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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4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관리자(2008-04-18 15:28:00)
정읍시 덕천면의 달천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조그마한 동네에는 정읍 농악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분이 살고 있습니다. 소고놀음의 대가 김종수 씨입니다. 김종수 씨가 소고를 처음 잡은 것은 열두 살. 사촌 매형이었던 김병섭 씨의 손에 이끌려 시작했던 것이 평생의 업이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습니다. 언 땅이 녹으면 집에서 나가 겨울이 되서야 집에 돌아오길 수십 년, 김종수 씨는 거의 평생을 길 위에 살았습니다. 한번 공연을 위해서 아침부터 온 동네 농악을 치고 다녔고, 장마철이면 끼니를 굶기도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에 후회는 없습니다. 농악 덕분에 우리나라 방방곳곳 안가 본 곳이 없습니다. 농악자체가 그에게는 재미있고 푸진 놀이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김종수 씨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에게 농악을 배우기 위해 서울이며 제주도 등지에서의 발걸음도 끊이질 않습니다. 잘 곳이 마땅찮은 사람에게는 집을 내주며 가르칠 만큼 그의 농악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김종수 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나는 태어나길 소고잽이로 태어난 사람같어 구술  김종수 ㅣ 정리  최정학ㅣ 사진  유백영 “너는 채상소고를 해라” 내가 출생은 태인에서 했어. 태인에서 허고, 내가 세살 때 외가를 따라서 여그를 왔지. 아버님이 그 일정 때 해군 군속으로 가서, 일찍 돌아가셨어. 한 사십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 삼십 때 혼자되시고, 그라고 인자 나하고 누나하고 남매. 남매가 살고, 지금 누나는 정읍에 계시고 나는 여그서 살고. 어려서 물론 심은 들었지. 그런디 그렇게 심든다고 생각은 안했어. 왜 근고허믄 열두 살 때 농악에 입문을 해가지고 그때부터 계속 이쪽 농악을 하믄서 막 전국 순회하고 돌아다니고 겨울에 막 눈 쏟아지고 하믄 집에 들오고, 또 한두 달 있다가 봄 오믄 다시 나가서 전국 순회를 허고 그래서 그렇게 아조 힘들었다 그렇게는 생각이 안들어. 여기 사진에도 있지만은 김병섭 선생 이분이 말하자믄 나허고 사촌 매형이여. 근데 외사촌 매형이 이 농악에 설장고를 하면서 아마 소고꾼이 필요했는 모양이여 소고쟁이들이. 그래서 인제 그걸 배우라 해가지고 배워가지고 계속 그때부터 인자 다니다가. 한 삼사년 다니다가 저 전주에 사시는 정오동 선생을 만났어. 지금 아마 살아계시면 백 살 넘으셨을거여. 근디 그 선생님 만나가지고 “너는 고깔 소고를 허지 말고 채상 소고를 해라” 그래. 채상은 이 전립을 쓰는거여. 그게 채상이여. “그래 너는 채상소를 해라” 그래가지고 그냥반이 막 밤낮으로 갈쳐 준거여. 그래서 채상소고를 약 한 35년 동안 소고를 했지. 열두 살에 한 삼사년은 고깔 소고를 허다가 그 뒤에 약 30여 년 동안 채상소를 허다가. 다시 내가 또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 우도 농악에는 고깔 소고가 필요하다 그래가꼬 고깔소고를 다시 시작했고. 