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 |
[문화시평 ] 문화영토 판의 가족시리즈 네 번째 이야기 ‘아부지, 아빠’
관리자(2008-03-26 19:27:49)
요즈음 연극공연을 보기 위해서 소극장을 찾으면 기분이 좋고 참 즐겁다. 몇 해 전만해도 객석을 한 좌석이라도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 공연장을 찾기도 했지만, 이제는 연극을 즐기는 고정 매니아들이 점점 늘어나 공연장이 제법 활기로 가득 찬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나 지자체, 기업의 메세나운동 등 문화예술지원사업의 영향도 있겠지만 지역 극단들의 공연제작의 열기나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뒤받침 해주는 여건이 많이 나아졌음을 느낀다. 따라서 무대에 오르는 연극공연의 제작 편수도 전에 비해 늘었고 공연의 주체들도 다양해졌다. 그 결과 이제는 공연 제작과정의 진지성과 투명성 그리고 작품과 배우의 질에 대한 인식 제고의 문제들이 심심찮게 지적되기도 한다. 허나 프로시니엄 무대의 전형적인 극장 무대 뿐 만이 아니라, 시장이나 공원 등에서 펼쳐지는 마당극의 원형무대가 수시로 관객들과 만나는 등 연극공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한층 확대되었고 그 문화 소비자들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
올 한 해도 얼마나 많은 좋은 작품들이 관객들 앞에 생산되어질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전북지역 2008 첫 연극공연의 막이 올랐다. 백민기 연출의 ‘아부지, 아빠.’ 문화 영토 소극장 판이 2005년 문을 열면서 밝혔던 가족 시리즈의 네 번째 공연이다. 산업형태의 변화와 지식정보사회의 급속한 발달로 인간들의 삶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고 그에 따라 가족의 모습 또한 왜소해지고 이제는 가정의 해체에 대한 우려가 공공연한 걱정거리가 된지 오래다. 그러나 물질과 자본의 가치가 숭상 받는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를 더 이상 천박해지지 않고 따뜻한 사람의 온기를 품은 사회로 이끌어 가는 저력은 관용과 사랑, 헌신과 나누어 드림의 가족 공동체가 가진 정신 때문일 것이다. 소극장 판의 가족시리즈 기획은 매우 의미가 커 보인다.
그동안 가족시리즈로 ‘행복한 가족’(2005), ‘가족’(2006), ‘집’(2007) 공연을 통해서 많은 고정 팬을 확보 하는 등 소극장 공연문화 활성화에 기여해온 판은 이번 공연 ‘아부지, 아빠’로 한층 물이 올라있다. 우선 관객들은 공연을 쉽고 편안하게 감상한다. 객석에는 어린 아이부터 90을 넘긴 노인 까지 함께 웃고 함께 눈물을 훔친다. 극장 안은 가족들의 판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건을 보면서 감정이 이입되어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간다. 그리고는 무대 위의 현실이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인 양 마음 졸이며 탄식하다, 박수를 치며 연신 웃기도 하고, 숨 죽여 눈물을 삼키며 흐느끼기도 한다. 무대 위의 사건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는 환영(幻影:illusion)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극장에 들어서기 까지 지니고 있던 우울함이나 불안감, 긴장감을 울고 웃으며 해소 해 간다. 마음 속 정화(淨化)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연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다. 마지막 암전이 이루어질 때 관객들은 공연의 끝을 알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숨죽여 마음을 쓰다듬고 있다. 어머니의 통한의 곡소리 속에 아버지의 영정 앞 촛불이 꺼지고 커튼콜을 위한 화이트 조명이 밝아지면서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때서야 관객들은 정신을 차리고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내 환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이어진다.
연출 백민기. 그는 소극장 판의 대표이며, 전주시립극단 소속의 배우이자 이번 공연의 연출자이다. 단단하고 섬세한 사람 백민기는 이 작품을 안정감 있고 탄탄하게 연출해 낸다. 심플하지만 왜소해 보이지 않는 세트의 배열. 수직과 사선, 곡선을 적절히 조화시킨 움직임의 방향. 다양한 연극적 요소를 접합시킨 기발한 상황묘사와 템포 등 세심한 그의 연출이 관객들로 하여금 세대를 뛰어 넘어 한자리에서 편안한 관극을 즐기도록 한다. 또한 무엇보다 안정감 있는 배우들의 호흡과 연기력이 관객들의 집중력을 한층 높인다. 아버지역의 고조영, 큰아들내외역의 이병옥???홍지혜, 막내역의 홍자연은 전주시립극단 소속의 중견 배우들로 그동안 많은 무대를 통해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대중들과 친숙한 배우들이며, 어머니역의 최경희 또한 최근 주목받는 배우이다.
작년 가족시리즈 공연 ‘집’을 통해서 연극 무대에 오른 뒤 이번 공연에는 안방마님 까지 차지한 그녀는 2007년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초청공연 ‘대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던 도립국악원 소속의 전문 소리꾼 배우이다. 그리고 ‘판’ 소속의 전문배우 장걸과 박재섭의 탄탄한 연기력은 1시간 40분의 러닝타임을 결코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 특히 이번 공연에는 중반부에 노부부의 이혼소송 법정 장면에 전주지방법원 판사들과 직원들이 매 공연 1명 씩 돌아가며 카메오 출연을 해 보는 재미를 더 해주며, 연극공연에 일반인들의 무대 참여 기회를 넓혀주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서 관객의 층을 넓히고 대중들과 친밀감을 더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은 돋보이는 기획이다.
공연장을 나서며 뒤 좌석에서 열띤 반응을 보이던 한 60대 여성이 딸과 손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조용히 묻는다. “내년에도 또 헌다고 했지야?”
화해와 소통, 감흥이 있는 자리. 재미있는 연극. 가족시리즈의 다섯 번 째, 열 번 째 이야기를 기대하며, 연극으로 좋은 세상을 가꾸어 가는 그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김근수/ 무주고등학교, 전주여자상업고등하교 등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면서, 20여 년 동안 연극반을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