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 |
[이종민의 음악편지] 마이클 호페의 ‘고요한 대지’
관리자(2008-03-26 19:13:12)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며
서글프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하루를 멀다하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태안기름유출사고로 인한 생태환경 폐해가 재앙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마당에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할 게 뻔한, 한반도 주요 강의 기능을 마비시켜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이 마구잡이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민주화운동 이후 조금은 심심해하던 사람들에게 싸울 거리 하나 마련해주려는 심사인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이번에는 이에 못지않게 어처구니없는 계획이 대통령인수위의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영어몰입교육’! 정부조직을 하루아침에 뚝딱 바꿔버리겠다고 조급증을 낼 때만 해도 뭔가 협상을 위해 저렇게 과도한 안을 내미는 거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한반도대운하와 영어몰입교육 안을 보고는 막연한 의구심이 구체적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친 바보’ 공화국! 새로운 정부의 별명이 당선자의 이니셜을 이용하여 이런 식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한가로운 망상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상황은 이미 심각해져 버렸습니다. 유통을 위해 산을 뚫어 강을 연결하겠다는 것은 돈 벌이 하겠다고 어머니와 누이를 사창가로 내모는 파렴치한의 소행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말 교육도 잘 되지 않은 어린이들에게까지 영어몰입교육을 시키겠다는 것 또한 장사 좀 편하게 하자고 영혼이고 자존심이고 악마에게 저당 잡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입니다. 대운하가 우리의 육신을 능욕하는 일이라면 영어몰입교육은 우리들 영혼을 좀먹게 하는 폭거라 할 수 있습니다.
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언어)이 로고스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사고의 원천이요 모든 정신적 존재의 뿌리입니다. 한 개인에게도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의 인품이요 인격입니다. 단순한 소통의 수단만이 아닙니다. 훈민정음 창제 시 목숨을 건 토론이 진행되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여 언어정책은 인수위 같은 한시조직에서 다룰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들의 천박한 언어관은 이미 당선자/ 당선인 논란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놈 자(者)가 느낌이 좋지 않아 사람 인(人)으로 하자는 것인데, ‘인’이 높임이고 ‘자’가 낮춤이라면 ‘범인’(犯人)이나 죄인(罪人)은 ‘범자’ ‘죄자’로 부르고 ‘저자’(著者)는 ‘저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그들 식으로 하자면 ‘주는 나의 ‘목인’이시니...’ 해야 할 판이요 이사야 등을 선지자라 부르는 우리말 성경을 모두 폐기처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수준이니 영어를 위해 민족의 영혼이고 자존심이고 다 팽개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중세 서구사회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영어, 불어, 독일어 등 자국어 사용을 도모한 신생 독립국가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요, 동양의 공용어인 한자가 있는 마당에 굳이 훈민정음을 만들어 한자를 몰라도 되는 세상을 만든 세종대왕은 시대착오적인 군주가 아니겠는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영어 못하는 사람들에게 죄의식 혹은 열등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라는. 백성들 불만 다스리는 데 죄의식보다 더 효과적인 방안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터, 이를 통해 각종 밀어붙이기에 대한 불만이나 토론을 잠재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걸핏하면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하면 되니까요. 설마? 해보지만 영어 잘하는 사람 군대 면제까지 거론되는 것을 보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게 말장난으로 그칠 일만은 아닌듯하기도 합니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 ‘바보’들의 전횡이… 우스갯소리로 바보가 신념이 있으면 위험하다고 했는데, 그가 부지런하기까지 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입니다.
국민은 딱 자기들 수준에 어울리는 대통령을 맞는다 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겠지만, 국토가 난도질당하고 민족의 혼이 어설픈 실용주의에 의해 유린되는 일만은 정파를 떠나 막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제 글이 지난 군부독재 시절처럼 거칠어졌습니다. 제 자신도 씁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소박하게 음악 얘기나 나누려 했는데 세상 몰골이 흉흉해지다보니 제 말투도 참담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고치고 말고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너무나 절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음악 하나 올립니다. 잘 아시는 마이클 호페(Michael Hoppe)의 [고요한 대지](The Land of Serenity)라는 곡입니다. 그의 [저녁놀](Afterglow)에 실려 있는 곡으로 그와 오랫동안 작업을 해온 첼로의 마틴 틸만(Martin Tillmann), 알토 플루트에 팀 휘터(Tim Wheater)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영혼의 안식처인 대지의 따스한 품을 느끼게 해주는 호페 특유의 신비하고 매혹적인 선율이 ‘미친 바보’들에 놀란 우리들 가슴을 잘 달래줄 것입니다.
이런 시절에 무슨 음악?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흉흉하고 절박할수록 음악 듣고 시 읽으며 우리들 마음 다잡아나갈 일입니다. 조급증에 성마른 대응은 또 다른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대지는 어머니의 가슴입니다. 강은 그 대지를 적셔주는 젖줄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요 우리들 모두의 보금자리입니다. 돈 좀 벌자고 그 가슴에 칼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장사 좀 편하게 하자고 그 젖줄 막을 수 없습니다. 취직 좀 하겠다고 우리들 내밀한 영혼까지 팔아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곡 들으시며 우리들 생명의 근원, 그 은밀한 영혼, 어떻게 가꾸고 지켜나갈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노력하는 한 조급증 환자들의 황당하고 참담한 기획에 의해 이 성스러운 한반도가 능욕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소망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추신: 이 편지가 마무리된 한참 후에 ‘영어몰입교육’ 결국 백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어 광증’은 여전하므로 수정 없이 그냥 보냅니다.
이종민ㅣ전북대 교수·전주전통문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
※ http://e450.chonbuk.ac.kr/~leecm로 접속하시면, 그동안의 음악편지와 음악을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