내가 문화재 지정은, 고깔소고 채상소고 합해가지고 소고라고 하거든. 그래서 소고 무형문화재를 받았어 인자. 아조 엄허게 배웠어 열두 살 때 배울 때는 아조 엄했어. 한방에서 잠을 자고도 잘 주무셨냐고 인사를 해야되고. 또 같이 한 상에서 밥을 먹고도 식사하셨냐고 인사해야되고. 그 안허믄 혼나. 그서 그 인자 쭉 그렇게 인사를 허고 허다가 그때가 아마 내가 사춘기 정도 되았던거 같어. 그때 내가 굉장히 한번 반발을 했어. 저기 전 곡성이라고 하는데 가서 매년 고로쇠 축제를 했어. 그때 거그가서 인자 식사를 하고 났는데, 인사를 안했다고 뭐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거그서 반발을 했지. 왜 내가 한방에서 같이 밥묵고 인사를 해야 됩니까. 아 내가 어디를 나갔다 왔다던가 하면 인사를 허지만, 왜 같이 밥묵고 인사를 하라고 합니까. 그래가지고 나허고 상당해 다투고 내가 그 쓰는 전립도 찢어버리고 내려갔다가 다시 또 델로 와서 간일도 있고 그려. 그때는 굉장히 그렇게 엄허게 했어 그때는. 그래도 김병섭 선생하고 정오동 선생은 아조 그때 유명한 선생님들이었제. 김병섭 선생은 저기 그 북면에서 사시다가, 칠보산 밑에 마을에서 사시다가, 여가 처가여 처가. 우리 외갓집이 말하자믄 김병섭 선생 처가. 그러니까 그때 그 인공 때 그 양반이 좀 나이도 젊고 해가꼬 그래가지고 상당히 거 위기에 있었던 거 같애. 그래가지고 인공 때 이리 말하자믄 피난을 왔지 처가댁으로. 그래가꼬 여그서 머물게 되았지. 그래서 김병섭 선생은 여그서 사시면서 그 하나에 내가 보믄 마을 굿을 쳤던 거 같애. 마을 굿을 치다가 여그와서 인자 아조 잘하시는 분들헌티 기술을 연마해서 닦어가지고 어떤 단체를 하나 맹글어야겠다 싶은게 인자 우리를 갈쳐가지고 전국 순회도 하고 그때는 그랬어. 그때 단체는 젤 처음에 맨든 농악은 한미여성농악이라고 맹글었어. 그렁게 우리 한국 사람하고 미국에 살던 사람허고 그 이름은 제인이라고 허는 이름인데, 그 제인이라는 그 학생하고 같이 이렇게 단체를 맹글았어. 그래서 한미여성농악이라고 이름을 붙였어. 그래가꼬 전국 순회공연을 했고. 또 그러고 나서는 인자 우리 정읍농악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또 전국 순회를 했고. 또 전라북도 대표로 가서 서울에 가서 대통령상을 받고 그 우승기를 갖고 전라북도 대표팀이라고 그래가지고 또 공연도 다니고 했어. 아무리 해도 정오동 선생을 따라갈 수가 없었어 그러고 또 정오동 선생은 그때 채상을 너무너무 그 잘했어. 지금도 잘하지만은. 지금 내가 봐도 정오동 선생같이 깔끔하게 하는 채상은 못봤어. 나도 제자지만 아무리 정오동 선생님을 닮어 갈라고 애를 쓰고, 잘헌다고 생각도 하고, 잘한다고 관객들한테 박수도 많이 받었지만, 내가 해놓고 봐도 우리 정오동 선생님을 따라갈 수가 없었어, 그렇게 잘했어. 그래서 그때 당시 우리 정오동 선생님은 농악단원들 수십 명 속에서도 그 선생님 한분만 추천을 해가지고 미국 공연도 허고, 그 양반 혼자. 그래서 미국 갔다와가지고 나한테 선물도 줘서 갖고. 옛날 그 회중시계같은 라이타 그런것도 선생님한테 받어가지고 내가 한 20대 적에 받아가지고 사십살에 내가 담배를 끊으면서 그 라이타를 우리 아들한테 줬어. 그래서 아주 우리집에서는 가보로 알고 있어, 그 선생님한테 받아가지고. 그 선생님이 전주에서 살았어. 전주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모르겄어. 집은 안가봤어. 근디 살고 계시는데는 전주가 분명하고. 그 양반은 그렇게 엄허지는 않았는데, 인제 그 단체 속에는 아주 엄한분들이 있었어. 무섰지 그때는. 열두살 때 그래서 내가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녔어. 