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 |
[허철희의 바다와 사람] 실金장어
관리자(2008-04-18 15:30:02)
사라져 버린 ‘실金장어’의 꿈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라는 서정주의 시가 있다.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취하지는 않더라도..., 선운사 고랑의 그 맛좋은 풍천장어 맛에 취할 수 있다면 동백꽃 못 본 것은 그리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장어구이..., 양념이 쏙쏙 배어 불과 연기에 노릇노릇 익은 것을 한 입 가득 넣으면 입속에서 그대로 녹는 듯 씹히는 맛이며, 코 끝에 살랑살랑 닿는 장어살 특유의 고소한 향이 뭇사람들의 입맛을 단단히 사로잡는다. 게다가 맛도 맛이지만 비타민A와 E, 그리고 DHA 등을 듬뿍 함유하고 있어 몸에도 좋다. 주말이면 이러한 맛을 찾는 사람들로 선운사 고랑은 붐빈다. 예부터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유럽에서도 뱀장어는 고급요리에 들며 인기 또한 높았던 듯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장어를 잡아둔 연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의 상징으로 여겼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7월 말 복날을 ‘뱀장어 날‘이라 부를 만큼 뱀장어 요리를 좋아한다.
뱀장어 생태는 수수께끼
이렇듯 우리에게 친근한 장어는 그 산란과 성장이 비밀에 싸여 있어 일품인 맛에 신비로움까지 보탠다. 뱀장어는 연어처럼 바다와 강을 회유하는 물고기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새끼뱀장어는 바다에서 거슬러 오고, 가을에는 강에서 성장한 뱀장어가 번식을 위해 먼 바다로 나간다. 바다에서 산란한다는 점이 강에서 산란하는 연어와 다르다. 그러나 뱀장어 알이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오랫동안 뱀장어의 번식은 수수께끼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강바닥 진흙 속에서 뱀과 짝짓기 하여 뱀장어가 태어난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러한 수수께끼는 20세기 초에서야 비로소 풀리게 된다. 1922년 덴마크의 동물학자 요하네스 슈미트는 서대서양 사르가소 해역으로 이동하는 뱀장어를 추적해 부화 직후의 개체를 발견하여 비로소 뱀장어의 번식장소를 알아냈다. 번식을 위해 무려 5,000km나 이동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강에 사는 뱀장어도 같은 방법으로 필리핀 동쪽 해역에서 산란한다는 것을 지난 1991년 일본 도쿄대 해양연구소가 오랜 연구 끝에 밝혀냈다. 일본 도쿄대 해양연구소는 20여 년 동안 태평양 일대를 조사한 끝에 1991년 필리핀 동쪽 해역에서 생후 2∼3주된 길이 1㎝ 미만의 뱀장어 치어 댓닢뱀장어를 수백 마리 잡는데 성공했다. 이 연구소 츠카모토 교수는 동북아에서 3천㎞ 떨어진 마리아나열도와 필리핀 사이 서북 태평양을 뱀장어 산란장이라고 추정하는 논문을 <네이처>에 발표해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날 밤의 밀애
도쿄대 해양연구소 태평양 원정에 참여해 뱀장어를 연구해온 이태원 교수(충남대, 해양학과)는 뱀장어의 산란의 비밀을 한 꺼풀 더 벗겼다. 그가 이 원정에서 맡은 일은 마치 나이테처럼 뱀장어의 생활사가 기록된 이석(耳石, 모든 물고기가 뇌 뒤쪽에 갖고 있는 평형유지기관)을 분석해 산란 생태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미세한 뱀장어의 이석을 얇게 갈아서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이들이 묘하게도 모두 4월부터 6월까지 그믐날을 전후한 짧은 기간 동안 수정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뱀장어 한 마리는 수천마리씩 알을 낳는데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날 밤을 택해 산란하는 것은 다른 물고기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생존전략이리라.
뱀장어의 3,000km 대장정
동북아에서 3천㎞ 떨어진 필리핀 부근 번식지에서 갓 태어난 치어는 반년 동안 바다 위에 떠서 북적도 해류와 쿠로시오 해류에 실려 동북아로 이동한다. 이 시기의 새끼뱀장어는 부유생활에 맞게 대나무 잎처럼 납작하고 몸이 투명해 `댓닢뱀장어(렙토세팔루스)‘라고 불린다. 댓닢뱀장어가 부유해 대륙붕과 심해의 경계지역인 대륙 사면에 이르면 몸이 원통형으로 변태하면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해류와 조류를 타고 한반도 서. 남해안의 강을 거슬러 온다. 이 시기의 새끼뱀장어를 실뱀장어라고 하는데, 실처럼 가는 몸의 길이가 5~8cm 정도로 자라 있고, 반투명하며 두 눈만 까맣다.
이렇게 강으로 거슬러 온 실뱀장어가 자라 뱀장어가 된다. 뱀장어는 강에서 5~10년 정도 살다가 8~10월경 산란하기 위해 강에서 무려 3천㎞나 떨어진 태평양 한 가운데 자신이 태어난 곳까지 이동해 산란한 후 죽는다. 그리고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다고 한다. 참으로 신비하고도 장엄한 일생이다.
천금만금 안겨주던 실금장어
만경강이나 동진강 하구역은 강으로 거슬러 오는 실뱀장어의 길목이다. 실뱀장어가 회유해 오는 시기인 2월초~4월말까지 이 지역 어민들은 실뱀장어잡이로 천금을 올렸었다. 뱀장어의 산란이 이렇듯 신비의 베일에 가려있기 때문에 양식이 어려워 이 시기의 실뱀장어를 잡아다 양만장에서 가두어 기르기 때문에 양식용 실뱀장어의 가격은 그야말로 금값이 될 수밖에 없다. 올해 실뱀장어 가격은 1kg에 8~9백만원선, ‘97년 한참 가격이 좋을 때는 1kg 당 1천만 원을 넘은 적이 있다. 그 당시 금 1kg 가격이 1천2백만원 정도 했으니까 금값과 맞먹는 셈이었다. 그래서 한 때 ‘실금장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동진강 하구의 문포나 계화도 사람들은 하룻밤 벌이로 논 한 필지를 살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며 그 때를 생각하면 꿈만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실뱀장어 호시절’은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강을 거슬러오는 실뱀장어 개체수가 급격히 준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수질오염에도 원인은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나라 4대 강은 하구둑, 수중보 등으로 모조리 막혔다. 강다웠던 만경, 동진강마저 새만금끝막이로 막혀버렸다. 실뱀장어의 회유로가 모두 막혀버린 것이다. 20일 둘러 본 문포는 폐어촌이 다 되어버렸다. 이집 저집 기웃거려봤지만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포구에는 감척을 대기하고 있는 배들만 정박해 있고, 좀 먼 갯고랑에 실뱀장어 배가 몇 척 정박해 있었으나 역시 개점휴업상태,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실금장어와 함께 사람도 사라져버렸다. 뱀장어 생태의 비밀을 벗기지 못하는 한, 인간의 자연에 대한 간섭이 멈춰지지 않는 한 그 맛도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