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 |
[이종민의 음악편지] 숙명가야금연주단 제5집
관리자(2008-04-18 15:30:31)
다시 음악편지를 엮으며
부끄럼 무릅쓰고 다시 음악편지를 책으로 엮습니다.
자기 전공분야도 아니고 반기는 이도 거의 없는데 고집스럽게 음악편지를 써나가는 제 모습이 이따금 괴이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책으로 묶어 내다니……. 영문학 전공자가 동학농민혁명이든 전통문화든 다른 분야의 일에 열중하다 보면 ‘영문 모르고 나댄다’고 쑤군대는 소리 듣게 마련인데 여기서도 그 비아냥거림은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영문 모르고’라는 별호가 달갑지 않은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 전공에 갇히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상아탑주의’를 벗어나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활동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분업화는 효율성 부분에서 분명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만 믿고 한 우물만 파는 것은 좁은 관을 통해 하늘을 보는 어리석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정심에도 어긋나는 일이고요. 제가 어쭙잖게 ‘비판적 아카데미즘’을 내세우며 지역학술운동에 열심이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좀 거창해짐 김에,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음악편지쓰기가 일종의 경계 넘어서기(crossover)라고. 문학과 음악의 혼융(fusion), 그 비빔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는 일이라고.
취업이 어렵다는 요즘 저는 학생들에게 이런 경계 넘어서기를 권하곤 합니다. 주어진 직업을 찾지 말고 몇 가지 전공을 혼융하여 새로운 직업을 스스로 창출하라고. 물론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직업, 예를 들어 대기업, 공사, 공무원, 교사, 각종 고시 등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너나없이 이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선택은 쉽지만 통과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경쟁률이 높으면 그 성패를 운수소관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날고 기는 사람들이 모두 나섰으니 사소한 실수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퇴로가 여의치 않다는 것입니다. 한 우물에만 매달리다보니 운이 따라주지 않아 물러나려 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여러 가지 장기(전공)을 뒤섞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일은 다양성도 열려있고 그 성패도 자신의 노력과 창의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운명의 선택에 매달리지 않고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음악의 영역에서 도드라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분야에서도 쟁쟁한 고수들이 있어 수많은 도전을 좌절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 전공자 중에 글쓰기까지 잘 하는 이는 드뭅니다. 시인이나 소설가 중에 음악에 조예가 있는 분도 흔치는 않습니다. 틈새가 있는 것입니다.
음악편지는 그 틈새의 어딘가를 노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어려서 악기 하나 익히지 못한 사람이 음악전문가를 꿈꿀 수는 없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와 톨스토이를 만나면서 소설가의 꿈은 접은 사람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워즈워드나 예이츠를 읽으면서 계속 시인의 꿈을 키워가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와 집념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꿈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 일. 음악편지가 그 대체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략적이지도 않았고 꿈의 대체물을 꿈꾼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즐겨듣는 곡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음악 얘기만 하려니 비전공자로서 좀 자신이 없었습니다. 주제넘은 짓이라는 걱정이 발목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이야기를 변방으로 끌어냈습니다. 다른 이야기와 섞어 그 약한 고리를 은폐한 것입니다.
새로운 맛을 창출하는 비빔밥의 묘미. 속으로 그런 것을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공여부가 주 관심사도 아니지만 판단하기도 쉽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기준치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다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제가 음악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약한지를 새록새록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더 진지하게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깨침을 통해 더 열심히 음반을 모으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기왕 읽었던 글들도 다시 들여다보며 그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된 것도 음악편지를 쓰며 얻은 소중한 수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매년 1,000만을 모아 북한어린이들에게 콩우유 원료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보람이라 할 것입니다. 제가 책을 내려는 것도 그 동안 이 모금운동을 함께 한 이들에게 감사드리기 위한 것이요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기도 합니다. 이 자리를 빌러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 전합니다.
그리고 묵묵히 제 음악편지를 받아준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사실 그 분들이 없었다면 이 편지쓰기는 지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음악 하나 올립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아다지오를 해금과 가야금 이중주곡으로 편곡한 것입니다. 해금은 강은일, 가야금은 숙명여대 고지연교수가 맡아 편곡과 연주를 함께 해주었습니다. 대략 피아노 부분은 가야금이, 관현악단 부분은 해금이 연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정취가 원곡과 사뭇 다릅니다.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음반으로 만들어진 숙명가야금연주단 제5집 [러블리 가야금](Lovely Gayageum)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 음악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오늘날 서양 고전음악을 우리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그 성과는 여전히 밍밍합니다. 자칫 우리 악기의 부적응성만 부각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해금과 가야금의 장기를 잘 되살리고 있는 이번 연주는 그 모범적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금과 가야금의 조화, 이 곡 들으시며 사랑하는 이와의 정겨운 봄나들이 꿈꿔보시기 바랍니다.
이종민ㅣ전북대 교수·전주전통문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
※ http://e450.chonbuk.ac.kr/~leecm로 접속하시면, 그동안의 음악편지와 음악을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