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4 |
[최효준의 숨쉬는 미술이야기] 미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관리자(2008-04-18 15:29:01)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지난 호에서 그 도판이 실렸던 가로 세로 97cm, 추정가치 200억원의 로이 리히텐쉬타인의 <행복한 눈물>이라는 회화는 잘 그렸다는 느낌을 주는 그림은 아니며 감동을 주는 그림은 더더욱 아니다. 만화의 한 장면을 망점 구조가 두드러질 정도로 확대해서 모사한 이 그림 자체에 어떤 미학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그림은 많은 이가 똑 같이 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경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맥락에서 리히텐쉬타인이라는 작가가 그렸다는 것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희소가치인가? 어느 정도 그러하다. 그리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휘호나 마릴린 먼로가 입었던 드레스가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되듯 ‘메모러빌리아’로서 가치도 한 몫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 가치이다.
독자들은 ‘팝 아트’의 대표 작가 앤디 워홀을 아실 것이다. 2007년 삼성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 주로 젊은 층의 꽤 많은 관람객이 몰렸는데, 1993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렸던 개인전의 큐레이터였던 필자는 당시 스위스 소장가로부터 대여해 온 <브릴로 상자>라는 작품을 전시했었다. 1964년 워홀은 뉴욕의 한 갤러리에, 슈퍼마켓에서 파는 비누포장상자와 외양이 똑 같은 상자들을 쌓아 놓았던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물이 문득 예술작품으로 변모하는 현상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아서 단토라는 미학자는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미술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지각적 성질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과는 무관하게 이론적 조건만 갖추면 무엇이든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단토는 <브릴로 상자>에서 모던 미술이 추구하던 미술의 철학적 본질을 마침내 발견했고 이로써 지각적 성질에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 진보해 온 미술의 역사가 ‘끝’에 도달했다는 이른바 ‘미술종말론’을 제기하게 된다. 이제 미술의 역사는 끝났으며 미술사의 과제는 철학자의 손으로 넘겨졌다는 것이다. 60년대 말 개념미술가 조셉 코수스의 말대로 이제 미술가의 유일한 역할은 예술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 된 것이다.
재현으로서의 <브릴로 상자>는 내용과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종의 진술을 하는데, 슈퍼마켓의 브릴로 상자들은 그렇지 않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나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지각적인 ‘미’를 비지각적인 ‘의미’로 대체하며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예술가들이 ‘외관’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의미’의 영역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현대 미술은 미(美)를 의미(意味)로 대체한다. 워홀이 입증한 것은 알맞은 배경이 주어지고 적합한 이론작업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아마도 많은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전시장에 갖다 놓았다고 평범한 사물이든, 남자 소변기든, 배설물이 등 깡통이든, 동물의 사체든, 흐트러진 침대든, 산업폐기물이든 -이런 것들이 모두 유명 작가의 고가의 미술품이다- 모두 예술작품으로 변환될 수 있다는 그 논점에 반대할 것이다. 단토는 예술철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변화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했지만 독자들은 그러한 것이 거짓이요 지적 사기라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임금님을 향해 벌거벗었다고 외쳤듯이…….
전 시대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면서 이것은 예술행위이지만 저것은 예술행위가 아니라고 구별해줄 판단의 기준조차 소멸되어 버려 예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가능한 상태가 된 이 시대에, 쥴리안 스팔딩의 말대로 오늘날의 화가들은 원하는 대로 온갖 시각적 게임을 구사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강박적인 태도로 예술의 이름으로 앞 다투어 새로운 것을 제시하며 끝없이 ‘충격’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쓴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이 현대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시각 예술의 전부인가? 물론 아니다.
우선 스팔딩의 지적대로 예술(미술)이란 서구가 최근에 만들어 낸 발명품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거 사람들은 예술이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미술로 받아들이는 것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해야 하고, 모든 미술이 우리에게 감상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미술과 역사와 자기 인식에 대한 ‘현대적’ 생각을 모두 잊어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난 백여 년 전에 피카소가 그 점을 깨달았다. 아프리카 조각은 유럽인들이 이해한 의미에서 ‘미술’이 아니며 사람들이 혼령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무기였다는 점을 문득 이해한 피카소는, 그 무시무시한 곳(파리 민속학 박물관)에서 자신이 왜 화가인지 이해했으며 그 후 그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이 만들어졌다.
