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 | [이성호의 문화비평]
지방분권론과 분산된 권력의 주체
이성호 전북대 강사(2003-04-18 17:15:07)
대선 이후 지방분권에 관한 논의가 갑자기 활발해지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지 1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권력의 지방분산이 논의된다는 사실에는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지 않다. 또 분권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특정 지역이 주도하고 있어서 문제라느니, 인수위원회에 특정 지역 출신이 많다느니 하는 식으로, 여전히 종속적인 발상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늦게나마 지방분권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진전임에 분명하다.
지역사회의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방분권에 대한 관심은 정관계는 물론이고 학계, 언론계, 재계에 이르기까지 가위 전방위에 걸쳐있다. 논자에 따라 그 의도나 목적이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지방분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지방분권이란 중앙과 지방 사이의 기능적 역할 분담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권력의 분산, 지방의 재정 및 인적자원의 균등한 할당 등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중앙과 지방 또는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불균형과 격차에 대해서는 이미 수없이 지적되어 왔을 뿐 아니라 그 해법에 대해서도 나올 얘기는 다 나왔다 할 수 있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70년대 초반부터 국토개발계획에서 지역균형발전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72년의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는 "낙후지역을 개발하여 지역적 자립기능을 강화"한다는 목표가 명시되어 있다. 놀랍게도 2003년 벽두에 화두가 되고 있는 지역균형과 지방분권의 핵심 쟁점이 30년 전에 이미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 고질화된 불균형과 지역격차, 권력과 시장의 독점은 역설적으로 균형과 분권의 목표 속에서 심화되고 있었던 셈이다. 두말할 것도 그 원인은 수십년간 진행되어 왔던 군사정권의 폭력적 지배와 그들에 의해 추진된 성장우선주의 경제정책에 있다. 소위 국가주도적 경제정책 속에서 지방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아니라 개발되어야 할 땅덩어리와 지하자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역주민은 정치적, 사회적 주체가 아니라 국민경제에 동원될 인적자원일 뿐이었다.
이쯤되면 오늘의 시점에서 검토되어야 할 지방분권이 어떤 목표를 지향해야 하는가가 비교적 분명해진다. 즉 분산과 분권은 지난 수십년 동안 집중과 집적의 효과에만 집착해온 중앙권력에 대한 정면 대응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분권은 단순히 중앙정부와 지자체간의 기능적 역할 분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70년대 후반 이후 삶의 공간으로서의 지방은 해체되었다 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어떤 이는 지방은 중앙의 '내부식민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방분권은 잃었던 지방의 자율성 회복, 아니 실질적으로는 지역주민의 권리 회복 선언이다.
이것은 단지 땅덩어리로 취급되던 지방을 다시 주민들의 삶의 공간으로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하며, 그야말로 산업역군에 불과했던 주민들에게 주체의 지위를 되돌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지방분권론에서의 지역균형발전이란 지역주민의 삶의 질에 대한 균등한 보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 권력의 분산이란 중앙권력의 독점을 해체하고 그 권력을 주민에게 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지방대학 육성 및 지역인재 할당의 궁극적 목표는 지방에서 주민들이 일자리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하자는 데 있다.
지방분권을 말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그 성패가 지역 주민의 각성과 적극적 참여 여부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현재로서는 적어도 지방분권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시민(운동)세력보다 지방의 정관계, 학계와 언론계가 더 급진적인 주장을 담아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직은 지방분권에 대한 주민의 관심이 낮은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범시민적 지방분권운동의 확산이 긴요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방분권에 주민참여가 소극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에 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논자들은 권력과 자원이 중앙에 집중되고 지방이 배제되었던 데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그동안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지방권력, 지방정치 자체가 부재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좀더 솔직하게 돌아보기로 하자. 지역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위가가 순전히 중앙 권력과 자본의 일방적 지배 때문일까? 오히려 중앙권력에 줄대기를 통해서 지방정치를 장악해온 세력에 의해 지역사회의 식민화가 촉진되어 온 것은 아닐까? 러시아산 한국인 박노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학맥으로 연결된 엘리뜨주의가 지역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지방대학 위기의 한 원인은 아닐까?
맹세코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는 지방분권운동에 재를 뿌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방분권운동이 단지 권력과 자원의 중앙집중을 해결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더 큰 목표를 향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지방분권운동은 70-80년대를 통해 광범하게 합의되었던 목표, 즉 독점적 권력의 해체와 재벌의 해체를 향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 믿고 싶다. 다만 지역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를 발생시킨 원인을 짚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주제인 분권운동에 생뚱맞게도 왠 근본주의적 시비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방분권이란 궁극적으로 지방의 사람들이 정치권력의 주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그 실현은 지역주민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지방분권은 지방정치인이나 지역의 엘리뜨층, 기득권층의 이해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지역의 기득권 세력은 소위 "지역 소외론"을 배경으로 지역을 분할하고, 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지방분권론을 들고 나오는데 주민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소외론에 근거하여 지역감정을 이데올로기화했던 기성 정치세력이 아무런 설명없이 권력의 지방분산을 주장하고 나설때, 그것은 자칫하면 또 다른 지배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방분권은 지역적 수준에서 지역주민에 대한 구체적 약속을 전제로 출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동안 지방정치와 지역정책, 그리고 지역시장의 배분에 관한 결정이 기득권층에 의해 독점되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의사결정과정에 주민의 참여를 보장한다는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동안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던 학맥을, 인맥을, 무엇보다도 중앙권력과의 질긴 끈을 과감히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방분권이란 궁극적으로 주민 권력의 강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을, 그 목표는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가 추구해왔던 민주화의 구체적 실현임을 인정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설령 "님의 뜻"이 변하더라도, 차기 중앙권력 내부에서 저항이 가시화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세대와 계층을 가리지 않고 전체 지역주민이 지방분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최소한의 전제에 속한다.
이미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처럼 상하, 좌우, 남녀, 빈부간의 균열이 깊고 선명한 곳에서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차이를 모두 뛰어넘는 합의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대∼한∼민∼국을 외친 적이 있었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