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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 |
[서평] 러시아 미술사
관리자(2008-03-26 19:16:15)
‘삶이 곧 미술이다’ 이진숙 지음, 민음in 펴냄 미술작품에서 느꼈던 각별한 감동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일을 삶의 과제로 생각한다는 이진숙은 모스크바를 여행하던 10년 전 어느 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위대한 미술작품 앞에서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 이른바 ‘스탕달 신드롬’을 경험한다. 그래서 러시아어의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에서 러시아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였고, 귀국 후 그 당시 느낀 행복의 기록으로서 『러시아 미술사』를 쓰게 되었다. 지금까지 서양미술사는 대부분 러시아 및 동유럽의 미술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았으며 이는 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적인 문제가 개입된 결과라고 하였다. 대상에 대한 무지는 대상에 대한 경시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 『러시아 미술사』의 집필 목적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천년에 걸친 러시아 미술사에서 그 나라의 역사와 정신을 읽어내는 작업을 효과적으로 펼쳐 내었다. 원래 독문학을 전공한 이경숙의 필치는 다분히 문학적이다. 150여의 도판에 대한 감성적인 설명을 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러시아 미술의 특징과 중요성에 대한 기술은 처음과 끝을 관류하는 일관성이 있다. 저자는 ‘삶과 미술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러시아 미술 자체의 내재적 속성이라고 보았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고 말과 행동이 크게 울리고 불꽃처럼 튀는 나라 러시아의 격렬한 삶은 러시아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었고, 그것은 토마스 만의 말대로 성(聖)과 속(俗)이 대립하는 문화였다. 치열하게 삶과 미술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러시아 작가들은 역사와 민중에 대해 책임감과 사명감을 지녔던 지식인, ‘인텔리겐치아’였다. 예술가는 시대의 예언가로서 책무를 다하여 민족에게 봉사하였고 잠수함의 토끼로서 목숨을 걸고 자유의 상실에 대해 경고하였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육화(肉化)된 상징’이었던 12세기 동방정교의 이콘화를 러시아 미술의 원류로 보았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기를 거쳐 서방의 사조가 유입되고, 19세기에 이르러 최고의 이야기꾼으로서의 화가들의 시대가 꽃핀다. 푸슈킨, 고골리, 도스토에프스키, 톨스토이, 트루게네프 등 위대한 작가들의 리얼리즘은 페도토프, 페로프, 크람스코이, 일랴 레핀, 니콜라이 게, 레비탄, 야로센코, 수리코프 등 거장에 의해 그림으로 구현되었다.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시키는 도구였다. 캔버스와 화구를 들고 민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모든 이들에게 동시대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한 ‘이동파(移動派)’의 사조는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으로서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시대정신을 극적으로 시현하였다. 당대에 파리에서는 인상파가 풍미하였는데 “인상파에게는 내용 없는 형식만 있고 이동파에게는 형식 없이 내용만 있다”라고 대비되었다. 이동파는 일랴 레핀에 이르러 절정을 구가하고 이어 종언을 고한다. 레핀의 제자였지만 스승이 알 수 없는 새로운 장(場)을 연 세로프의 흥미로운 미술은 부르벨의 독보적인 상징주의로 이어진다. 한편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한 ‘예술 세계파’의 발전도 주목할 만하며 이 사조 역시 상징주의로 발전하였고, 이어 원시주의가 대주되고, 신원시주의, 칸딘스키의 추상미술, 샤갈의 독보적 미술, 그리고 절대주의와 구성주의를 포괄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꽃피우게 되며 이것이 서방세계 20세기 현대미술의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면면히 이어져 온 러시아 미술의 정신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타틀린의 구성주의에 이르러 그 혁명성이 극에 달하고,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고 갱신하려는 열정이 폭발적으로 구가된다. 이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 러시아 미술의 역사는 서양 미술사와 비교하여서 더욱 흥미롭고, 미술과 역사와 인간 삶의 관계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이진숙의 저서는 우리에게 러시아 미술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온 ‘내용 중시’ 전통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서구 미술에 과도한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 깊은 성찰의 실마리를 던져 준다. 러시아 미술이 오늘 여기 우리 땅의 미술과 문화와 사회를 바로 비쳐 볼 수 있는 거울이 되리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실타래를 풀 듯 쉽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의 이야기꾼다운 면모가 돋보인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he Story of Russian Art>이다. 이 책의 제목을 『러시아 미술사』라고 하기보다 영문 제목처럼 ‘러시아 미술 이야기’정도로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서술이 많고 원전의 인용이 전혀 없어 어디까지가 필자의 독창적 관점이고 어디까지가 선행 연구자들의 시각인지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오늘날 역사 서술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에세이 식 서술에 역사서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적절하다. 십여 년 전 국내에서 출판된 A. I. 조토프 저 이건수 역의 동명 제목의 『러시아 미술사』에는 130여개의 역주가 붙어있는데 꼼꼼한 번역 이 돋보이는 이런 책이 건조하지만 충실한 역사서이다. 20대의 여성 연구자가 저술하여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된 캐밀러 그레이 저, 전혜숙 역 <위대한 실험 러시아미술 1863-1922>은 19-20세기 러시아 전위 미술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서로서 317개의 미주가 붙어 있고 이 역시 역사서의 전형이다. 이진숙의 저서는 나름대로의 색깔이 분명하고 우리에게 감성에 소구하는 장점이 있다. 그의 저서는 모름지기 러시아 미술은 탐구해 볼 가치가 충분하며 그를 통해 서구 문화 편식의 문제를 바로 잡아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켜 준다. 이 시대의 문화예술인들과 애호가들이 국내에서 위에 언급한 세권의 책을 읽어 러시아 미술에 대한 균형 잡힌 선행 지식을 갖추고, 이진숙이 저서에서 소개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술관을 탐방하여 몰입하여 본다면, 오늘 여기 우리 문화의 혈맥을 짚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최효준/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전공하고 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영학 석사와 서울대 인문대학 미술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원광대 조형미술학과 박사과정 졸업예정이다. 삼성미술관 수석연구원과 서울시립미술관 수석큐레이터로 일했고, 현재는 전북도립미술관 관장과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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