우리나라 시골이고 어디고 안가본디가 없어. 그때는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여러 가지를 했지. 포장 쳐놓고 관중을 끌어들이는 공연도 했고. 또 약장사라고 허지 지금은. 약장사, 그런 약장사도 했고. 그런디 그때는 데끼아라고 그랬어, 데끼아. 데끼아라는 뜻이 뭔 소린가는 몰라도, 그 데끼아를 동네마다 돌아댕기면서 공연하고, 그렇게 해서 뭐 하루저녁이믄 몇백만원씩 벌고 그랬지, 단체에서. 단체에서 벌어서 우리 생활하는데 쓰고, 거기 또 이득금은 자기들이 갖겄지. 그렇게해서 우리들은 공연을 또 허고. 전국을 돌아댕기면서 했지. 힘들었지. 그때는 오전에는 보통 아마 적어도 8킬로에서 16킬로를 시가행진을 했어. 그때는 마이크도 없고, 그냥 우리가 굿을 치면서 마을을 돌아댕기면서, 어디서 굿을 치니까 저녁에 놀러오쇼 그걸 알려주는 거여. 그래서 뭐 8킬로 10킬로 이상 한 16키로 까지도 돌아서 오고 그랬지. 관중을 모으기 위해서. 오후에 공연하고 밤에 공연하고, 약 두 시간 정도. 예그린 악단이라고 하믄 우리나라 최고의 악단이여 그때 그렇게 돌아댕길 때는 인기가 좋았제. 그때는 인기가 좋았어. 서울에 예그린 악단이라고 하믄 우리나라 최고의 악단이여. 영화배구, 또 합창단, 또 밴드, 또 우리 농악도 그렇게 해서 약 직원들이 약 3백명.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한 세군데 정도 댕겼어. 부산하고 대구허고, 서울허고. 그 무대가 적어서 딴데는 가지를 못했어, 그 단체는. 한 3백명 정도 그렇게해서 공연도 많이 하고, 또 거기에서 쭉 근무를 했지. 그 서울에 낙원동이라고 하는데 가서, 권여성 무용연구소 선생님이 있었어. 권여성 무용연구소 선생. 그 선생님이 나를 우연히 보고 불렀던 거 같애. 그래서 일을 하고 있는데 연락이 왔어, 서울로 올라오라고. 그래서 그 주소만 하나가지고 서울에 무작정 올라갔어.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서 서울역에 떨어져서 택시에 타서 무조건 낙원동 권여성 무용연구소만 찾아도라. 그러믄 내가 택시비만큼은 나온만큼 줄테니까 찾아도라, 그래서 내가 찾았어. 찾아가지고 그 선생님이 그때당시 내가 봤을때, 우리보다는 한 서너네댓살 더 먹지 않았나. 그때 내 어린나이로 생각을 했어. 그가 그때가 열여닯살인가 먹었는데, 적어도 그때 그 선생님은 25세 정도는 먹었지 않았는가 싶어. 그래서 지금 참 한번 찾아보고도 싶고 그 선생님을. 내가 그때 그 계기로 지금 이 자리까지 있는거 같어. 그래서 내가 그 선생님을 찾아보고도 싶고, 그래서 내가 몇 년 전에 문화재 지정도 되고 그 선생님을 한번 찾아뵐라고 그랬는데 지금까지도 못 찾아뵙고 있어. 지금 그 선생님이 살아 계시면은 적어도 한 75세쯤 되지 않았나 싶어. 그래서 좀 찾아보고는 싶은거여. 그 선생님이 날 불러가지고, 내가 배운 것이 소고 아니여. 그래서 그 많은 관중 속에서 많은 그 여학생들 속에서 나 혼자만 채상 돌리는 것을 했어. 해서 공연도 많이 했고, 또 지금 내 CD나 테이프를 보면 그때 그 하던 장면을 볼 수가 있어. 근데 그래서 그 선생님 밑에 가서 쭉 있다가 그 선생님이 그 예그린 악단이라고 하는디로 보내줬지. 그래서 거기가서 근무하다가 인자, 그러다가 병역관계로 내려와가지고 다시 군대생활을 인자 충실히 하고 제대를 해가지고 나와서 보니까 그때 인자 박정희 대통령일적에 그때 예그린 악단이 해체되았다고 하더라고 제대를 하고나서 보니까. 그래서 거그서 악단이 해체되았다고 해서, 그 뒤에 여그가 있으면서 사방에 여그저그서 오라고 공연있다고 하믄 가서 한번씩 하고 어쩌고 그런 세월이 상당히 오래 걸렸던거 같어. 그런 세월이 오래 걸리고 그 다음 인자 문화재 위원들이 연락이 와가지고 문화재를 올리라고 서류를 갖추라고 그래서 서류를 갖춰가지고 올렸더니 문화재 지정을 해주더라고. 