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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관리자(2008-03-26 19:11:21)
이 좋은 한지를 만질 수 있어서 좋지 구술  김혜미자 ㅣ 정리  김선경ㅣ 사진  유백영 1941                 일본 후쿠오카 출생 1945                해방되던 해 전주로 옴 1960                전주여고 졸업 1975~1995        문향회 김혜미자 꽃꽂이 회원전 및 개인전 16회                 한국 꽃꽂이협회 회원전 5회 1985~1990        한국꽃꽂이협회 일본 초대전 및 교류전 6회 1986                전지공예 입문(호진 상기호선생 사사) 1995                제1회 전국 한지공예대전 대상 1996                한국의날 초청 전통공예초대전 및 시연전(일본 사이타마현) 2002                전주-가나자와시 교류 한지문화진흥원 초대전(일본 가나자와시) 2006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행사 한지공예 초대전(프랑스 파리) 1998~2003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전통한지공예 전담교수 2001~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전통문화교육 초빙강사 2004~2006        전주기전여자대학교 문화전통과 교수 2007                건국 이후 4번째 국새 제작 참여 (요석부문 담당) 2007                베트남·중국 상해 초대전 현재                종이문화원 자문위원                 전주 한지문화축제 조직위원                 한지문화진흥원 이사                 한지포럼 이사                 김혜미자 전통한지공예 이지원(以紙園)운영 그 이름 앞에 어떤 꾸밈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한지공예가 김혜미자. 꽃꽂이 연구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한지공예로 접어든 지 벌써 20년! “비단을 쌓아놓고 가위를 들고 있는” 사주를 타고 났다는 그는, 비단처럼 고운 꽃 속에 파묻혀 살다가, 이제는 비단보다 더 고운 한지 속에 묻혀 삽니다. 투명한 한지처럼 고운 얼굴 뒤에는 남몰래 흘린 눈물과 한숨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눈물 때문에 그녀의 한지가 더 곱게 빛나는지도 모릅니다. 서른아홉에 홀로 되어 열정 하나로 버텨온 삶. 세상사를 다 품어 안아줄 것 같은 한지가 있었기에 그녀는 지금도 외롭지 않습니다. 명장 김혜미자,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딸들이 엄마만 못허단 얘기를 많이 들었어 내가 태어나기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났고, 해방되던 해, 아버지가 후쿠오카 농고를 나오고 어머니가 기전여고학교를 나왔는데, 할아버지는 거의 백 살이 다 되셨는데, 좀 개화적인 집안의 세 자녀로 그때 내가 태어났지. 나하고 바로 밑에 동생은 전여고를 나오고 그 밑에는 성심을 나오고, 그렇게 딸 셋이 크는데, 아버지가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셨대요. 해방 되고 네 살 때 나오는데, 한 십 리길을 나를 걸려서 나오는데, 만돌린하고 바이올린을 어깨에다 메고 나를 걸리니까, 엄마가 그것(악기)을 버리고 네 살짜리 애기를 업고 가야 할 것 아니냐, 그러고 배 타러 올 때까지 싸움을 하셨다네,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가 참 심심한 사람인데, 엄마도 여학교를 나오셨으니까 일본어를 배우셨을 것 아니냐? 그 시절에. 엄마가 하도 심심해서 심심하다 그러면 아버지가 부엌에 가서 접시에 소금을 담아서 오셨대. 그 말을 지금도 안 잊어버려. 