미술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사에서 말하는 그 많은 사조, 화파의 구분과 특징에 대해 오히려 무심해질 필요가 있다. 그보다 우리의 선인들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우리와는 아주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미술의 역사는 라스코 동굴 벽화로부터 치면 만오천 년이오 호주 원주민의 그림으로부터 치면 삼만오천 년이다. ‘현대 미술’의 이야기는 불과 백수십년, 상대적으로 아주 짧은 기간에 일어난 변화들에 관한 것일 뿐이다.
사실 어떤 사물, 어떤 형체를 보고 그것을 왜, 어떻게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되는지는 쉽게 설명할 수 없으며, 그런 것은 수만 년 인류의 역사를 관류하며 늘 거기 그렇게 반짝이며 엄존했던 순수한 경이와 신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스팔딩은 예술 작품과 그렇지 못한 사물의 차이는 오로지 그런 경이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평범한 사물이라도 전시장에 안치되면 예술작품이 된다는, 오늘 현대 미술을 떠받치는 우리의 위대한 예술철학과는 다른 관점이 아닌가? 독자들은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
현대 미술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편협하고 진부한 것도 사실이지만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을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권리를 가진 것은 대중이다. 스팔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이를 통해 팽팽하게 긴장된 예술가의 정신에 공감하고, 그들이 전달하려고 애쓰는 절실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과정이다. 인간의 눈, 보는 행위 속에는 여전히 신비의 별이 빛나고 있다.”
어떤 대상과 접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어 경이로움의 감정에 사로잡히고 그 경험을 다른 이와 나누거나 그것을 영속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힐 때 예술 행위의 가능성이 배태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 미술가가 될 수 있다. 만든 이가 대상과 합일을 이루고, 작품으로서의 문법을 갖추고 내용과 형식이 일치를 이룬 그 무엇을 창작해 내었을 때 그것은 빼어난 작품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 것이다. 현재 서울에서 열리는 앙투완 부르델 전에 전시되고 있는, 다섯 작품 중 가운데에 위치한 베토벤 상이나 로댕 상 같은 것은 작가가 가장 사랑하고 이해했던 대상, 그 존재의 본질이, 경이로움에 넘치는 보기(seeing이 아니라 noticing) 과정을 거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내용과 형식의 조화로 군더더기 없이 형상화되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기능과 동기에 상관없이 ‘예술적’인 오브제들은 모두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창작을 해내는 것이 이 시대 작가가 직면한 도전이다. 그것은 왜곡된 선입견과 오도된 인식과 잘못된 기심(機心)을 버릴 때 가능할 것이다. 대상과의 합일이나 경이롭게 보는 과정 없이도 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망에서 깨어나고, 현대 미술의 끝없는 혁신(?)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껴입게 된 강고한 혼돈의 껍질을 탈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스팔딩은 이 시대의 미술계를 일식(日蝕) 상황에 비유하였다. 이 일식의 어둠을 걷어 내는 일은 기성 미술의 혼돈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중들과, 그들과 소통하고 그들로부터 영감을 얻는 일군의 작가들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대중들은 그들이 내키지 않을 때, 미술관이 만들어내고 미술 제도가 추인하는 복잡한 철학의 갑옷을 뒤집어 쓴 ‘트렌디한’ 예술개념에 동조할 필요가 없다. 시류를 타지 않는 작가들과 만나자. 지방에는 그런 작가들이 숨어 있다. 지역의 미술관은 그런 이들을 드러내야 한다. 박물관에 가자. 사람 없는 유적지를 찾아 가자. 수천 년 인간 정신의 정화(精華)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가까이 있고 언제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자연(自然)이다. 티브이에 중독이 되어 ‘보는 눈’을 잃지 않았다면 자연은 경이로움의 보고이다.
마크 로스코의 구름이나 노을을 닮은 그림은 소유하려면 수백억 원이 들고 전시장 입장료로 몇 만원이 들지만, 그 미술품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저 하늘의 구름과 노을은 놀랍게도 무상(無償)이 아닌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자. 숲과 강, 바다를 보자. 몸서리치는 아름다움과 천변만화하여 숨을 멎게 하는 경이로움이 거기에 있다.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줄 아름다움, 미술도 거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변용한다. 어느 신학자의 말대로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최효준/ 서울대 상과대학에서 경제학 전공. 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영학 석사과정과 서울대 인문대학 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중퇴. 삼성미술관 수석연구원, 서울시립미술관 수석큐레이터를 지냄. 2004년 5월부터 전북도립미술관장으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