라에 글 팔아서 제대로 밥값하는 탁월한 글쟁이 중에서도 그 봉우리에 올라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깔끔한 문장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무엇보다도 독자인 나를 매혹시킨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매번 정답일 수는 없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서는 일관되게 보여 지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진정성’이다. 밥벌이를 위해 부지런히 책을 펴내고 있는 그의 글들이 식상함의 함정을 피해 매번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그의 글에 고종석이라는 한 지구인의 진정성이 짙게 배어있는 덕일 게다.
고종석이 얼마 전에 펴낸 책 『도시의 기억』도 그런 일관된 진정성의 연장선상에 있어 보인다. 한반도를 벗어나 자신이 발자국을 남겼던 여러 도시들에 대한 기억을 담담하게 풀어놓은 이 책은,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그 동안 저자가 펴냈던 사회비평집과 소설들의 ‘글로벌 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석의 이성(理性) : 도시의 고갱이를 엿보다
서점에 가보면 외국의 이런저런 유명 도시들에 관한 책들이 즐비하지만, 그 내용들이란 개인의 지극한 감상 차원이거나 해외여행에 대한 욕망의 대리충족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걸 다 싸잡아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도시의 고갱이를 보지 못하고 뻑쩍지근한 외면의 광휘에 휘둘리는 것은 그저 “나는 이런 곳에 가봤다”라는 허영의 빈 곳을 채워주는 데에 그치고 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고종석이 『도시의 기억』의 머리말에 써놓은 글은, 고종석의 이 해외 체험 수기가 기존의 책들과 차별화 된 지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도시들은 닮았다. 그러나 닮았으면서도 엄연히 다르다. …… 특정한 도시의 공간은,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내면 속에 ‘세계화’의 동화력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어떤 고갱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도시들이 제가끔 겪은 역사의 중량 덕분이다. 역사의 울타리 속에 간직된 그 고갱이가 서울을 서울로 만들고, 서울 사람을 서울로 만든다. 나는 세계화로 환원되지 않는 그 고갱이를 그 도시의 ‘영혼’이라 부르려 한다.’
얼마 전 국보 1호 남대문이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했을 때, 대한민국 사람의 상당수는 그 광경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건 남대문이 단순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건물이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숨결’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우리들의 무의식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남대문이 사라졌을 때 우리들 마음 속 하나의 영혼도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고종석의 말마따나 어느 도시나 세계화의 블랙홀에 빨려들지 않는 그 도시만의 독특한 고갱이가 있는데, 우리는 그 고갱이에 하나의 큰 상처를 입은 셈이다.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은 ‘해외 체류’라는 개인의 경험 위에 그 도시의 숨결을 입혀놓았다. 그게 자유의 공기이건 혹은 억압과 상처의 공기이건 말이다. 따라서 그의 글을 읽는 우리는 그 도시의 외면을 훑는 관광객이 아니라 그 도시의 내밀한 구석을 조망하는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그런 이방인의 시선을 통한 그 도시의 고갱이는 우리 스스로를 비추게 되는 것이다. 모로코의 탕헤르도, 오스트리아의 빈도, 일본의 오사카도, 미국의 보스턴도 고종석의 섬세한 눈길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그렇다고 이 책을 교양으로 철저히 무장한 이성(理性)의 산물로만 보지는 말자. 이 책의 곳곳에는 ‘인간 고종석’의 내밀한 속마음들이 많이 흩어져 있으니 말이다.
고종석의 감성(感性) : 청춘을 회고하다
어떤 특정한 공간은 그 곳에 부여되는 특별한 기억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다. 30대 중후반의 5년 가까운 세월을 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고종석에게 유럽의 도시, 특히 파리는 그의 모국 대한민국에서는 흡입할 수 없었던 자유와 낭만의 공기를 배부르게 선사하지 않았을까.
‘서울에 견주어 워낙 작은 도시이기도 했지만, 파리는 걷기를 유혹하는 도시였다. 오밀조밀한 볼거리들만이 아니라, 그 도시의 공기 전체가 걷기를 유혹했다. 그 공기는 아마 내가 상상 속에서 재구성한 이 도시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었다.’
이 책 『도시의 기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유럽 도시들에 대한 고종석의 감상은, 내 주관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가뭇없이 흘러가버린 청춘의 서글픈 뒷모습을 쓸쓸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쓴 회고록 같기도 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날들에 대한 가슴 절절한 회한! 베오그라드라는 도시를 회억하는 그의 마음 한 자락에서, 나는 그 서글픈 낭만의 한 자락을 읽는다.
‘베오그라드는 ‘하얀 도시’라는 뜻이라 한다. “어디가 하얗다는 거지요?” 3월의 어느 오후, 칼레메그단에서 베오그라드를 눈에 담으며 내가 스베틀라나에게 물었다. “하양은 당신 마음 속에 있지요.” 그녀가 지혜롭게 대답했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분들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사족 하나 남긴다. 『도시의 기억』을 읽을 때, 고종석의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 1993)과 『고종석의 유럽통신』(문학과지성사, 1995)을 세트 메뉴처럼 함께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청년’ 고종석이 선사하는 이성과 감성의 교차로가 좀 더 넓고 풍성한 풍경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휘현/ 전북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현재 KBS 전주방송총국에서 PD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