아버지가 좀 재미있으셨던가봐. “느그 아부지가 그랬니라”고 우리 어머니가 말을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차암 이뻐요. 그래서 중학교 때랑 엄마랑 어디 같이 나가면 다들 딸들이 엄마만 못허단 얘기를 많이 들었어, 어릴 때. 옛날 어머니 사진 보면 고와요. 기전학교 다닐 때 지금의 ‘미스 전북’을 다가산 밑에 비석 있잖아요? 거기다가 사진을 걸어놓고 미인을 뽑았다고 그래 옛날에. 이만한 사진을 걸어놓고 말하자면 미스 전북같이 사진으로 미인을 뽑았었대. 그때 어머니가 미인으로 뽑힐 만큼 어머니가 이뻤대. 내가 생각해도 어머니가 참 이뻐. 그런데 우리가 엄마 따라 댕기면 “에미만한 자식이 하나도 없다”고 했던 그런 기억이 나. 우리 엄마가 이쁘다고 하니까 나도 좋았지. 서른아홉에 혼자가 됐어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여학교를 나오시고 일본에 가서 예를 배우고 그래가지고 우리 친구들도 정스럽고 그랬던 걸로 많이 기억을 허드라고. 나는 여그서 약혼을 하고 서울 가서 결혼을 하고 서른아홉에 혼자가 됐어. 그때부터 생활전선에 나선 것이 꽃꽂이 연구실을 하면서, 꽃집을 하면서 내가 서른아홉에 처음으로 MBC생활백과라는 데서 방송을 했어. 그리고 처음으로 서른아홉 살에 ‘꽃꽂이 개인전’이라는 것을 이 고장에서 처음 할 때 전북일보의 김현수 부장이라고, 지금은 안 계시는데 우리 대 선배야. 그 분이 문화부장을 했었는데 내 인터뷰 기사를 해가지고 서른아홉에 전북일보에 큰 지면에다 나를 소개를 했어. 그 당시에 활동하는 여성들은 다 오십대 후반이었어. 예를 들어 한국부인회, 전주시 어머니부녀회, 걸스카웃 그런 분들은 다 오십대 초반이었는데, 삼십대에 처음으로 꽃꽂이라는 전시회를 전주에서 처음으로 했고, 처음 꽃꽂이라는 단어가 언론에 오르내리고...그렇게 시작을 해서 꽃꽂이를 가르치고 꽃집 하면서 꽃꽂이 연구실을 하면서 출강하면서, 전라북도 여성회관을 다 순례를 했을 거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남원 여성회관, 순창, 부안, 정읍, 익산, 군산, 하여튼 전라북도 시군을 다 꽃꽂이를 하면서 애들 셋을 가르치고, 애들이 다 공부를 잘했어요. 큰 아이만, 내가 서른아홉에 혼자되니까 철이 들었겠지, 좀 방황을 많이 했어요. 지금 한지공예 전수하는 딸인데...그렇게 열심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강의를 허고 그러면서 또 기독교 방송 프로에 2년 6개월간을 1주일에 한 번씩 꽃이야기를 하면서, 글도 못 쓰지만 전북문학에 한 7개월간 꽃사진을 보면서 꽃에 얽힌 상념을 썼어. 근데 너무 글 쓰는다는 게 어렵더라고. 꽃꽂이 할 때의 추억은 아주 많아. 대통령 올 때마다 군산이고 순창이고 정읍이고 대통령 초도순시 올 때 마다 꼭 가서 꽃을 꽂았어. 그래서 영부인들이 어떤 꽃 좋아하는지는 내가 알아. 새마을대회 있을 때 전두환 대통령도 여기에다 꽃꽂은 것도 내가 만들어서 청와대에서 사진을 보내온 것도 내가 갖고 있어. 오십이 넘으면 꽃은 안 할 거야 그렇게 꽃꽂이를 하면서 내가 마흔 여덟에, 이렇게 살려고 그랬는지, 내가 늘 사람들한테 “나는 오십이 넘으면 꽃은 안 할 거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대. 아무 대책도 없었는데, 꽃 아니면 뭘로 먹고 살려고. 그런데 그 이유를 물어보면 내가 늘 빗대는 게 한결같이 “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데 여자 나이 오십이 넘어서 쭈글쭈글해가지고 그러면 꽃한테 미안해.”그랬대. 나도 그게 기억이 나는데, 그전에 제자들 얘기 들어보면, 말이 씨 된다는 말을 선생님을 보면 실감이 난다고 그래. 오십 넘으면 꽃 안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마흔 여덟에 내가 ‘한지’를 잡았어. 꽃꽂이해서 애들 셋을 가르치고 여우고, 이제 거의 다 했어. 다 여워놓고...꽃꽂이라는 게 해본 사람은 다 똑같을 거예요. 전시회를 내가 열여섯 번을 했어. 전주에서만. 서울에서도 전시회를 한 여섯 번 했고. 끊임없이, 1년에 한번씩, 많으면 (제자를) 한 90명 데리고도 해봤고...그러던 중에 내가 암수술을 했고, 그때가 한 14년 됐나? 