아마 대를 잇어서 이렇게 갈라고 그랬던거 같어. 그래서 지금 보면 같이 했던 분들이 한분도 안계서 다 돌아가시고, 그래서 아쉽기는 해. 그때 예그린 악단에 있을 때는 참 재밌었지. 공연하는 것도 재밌고. 예그린 악단에 가면서 내가 그때 처음으로 정장을 입었던거 같고. 거기는 거의 뭐 자기가 정장을 하고 출퇴근을 아마 그 제도가 그렇게 되았던거 같어. 그래서 정장을 입고 출퇴근을 허고, 상당히 좋았던거 같어. 우리는 특별히 연습하는 것도 많이 없었고. 배운 것이고 그래서 많이 사무실에서 전화같은거 많이 받았고. 또 때로는 장관들이라던가 우리 그 역대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그 무슨 행사 있으면 거기가서 꼭 공연 다했고. 인제 거기 주로 조선호텔, 반도호텔 그런데서 행사를 많이 했어. 외국에 인자 높으신 분들 오시면 그런 자리에서 공연한번 하면 꼭 대통령이 그 자리에 꼭 있더라고 그때 당시. 그때 예그린 악단에 쟁쟁한 양반들이 많이 있었어. 백금녀, 얘기 들어봤어? 뚱뚱이 백금녀. 또 김희갑 선생 그 홀쭉이 뚱뚱이에 그 김희갑 선생, 뭐 그 너무 오래 되아서 지금 이름은 잘 생각은 안나지만 유명한 연예인들도 같이 거기 있고 그랬어. 그때는 우리 풍물 쪽은 전부 인정을 못받았어 그런데, 군대 갔다 오니까 해체가 됐단 말이지. 제대하고 해체되아서 그 뒤에 인자 내가 인자 결혼을 했어. 결혼을 해가지고 집에 있으면서 인자 여기저그 공연도 인자 한번씩 나가고, 그러다보니까 인자 애들도 생기고 그러니까 상당히 힘들더라고. 상당히 힘들어서 생전 안해본 농사도 좀 지어보고, 그것도 안되는거여. 힘들고. 애들을 멕이고 갈치고 할라믄 힘들잖어. 그런디 농사도 잘 안되아서. 상당히 내가 쪼께 흐트러진 모습도 좀 보여주고 그런거 같애. 그런디, 예그린 악단 활동을 할 때는 우리 풍물 쪽에는 전부 인정을 못받았어. 그래서 도저히 이것 갖고는 먹고 살수도 없고. 그때는 우리 예술쪽에 학교도 없었고. 지금은 예고 예대 다 이런데 댕김서 다 유명한 학교가 되았지만, 그때는 그런 학교도 없었고. 또 더구나 대학교 졸업하믄 이 농악쪽으로는 올라고 생각도 않고. 생각도 않고 그래서 상당해 좀 이런거 하는 사람이 지금도 어렵지만, 그때 당시는 참말로 어려웠지.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고 여성들은 또 결혼해서 자리도 잡고, 남자들은 또 어떤 직장을 찾아서 가고 그래서 우리 정읍농악이 상당히 침체되았던건 사실이여. 그때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들고, 우리 서민들이 볼거리가 없잖어. 볼거리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 딴따라들이 가가지고, 그때 인자 딴따라라고 했는데, 그때가서 공연하고 뭐 농악치고, 판소리 하고 그러면 관중이 모다 모여. 모다 모여서 그때 인자 공연을 하고. 그때 볼거리라고 해봐야 가설극장 지어가지고 영화같은거 갖고 다니면서 시골에 공연하고. 또 우리는 다니면서 농악, 판소리, 무용, 연극 요런 것으로 두어 시간 하면서 또 돈도 받고. 근데 그때는 돈을 벌기 보다는 우선 당장 집에 오면 밥먹을게 없으니까, 뭐 밥이라도 먹고 살려고 따라 다닌거여. 그때는. 돈은 힘들어. 한 벌써 숫자가 농악 숫자가 예를 들어 20명이라믄 거기 모다 관리하믄 분들 포장치는 분들 이런 분들 다 허면은 삼십명이 넘는데, 삼십명이 하루에 식사 때만 해도 또 숙박비 이런거 때문에 보통 힘든게 아니여. 그래서 감히 돈 받을 생각은 못허고, 그냥 먹고 돌아댕기면서 구경하고 이렇게 해서 한 때 지냈지. 인자 그런게 재미는 있었어. 그러다가 인자 여성농악이 생겼어. 