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 |
[문화시평] 한국현대판화의 흐름전
관리자(2008-04-18 15:39:09)
오늘의 판화에 보내는 ‘슬픈’ 애정
-정미경ㅣ화가
『한국현대판화 흐름』전은 서구적 기법을 이용한 현대 판화가 도입된 1950년대 작품부터, 작가의 의욕적인 조형 실험이 작품 속에 도입되고 다양한 판법들이 만들어 지는 1960~1970년대의 작품들. 질적 양적변화가 두드러지게 많아지면서, 일반대중의 관심 속에 판화의 대중적 교감이 이루어졌던 1980~1990년대 작품들. 그리고 판화의 정통적인 기법 외에도 컴퓨터, 인쇄, 복합매체를 이용한 다양한 판화종류들을 볼 수 있는 대규모의 전시였다. 이렇듯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 판화의 흐름과 역사 그리고 오늘 현대 판화의 새로운 동향 까지 자연스럽게 관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전시였다. 또한, 현대 판화가 협회 회원으로 1980~1990년대의 작업 현장에 있었던 나에게도 이 전시는 새로운 감흥과 더불어 판화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추어지게 하였다.
최근의 판화는 정통적인 형식과 더불어 다양한 판화 방법들이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그 이전과 비교해서 판화의 침체기라고 한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대중, 화랑 등의 판화 작품에 대한 인식 부족도 한 부분 이었을 것이다. 판화의 복수성은 다른 미술 작품보다 대중적 친화력을 가질 수 있는 장르 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장을 인쇄 매체처럼 쉽게 찍을 수 있을 것이라는 대중의 인식 때문에 타 장르만큼 예술적 가치를 보장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또, 1980년대 말부터 판화가 대중적 관심을 받으면서 판화시장이 활성화되자, 일부 화랑과 연계된 공방들이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쉬운 복제 판화형식으로 찍어낸 작품들이 유통되면서 판화가들의 수 공정에 의한 제작방법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공방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판화와 오랜 시간 판화고유의 조형적 표현효과와 깊이를 가지고 직접 판을 제작하고 찍어냈던 판화가들의 작품 중에서 일반대중들은 이름 있는 화가들의 복제판화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화에 대한 일부 화랑과 대중의 인식부족은 작품성 있는 판화보다 쉽게 유통할 수 있는 판화들이 판화 시장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판화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판화가들은 수많은 공정을 들여 회화와는 다른 독특한 조형실험에 몰두하고자 했던 제작방법에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 직접 찍어내는 것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실제로 잘 팔리지도 않고, 대중의 인식도 좋지 않는 판화 작품을 위해서 여러 장을 만들기 위한 그 많은 공정을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 중에는 전문적인 판화 공방을 이용하여 조금 더 편한 작업을 하는 판화가도 있었지만, 소수의 이름 있는 작가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좋은 작업을 했던 많은 판화가들이 하나 둘씩 다른 장르의 작업으로 옮겨 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지켜봐야했다.
이러한 판화의 내부적 현실 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작품을 해왔던 판화가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판화가 지나치게 상품화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현대미술 속에 정확한 의미와 위치를 찾으려는 노력들이 하기 시작한다. 정통적인 기법에 충실하면서 판화 규모를 확대하려는 시도는 먼저 판화의 대형화에서 이루어진다. 기존판화는 판을 찍을 때 사용하는 프레스라는 기계, 찍는 종이, 판 크기 등의 한계로 작품크기가 제한 받곤 했는데, 대형작품에서는 여러 작품들을 모아서 만들거나 부분적으로 다른 판종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프레스나 사용하지 않거나 직접 판을 새기지 않을 때는 훨씬 크기의 제한을 받지 않아도 됐다. 이러한 판화의 대형화는 기존 판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제한적 표현방법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는 판종의 혼합과 새로운 판종의 모색으로 이어지면서 판화 표현의 경계를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판화의 표현영역을 확대하려는 노력 속에 2000년 이후 현대판화 신세대들은 공정의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판화 외에도 특정이미지를 ‘찍어낸다’ ‘전사한다’ 등의 판화의 기본개념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면 모두 판화의 범주에 넣고자 한다. 판화의 이러한 확장개념은 한 장만 찍을 수 있는 모노프린트에서부터 현대매스미디어의 산물인 복사미술, 복제미술, 디지털프린트, 레이저 컷팅, 그리고 부분적으로 판화기법을 차용한 것, 캐스팅, 모올딩 등 조각의 방법은 물론이고 설치의 형식으로까지 확장시켜 나간다. 이들에게 현대 정보사회의 소통의 장인 매스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복제가, 또 요즈음처럼 빠른 속도감을 느끼는 시대에 이미지를 직접 판에 새기고 찍는 복잡하고 긴 공정을 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쉽고 자유롭게 복제할 수 있는 판화형식이 분명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 신세대에겐 순수예술로서의 판화를 교묘한 인쇄물로부터 보호하려는 오리지널 판화에 대한 규정보다 자신이 원하는 예술적 언어를 갖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자유로운 표현형식과 매체를 차용해서 쓸 수 있는 판화형식의 확대가 더 의미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장르간의 구분이 불분명해진 시대에 판화영역의 고수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적 판화 작업에 애정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판화 외연의 확대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또 이것이 예술성 확대를 통한 대중적 교감을 위한 것인지? “판화를 보러 갔더니 설치작업, 페인팅, 조각 작품이 있더라” 는 판화개념에 대한 대중과의 인식의 차이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의 복잡 미묘한 생각들이 겹쳐진다. 전보다 더 자유롭고 다양한 판법이 존재하는 오늘의 판화임에도 타 장르보다 위축 되고 있는 판화의 현실이 이러한 생각들을 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 또한 현대판화가 소수의 예술적 자유의 향연이 아니라 좀 더 대중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것이 많은 판화 제작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매체를 수용해서 작업하는 신세대 작가들의 자유로움과 당당함에 부러움을 느끼며, 또 판화의 고단한 공정과 표현형식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오늘의 판화 현실 때문에 슬픈(?)애정을 보낸다.
정미경/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40여회의 단체전 및 개인전을 통하여 판화와 서양화를 전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