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 |
[신귀백 영화엿보기]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관리자(2008-03-26 19:24:56)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 장 률의 <芒 種>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가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장석남 시,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부분)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망종>은 거울이다. <망종>속엔 소리가 없다. 아무런 언어도 음악도 없이 시작되는 무미건조한 오프닝. 한 여자가 창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던 이 여자, 커튼을 닫고 짐실이 자전거로 느릿느릿 지나간다. 카메라가 배우를 따라가지 않기에 풍경은 더욱 무심해 보이지만 보는 사람을 방심하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긴장. 시골도 도시도 아닌 배경 속에서 질적으로 느리게 가는 시간은 지아장커의 <임소요 2002>를 닮았다.
시골 역사 철길 옆에 쥔을 붙인 32세 조선족 여인 최순희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산다. 아들 창호는 동네 아이들과 역구내서 연을 날리고 노는 기찻길 옆 아이. ‘너는 조선족이다. 조선족 새끼는 조선말을 알아야지’ 하며 자식새끼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순희. 기찻길 옆 ‘둑너머’ 순희씨 집 반쪽에는 시골서 올라온 네 명의 처녀들이 밤에 봉고차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린다. 한국드라마 <이브의 유혹>을 즐겨보는 그녀들을 태운 봉고차는 여자들을 유곽으로 퍼 나른다. 열정이 빠져나간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인물들 모두 황량한 이곳은 어디인가? 중국 어드메일진댄, 어디메면 어떠랴? 산업화가 진행되는 중국의 어디라고 다를 것인가?
이 여자 삼륜의 자전거 짐칸엔 조선 포채(배추로 만든 김치)가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 몇 벌의 수수한 옷차림, 애교가 없지만 먼 카메라로 잡아도(영화 내내) 이 여자 윤곽선이 반듯하다. 예쁘다. 예쁜 여자는 응시의 대상이고 질시의 대상이어서 세상 어디든 젊은 여자가 혼자 살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자동차 공장 기술원 김씨가 김치를 사면서 같은 조선인이라고 접근한다. 조선 여자가 어떻게 담배를 피우냐, 가 작업 멘트. 그녀가 유일한 생계수단인 자전거를 공안에게 압수당하고 터벅터벅 걸을 때, 김씨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뜨거운 피가 식지 않은 나이이기에 그녀는 함께 맥주를 마시고 노래방을 가고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한다. 남편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 있단다. 그의 영화 <경계>에서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연변 출신 감독 장률이 그리는 최순희의 아들에게 아버지는 과연 시장경제의 남한일까, 아니면……
하강, 비참의 미니멀리즘
예쁜 여자에게는 주위의 호의가 넘친다. 그러나 대가를 바래는 호의들, 그 대가는 몸이 되는 현실. 식당 운영권을 주겠다는 놈팽이를 두들겨주고 나니 잘생긴 중국인 경관이 접근한다. 그는 순희에게 김치 판매 허가증을 만들어 준다. 과연 공짜가 있을까? ‘조선 사람끼리 못할 말이 무엇 있소?’ 라고 말하던 김씨는 아내에게 순희와의 정사장면이 들키자 돈 주고 산 여자라고 잡아뗀다. 그녀의 친절과 외로움을 삼킨 용렬한 남자 덕에 졸지에 순희는 창녀가 된다. 매음녀라는 모욕과 상실감으로 경찰서에 수갑에 묶인 채로 앉아 있던 그녀를 왕경장이 아무도 없는 빈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관용 없는 세상, 대가 없는 호의가 없는데 그 빈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공안에게 압수당한 자전거를 자신이 되사야 하는 현실, 한 발짝 뗄 때마다 수치를 강요하는 세상. 그녀의 고귀함이나 열정에도 특별한 관심이 없는 감독은, 산다는 것은 그냥 살아지는 것이라는 듯, 순희는 짜증을 부리거나 분노를 보여주지 않는다.