여성농악이 인자 우리보다 한 십년 늦게 인자 생겼으니까 그때가 내가 한 19세 정도 되았을 때 여성농악이 생겼어. 그래서 인자 여성농악이랑 혼합되아가지고 전국 순회공연을 많이 했지. 농악은 뭐 남원에 남원여성농악이 있었고, 또 전주에 가서 호남여성농악이 있었고, 또 부안에 가서 부안여성농악이 있었고, 정읍농악에 정읍여성농악이 있었고, 또 김제 백구에 가서 백구여성농악이 있었고. 그렇게 많은 여성농악이 생겨가지고 또 한때 재밌게 지냈지. 굶다가도 돈있으믄 잘 먹기도 하고 그때 당시는 고생도 많이 했지. 밥을 두세끄니 굶는 것은 단체생활하면서 그건 보통이여. 예를들어서 어디 인자 나가서 공연을 할라고 나갔는데, 여름 같은 때는 장마가 막 계속 막 한달 쯤 오잖어. 장마가 오믄 공연을 못해 그때는. 우리 공연하는데는 전부 가설극장이여. 포장을 쳐가지고 어떤 논빼미라던가 어디 밭이라던가 포장을 쳐가지고 공연을 하는데. 그게 비가오면 포장 안에 귀경하나 못허지. 그러믄 공연을 못허믄 우선 돈이 안들어와 그러니까 굶을 수밖에 없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를 전부 멕여주겠어. 그러니까 몇끄니씩 굶고 어디서 감자도 갖다가 쪄서도 먹고 뭐 이렇게 연명허다가 또 날 좋으믄 공연해서 또 잘먹기도 허고. 그런일이야 많지. 아무튼 굶고 아마 딴일을 그렇게 하라고 했으면 못했을 것이여. 근디 인자 우리 예술은 참 재미가 있어. 굶다가도 돈있으믄 잘 먹기도 하고, 또 재미도 있고. 또 내가 가보지 않은 곳. 감히 시골에서 내가 제주도다 또 뭐 서울에서 뭐 아까도 말한 것처럼 조선호텔, 반도호텔 뭐 이런데는 내가 가봐도 서울에서도 서울이다 내가 그런소리를 했어. 뭐 너무너무 좋은거여. 신발을 벗어서 구두를 들고 내가 들어갔어. 그래가지고 거기 관리하시는 분이 나와서 신발을 신으라고 해서 내가 다시 신었는데, 그 정도로 잘해놨어. 내가 감히 신발신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 그 정도 잘해놓고. 또 그때당시 내가 지금으로 말하면 약 한 40년 전에 그때 제주도를 우리가 어떻게 가. 감히 갈 수가 없지. 근디 우리 농악하러 가가지고 한 두달동안 거그가서 공연하고 나왔거. 그래서 참 그런거는 감회가 참 새롭지 지금 생각하믄. 내가 하는 거는 우리가 쓰는 말이 채상. 채상이라고 하는데, 채상을 많이 돌렸고, 또 열두 발이라는 것이 있어. 진 것 돌리는 거. 그 열두발을 많이 하는데, 그 한가지 내가 재밌었던 것은, 그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그때 인자 그 열두발에다가 대개, 열두발은 끈이 그 전에는 하얗게만 썼어. 중간에 하얀거 파란거 빨간 것이 나왔는디, 인자 그것은 색깔로만 그렇게 나왔고. 그때 우리가 그 정오동 선생이 “야 우리가 그 열두발에다가 야광을 발라가지고 한번 해보자.” 그러고 야광을 발러가지고 우리 공연할 때, 딱 우리가 들어가면 소등을 해버려. 딱 불을 다 꺼버려 그 시민회관에. 그래가지고 그 열두발이 돌아가니까 아주 그냥 호화찬란하고 그렇게 돌아가가지고 관객들이 와가지고 나를 막 끄집어 가고 그런일도 있었어. 그때 당시는 뭐 자기 나름대로 즐기느라고 그랬겠지만은, 나부텀도 어떤 그런 남들이 봤을 때 지나치게 했던 것 같애. 머리도 많이 길렀고, 뭐 또 옷도 색다르게 빨갛게 입었다던가 그랬지. 지금은 후학들을 갈치면서 살고 있어 80년대부터는 농악이 활성화 되면서 그때부터는 인자 그쪽에 인자 가서 쭉 활동을 했지. 그때도 인자 그 어떤 단체라는 명칭은 없어지고 인자 우리를 아니까 전국에서 이렇게 초대를 해. 섭외를 하니까 오라고 하믄 가고 또 얼마씩 일당을 받고 그렇게 해서 생활을 허고 했어. 그러다가 1979년 4월 23일날 문화재로 지정이 되았지. 문하재로 지정되고 나서 상황이 만히 달라졌지. 인자 활동도 해야되고, 또 가서 후계자들을 갈쳐야되고. 