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 |
[이흥재의 마을 이야기]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관리자(2008-03-26 19:15:05)
왜 한 마을에 거창신씨들만 살았을까?
조선시대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사회였다. 하나는 성리학의 이상을 구현하려 했고, 다른 하나는 씨족 중심의 사회였다. 그래서 과거 시험 답아지를 보면, 본인의 성명과 함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썼다. 이 내용을 통해 과거 시험 응시자의 집안내력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디에 사는 무슨 성씨 무슨파 몇 대 손하면 대게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원노촌 마을도 씨족 중심의 사회였다는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원래 70여 가구가 살았는데, 현재는 27가구가 살고 있는 거창신씨 집성촌으로 다른 성씨는 남원 양씨와 함안조씨 2집 뿐이다. 이분들도 외손들로 다 연결이 된단다. 요즘의 가치관으로 보면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아직도 그 전통을 느낄 수 있다. 옛날에는 농사지을 논밭이나 집이 한정되어 있어 사고 팔 수도 없었다. 한마을에 같은 성씨의 혈족들이 중심이 되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다가 자연스럽게 집성촌이 되었노라고 80세의 신용전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거창 신씨(居昌 愼氏) 미계공(美溪公)파 자손들이 이 마을에 정착한 시기는 중종반정이후로, 450년 전에 입향조(入鄕祖)인 신인장이 현재 하미치와 노촌제 사이에 있는 바위밑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신인장의 아들은 신순이고, 손자가 바로 미계 신의연(愼義連)으로 효행이 유명하다.
마을입구 효자각 앞 계곡가에 영모정(永慕亭)이 있다. 이곳에 살던 거창 신씨 파조(派祖)인 신의연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869년(고종6년)에 자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신의연은 거창신(愼)씨로 호가 미계(美溪)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김천일의 의병에 가담코자 하였으나 늙으신 아버지 신순이 병중이어서 참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곳을 지나던 왜적이 그의 부모를 해하려하자 몸으로 막으며,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곡히 애원을 했다고 한다. 왜장이 이를 가상히 여겨 “정말 효자구나”하면서, 그의 이름을 적어 불에 던졌으나 종이가 타지 않고 공중으로 그냥 날라갔다고 한다. 그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은 “효자가 사는 이곳을 해하지 말라”는 표말을 마을 입구에 세우고 물러갔고 이로 인해 오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명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선조임금은 신의연에게 수의부위(修義副尉)라는 벼슬을 내리고 마을 입구 푯말을 붙였던 곳에 효자각을 세우게 했다. 이 효자각은 마을 사람들에게 충효사상을 일깨워주는 산 역사 교육현장이 되고 있다.
정자는 동구밖을 동에서 서로 흐르는 계곡 옆 암반위에 있으며, 효자각에서 보면 너새로 이은 팔작지붕만 보인다. 너새는 지붕을 이을때 기와처럼 쓰는 얇은 점판암 돌 조각으로, 이것으로 지붕을 이은 영모정은 마치 너와집처럼 소박한 지붕의 모습이다. 마을뒤에 있는 충효사 지붕도 너새이고, 마을에 있는 재각 송산재(松山齋)도 원래 너새 지붕이었으나 1988년 중수하면서 슬레이트로 바꿔 이었다. 점판암 너새를 다룰 기술자가 없어서 걷어내린 너새들은 담장옆에 쌓두었다. 너새는 백운면의 독특한 건축문화를 상징한다. 이 계곡물은 비사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데 곳곳이 수려하여 요즘 같은 추운 겨울에도 화가들이 야외 스케치를 와서 하루종일 사생을 하는 곳으로 인기가 높다.
마을 뒤 제일 높은 곳에 충효사(忠孝祠)가 있다. 이 사당에는 문열공(文烈公) 김천일,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미계 신의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856년에 창건 되었다.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1947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입구 인의문(仁義門)에는 두명의 장수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김천일은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1593년 5월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싸우던 중 성이 함락될 무렵, 아들 상건과 촉석루 아래 남강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절했다. 무민공 황진 장군은 장수 황씨로 황희정승의 5세손이다. 무과에 급제를 하여 1591년 통신사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서 왜가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을 알고 동복현감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병법을 익혀 훈련을 했다. 1592년 왜적이 전주를 침공하려 할 때 전주 안덕원에서 적을 무찌르고, 1593년 충청병사가 되어 진주성을 사수하다 적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옛날에는 나라에서 인정해주는 효자가 나면 자손대대로 가문의 영광이었다. 나라에 충성을 한 사람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신성불가침의 특별한 공간이었다. 정기적으로 모여 제사를 모시기 위한 공간으로 재각을 지었다. 송산재를 지을 때 첫골에서 석와(石瓦)를 채취해 지게로 1~2장씩을 운반하여 재각과 대문을 세웠다. 25세 이상은 부역 하루 또는 칠천원을 내였다.
요즘 시대 사람들에게 忠, 孝, 사당, 재각, 집성촌 등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옛날 구세대의 낡은 유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치는 백년 후 몇 백년 후 후대들에게 어떻게 평가가 될까?
마을 회관 뒤로 해서 죽산재와 충효사를 거쳐, 돌담을 따라 송산재로 내려와 시냇가 길로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고샅길을 걸으면서 보니, 산자락에 있는 집들은 대부분 빈집이었다. 쓸쓸하고 차가워 을씨년스러웠다.
79살의 타성 받이 양장엽씨는 혹시 거창신씨 집성촌에서 소외감 같은 걸 느끼지 않느냐고 묻자 “타성받이로 살면서 조심을 하기도 하지만, 외로울 줄 알고 잘해준다고 했다. 아버지가 이 일대에서 유명한 서당 훈장님이어서 아버지 손때 묻은 옛날 책들이 작은방 선반에 빼곡히 있었다. 이 동네에는 유난히 쑤시(수수)빗자루를 쓰는 집이 많았다. 마을회관에서 양장엽씨는 오전 내내 쑤시빗자루를 매어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아직도 아궁이에 나무를 때면서 사는 집으로, 요즘 표현으로 아날로그식 삶의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 점심 때 소주 한잔씩을 반주로 하면서 “요즘 술들은 물러서 배만 부른다”고 했다. 소주의 도수가 25도에서 20도로 떨어지니 취기도 없이 맛도 없고 배반 부른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