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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 |
[빠른 행보 속의 유유자적(悠悠自適)을 꿈꾸다]
관리자(2008-04-18 15:39:52)
빠른 행보 속의 유유자적(悠悠自適)을 꿈꾸다 - 구혜경ㅣ문화기획자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예술에 대한 비중은 어느 정도 차지할까. 미디어 속에 살면서 멀티 플레이를 요구하는 우리들에게 예술에 대한 감상을 강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 비해서 예술은 다양한 형태로 확대되어 생활 속으로 들어와 있지만 여전히 문턱은 높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 역시 부지런을 떨며 수시로 들락거리던 전시장을 언제부턴가는 요령을 부리며 구미에 당기는 전시만 골라보거나 우선순위에 밀려 차츰 소외시키기도 한다. 이는 한 개인의 애정이 결여된 무관심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전시가 일정 기간을 두고 늘 반복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감상의 즐거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디게 변화하는 지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많은 다양성을 기대하는 것이 약간의 무리는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있기에 대중들은 관심의 끈을 놓지 않게 되고, 가까운 시선에서 변화의 과정을 확인하는 기쁨도 받게 된다. 한 작가의 작품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지켜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빠른 행보를 걷다 작가 이정웅은 지난해 연말에 반영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시상과 함께 전시하는 관례가 있지만 새로운 작품으로 선보이기 위해 석 달을 미루어 전시를 마련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새로운 이미지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결과를 낳았고, 그 이면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예술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가시적으로 보이는 변화된 작품세계는 두 번 정도 더 있다. 이 작가를 알게 된 것은 7·8년 전 거칠게 마티에르가 있는 화면위에 화사한 꽃이 표현된 작품을 보면서부터다. 야생화를 주제로 조형성을 강조한 반추상적인 작품이라서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의도보다는 꽃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나 ‘꽃 그림 작가’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작가로서는 안정된 행보를 하는 시기였다.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적절히 만족시켜주고 있어서 하나의 완성된 자기 세계를 마련함과 동시에 후배 작가들에게도 꽤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공백 기간을 가지고 다시 세상에 들고 나온 작품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책’이라는 매체를 활용한 것이다. 책이라는 소재가 그동안 많은 작가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루어져 왔지만 켜켜이 쌓여 있는 책의 옆면을 추상에 가까운 색면과 선을 통해 내면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신선한 시선이었다. 또한 그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시장 한 쪽을 가득 메울 만큼 많은 책들을 자유롭게 쌓아서 작품의 모티브가 된 책의 옆면을 고스란히 보여주었고, 일부분은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 색면과 책을 통해 자연 발생한 조형적 시각을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책 속에 담겨져 있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와 문자의 의미들은 페이스트리처럼 한 장 한 장 쌓아 함축시킨 채 완전한 추상으로 전달된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리듬을 타듯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정한 템포를 가지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기에도 자신을 단련시키며 고민하고 연구하여 지속적인 변화를 모색한다. 두 번의 변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작가의 예술에 대한 속내를 조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다음에는 어떤 변화를 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심리도 자극되었다. 유유자적을 꿈꾸다 무수히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 책을 통해서 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고민하는 거듭된 과정은 정신성에 대한 것으로 귀결되어 문인이 여기(餘技)로 그렸던 ‘문인화’의 시각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는 키워드는 작가가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문인화적 요소와 결합하여 동양적 미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서양의 재료로 문인화가 가능할까라는 관심과 호기심은 재료에 집착하지 않고 책이라는 매체와 함께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책의 집적된 표현과 함축된 조형성을 만들어낸 화면은 책 속에 담겨 있는 문자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화려한 색채로 조형화하였고, 채근담이나 성경구절 등 작가의 감성을 자극하는 구절은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문인화의 현대적 변용이 이루어졌다. 추상에서 형상을 찾아가며 자연스럽게 결합된 문인화적 시각이 자유로운 소통을 위한 매개의 역할을 하며 대중들과 공통의 분모를 만들게 된다. 현대인들에게 전달되는 문인화의 이미지는 고리타분한 옛 그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동양의 정신성과 미감을 새로운 시각으로 나타냄으로써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여유와 무한세계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이정웅의 작업세계는 시각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연결고리를 가지며 이전의 작업을 바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빠른 행보를 한 것이다. 그 행보 속에서 문자가 전달하는 내용적 의미와 색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형상의 이미지는 대중들과 함께 유유자적하고자하는 작가의 진심을 담아내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의지에서 다음 행보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기대가 된다. 구혜경/ 원광대에서 한국화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신갤러리 큐레이터, 원광대미술관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현재는 공공미술과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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