그 전에도 후계자들을 갈쳤지만, 어떤 갈칠만한 공간이 없었지 그때는. 근디 지금은 우리 정읍같은데는 정읍 전수회관이 아주 잘 지어졌어. 정읍과학대학 바로 앞에 3층건물로 한옥건물로 아주 잘 지었졌어. 그래서 그런 공간에서 배우는 사람도 좋고 갈치는 사람도 좋고 공간이 깔끔하니 아주 잘 지어졌어. 그래서 거그서 계속 후학들을 갈치고, 또 딴데서도 좀 갈쳐 돌라면 가서 갈치고. 그런디 여수에 내 제자들이 많어. 전라남도에서 그렇게 나를 많이 초청을 했어. 가서 학교라던가 또 여수에 그 타악하시는 분들 이런 분들이 나를 거의 한달에 한번에 정도는 불러. 그래서 가서 갈치고 그래서 그 제자들이 여수에 많어. 우리 정읍 같은데는 전수회관에서 매달 말하자믄 거 학원생들을 모집을 해서 시간으로 이렇게 갈치고, 또 인자 뭐 예를 들어서 각지로 갈치로 갈때는 그때 상활따라 다르고 인자 절충해서 가서 내가 인자 여비라도 받어야 나도 갈 수 있고 그러잖겄어. 그래서 그렇게 가서 갈치고 그러지. 참 어렵게도 살었지만, 재밌게도 살았다 그런디 평생을 예인으로 살다보니까 내 주위에 내 친구들하고 사는 모습은 많이 달러. 나는 그대로 예술 쪽에 몸을 담고 살고, 또 농사짓는 친구들은, 나도 농사를 지어봤지만, 생활이 완전히 달러. 그 사람들은 모이믄 농사에 대해 얘기하고, 우리는 만나믄 예술쪽에 관한 이야기하고 그러니까 서로 그런 것이 다르지.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해서는 크게 후회는 없어. 후회없고. 참 어렵게도 살었지만, 재밌게도 살았다 그렇게 나는 자부를 해. 자부를 허고. 하나 내가 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러고 댕기는 중에 우리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어. 인자 봄에 나가믄 가을에나 돌아오고 그런 생활이 계속 반복 되니까 그 모든 살림은 안식구헌테 맡기고 나는 나대로 나가서 그렇게 돌아다니고 그러니까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을 허지. 그래도 우리 집사람이나 아이들이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어. 그렇지는 않었어. 우리 내가 저기 아들 셋 딸 셋해서 육남매여. 내가 독신이라 애들을 많이 뒀어. 근데 아직 지금까지도 우리 애들하고도 관계가 좋고, 나도 애들한테 좋은 모습만 많이 보여줄라고 노력을 많이 하지. 앞으로는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은, 우리 정읍농악이 앞으로 참 타인으로부터 좋은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우리 정읍농악이 계속 발전 해갔으면 좋겄어. 나도 최선을 다해야지. 최선을 다허고, 누구를 막론하고 배운다고만 하면, 갈칠라고 생각허고 있고. 우리 카페, 인터넷 카페같은거 보고 아주 먼데서도 와. 저그 인천 같은디, 대구 같은디 이런데서도 배우러 와. 그런 분들도 내가 최선을 다해서 뭐 돈이 없다면 우리 집이라도 오라고 해가지고 갈쳐서 보내고 그려. 한 이년 전에는 제주도에서 학생들 둘이서 와가지고 우리 집에서 나한테 배워가지고 가서 지금 공연을 잘하고 있어. 그래서 그 제자들헌티 제주도 여행가가꼬 전화한번 했더니 와가지고 그냥 회도 사주고 뭐 그냥 선생님 왔다고 잘허데요. 그래서 대접도 잘 받고 그랬어. 내가 베풀면 베푼만큼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허고 그렇게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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