잉어 연에 스프레이를 뿌려 파란 물고기로 만드는 머리를 박박 깎은 아들은 묻는다. ‘엄마 우리 언제 돌아가?’ 인물에게 다가서지 않던 카메라는 아들이 열차에 받혀 죽었다는 소식에 최순희의 얼굴은 딱 한 번의 클로즈업 그리고 포커스 아웃(이 지독한 감독은 거의 상대숏을 찍지 않는다). 새옹지마도 없는 그녀의 비극적 수난은 정녕 자신의 결함에서 오는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왜 한국 배우들은 흰자위가 많이 드러난 얼굴로 또 커다란 울음과 어깨를 들썩이는 커다란 동작으로만 슬픔을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가. 그리고 그런 얼굴을 포스터에 잡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다. 배신에 따른 분노와 상실에 대한 애도를 과감하게 생략하는 장률에게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적막하다 못해 미니멀한 부엌, 여기에 따뜻한 레시피는 없다. 울음을 섞어서는 김치가 되지 않기에 그녀는 발목을 적시는 울음보다는 가면이 없는 맨얼굴로 담배를 피운다, 그냥. 이 가련하고 애처로운 모습의 원형적 주제를 벗어나 관객들은 페이소스에 몰입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쥐를 무서워하던 이 여자 김치에 쥐약을 탄다. 그리고 왕경장의 결혼식 날 그녀는 김치 수레를 밀고 간다. 마음이 그녀를 장소로 하지만, 카메라는 그녀의 장소성 보다는 삭막한 풍경과 그 풍경에 자리한 여주인공을 결코 크게 잡아주는 법이 없이 롱숏으로 잡아댈 뿐.
그녀의 처절한 비운에 연민과 동정을 갖는 페이소스의 감정이입을 경험하는 순간, 감독은 언어도단의 경지로 전복시키고 만다. 지독하다. 강철은 어떻게 녹이 스는가? 녹이 슨 여인은 왜 쥐약을 타는가? 함부로 움직이지 않던 카메라는 휘청휘청 그녀를 부지런히 따라간다. 역사를 건너고 파란 보리밭을 향하며. 수염이 있는 곡식 보리를 먹고 벼를 심는 날들, 망종의 날들. 한 해 중 가장 바쁜 때, 망종 무렵. 그녀는 어서 고향에 가고자 함인가.
장률이 찍는 익산 <이리, 2008>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와 심은하가 끝내 만나지 못하게 하는 설정의 허진호 감독이나 송해성 감독이 만든 <파이란>에서 장백지와 최민식이 한 번도 조우하지 못하는 장면을 두고 참 지독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망종>에 비하면 이건 따뜻한 거다. 장평과 자간을 넓히지 않는 맨활자 같은 장률의 영화. 시도 영화도 설명이 배제된 채 피지컬해지면 그저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할 뿐. 간절한 진심, 이런 것 말고 지나가는 무심한 그 무엇. 세상을 조롱하는 어떤 것에는 붉은 녹물이 묻어 있다.
<망종>, 음악 하나 없이 영화를 만든 장률. 형용사와 부사를 생략하며 만든 문장처럼 덤덤하다. 표현 못할 깊이가 작가의 목적이라면 감정의 미니멀리즘에 도달한 그는 깊이에 성공한다. 중국 사람들은 장률이 판 우물에 비친 중화인민공화국에 어떤 감정을 보일까 궁금하다. 내가 중국 사람이라면 장률, 불온하다. 그리고 조선족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두려워질 것이다. 사회주의가 인민의 시멘트가 되지 못한 것처럼 그의 영화 속 깨진 벽(페인트만 잘 칠해진)들은 오늘의 중국과 소수민족과 한족의 관계를 환유로 보여준다. 시대정신이 없는 시장경제와 실용만을 주장하는 변방 소수자의 따끔한 일침이라고 보기에 순희에게 조선춤을 배우는 중국 여자 공안을 보면 사실 그것도 아닌 듯하다. 다만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의, 한 여자의 노여움이라면 너무 작게 보는 것일까?
인간의 비극에 관한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선사한 시네아스트 장률이 이제 곧 재건축에 들어갈 익산 역 주위 모현 아파트가 나오는 작품 <이리(裡里)>를 완성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12월 한국으로 건너와 겨우 열하루만의 강행군으로 찍었단다, 놀랍지 않은가. 윤진서와 엄태웅 등 제법 알려진 배우가 나오는 이 영화는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현장 30주년 추모제로 시작한다고.
이제는 익산으로 불리는 이리! 호남선 철도와 함께 갈대 벌판이 도시로 형성된 곳, 이리는 기회의 땅이었다. 익산은 오래된 양반이나 토호가 드물고 어디서 흘러들었든 뜨내기들이 자리잡고 성장을 위해 달린 지방 중소도시다. 거기 유곽에 가까운 철둑에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난다.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한 삼남극장 뒷골목은 유곽으로 유명한 곳. 사실 익산은 원광대 너머 CGV 쪽 말고 역 앞에서 모현 아파트에 이르는 부분은 3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궁금하다. 한 때 내가 넘어 다녔던, 질척거리고 냄새나던 송학동 굴다리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부디 독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