내가 쉰셋에 했나? 두 번이나 (암) 수술을 했는데, 그 전에는 내가 꽃쟁이고 꽃꽂이하는 사람하고 꼭 맞다, 그랬어요. 내가 마흔여덟 살까지 40킬로그램이었어요. 너무 말라가지고...꽃꽂이 회원전을 하려면 밤차를 타고 제자하고 서울을 가요. 열두시 밤기차를 타고. 새벽 네 시에 여는 새벽시장에서 신선한 꽃을 사기 위해서. 다음날 전주를 오면 그렇게 무릎이 아파. 그날 밤부터 꽃을 꽂아. 그 이튿날 아침 일곱 시에 제자들 80명 데리고 꽃을 꽂아놓고 사우나 를 가. 밤새운 제자들허고 목욕을 허고 와서 싸악 화장을 하고...지금은 뭐 (오후) 다섯 시에 오픈을 하지만 옛날에는 (오전) 열한 시 오픈이었어. 무조건 열한 시에 오픈을 했어 예술회관에서. 아침에 밤을 새우고 화장하고 옷 딱 입고 하루종일 오는 손님들 반갑게 “어서 오세요” 인사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입근육이 마비가 되야갖고 내가 웃는지 어쩐지를 몰라, 하도 웃어가지고. 그렇게 정열적으로 하고 끝나고 나면 바로 그 앞에 이동호 내과에 맨날 입원했었어. 꽃꽂이 전시회 끝나면 꼭 바보가 된 것처럼, 그때가 되면 내가 몹시 앓어. 그렇게 허면서 이 지역에 꽃꽂이라는 단어를 심어주고 참 전북일보 같은 데서 신년 꽃꽂이를 할 정도로 많은 새로운 시도도 했지. 그때는 참 마음이 여유로웠고, 지금도 꽃꽂이할 때 얼굴 사진을 보면, 그렇게 어려웠고 내가 벌어서 애들 셋 가르치고, 하나 등록금 내고 나면 한 몇 개월 또 열심히 모아야 등록금 내는데, 다 장학금 받고 다녔어도 그렇게 힘들었어. 비가 많이 오거나 해서 매출이 없으면 그렇게 애가 타고 그랬는데도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젊어서 이쁘고 미웁고를 떠나서, 얼굴이 그렇게 평화롭고 곱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고생을 했어도 얼굴이 평화로와. 나이 먹어 가니까 솜씨가 안 따라와 그래서 그 시절이 참 그립고... 한지 속에 오니까 한 번도 내가 기쁜 걸 기쁘다고 표현을 못해. 제자가 대상을 받았다면 말할 수 없이 기쁘지. 그래도 특선한 제자들 눈치 보느라고 얼굴 한번 방긋 웃어보지 못하고...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똑같이 회비 받고 가르치는데 어떤 놈은 멋있게 작품이 나오는데, 어떤 놈은 양이 안 차고... 사람이 만족이 없는 거야. 그 대신 한 가지 한지하면서 좋다는 점은, 한지를 이렇게 하늘에 대고 비춰보면, 너무 아름답고 투명하고 너무 좋아서, 이 좋은 것을 내가 만진다는 것이 좋지. 하지만 작품에 대한 것은 양이 안 차. 내 자신감으로는 더 잘할 것 같은데, 나이가 자꾸 먹어가니까 솜씨가 안 따라와. 눈은 여기에 올라와 있는데, 한 20년 하니까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솜씨는 시작헐 때보다 못해지는구나...그래서 딸한테 막 혼나. 삐뚤어졌다, 굵다, 이렇게. 내가 한지를 처음 시작할 때는 전주 한지가 유명한지 어쩐지 그런 개념이 없이, 그냥 꽃꽂이할 때 포장을 한지로 싸보니까 참 분위기 있더라고. 물 젖으면 안 되니까 마지막 포장을 한지로 싸서 보면 막 만지는 촉감이 좋고, 그래서 한지를 썼을 뿐이지. 한지가 역사성이 있고 전주가 유명허고 이런 걸 몰랐는데, 하다 보니까 한지가 참 고운 빛깔이구나. 좋은 한지가 커다란 나무이고, 공예나 이런 것은 잔가지지. 공예나 서예나 한지 쓰이는 것은 좋은 한지가 있어야 그놈 갖고 허는 거니까 그건 부수적인 것이지. 그래서 내가 공식적인 자리에 가서 공예 얘기를 정말 안 해요. 전주 한지 이야기만 하지. 한지 기술자는 다 전주사람 우리가 몇 년 전에 투어를 한번 했어요. 한지문화진흥원에서. 우리가 여기 모여서 전주 한지가 좋고 발전해야 허고 그런 얘기만 하지 말고, 전국의 한지 투어를 한번 해보자, 우리 전주가 얼마나 낙후됐는지, 더 나은지, 전국을 돌아보자 해서, 여기서 남원으로 해서 원주, 괴산, 영주, 안동, 대구...이렇게 2박3일을 돌았어요. 돌아보니 다들 갔다 와서 내가 기록을 해놨는데...그때부터 내가 전주 한지에 대해서 돈독한 애정이 생긴 것 같애. 세상에 안동에서 2백만 원 짜리 한지 만드는 기술자, 원주에 있는 기술자, 다 전주사람인 거야. 기술자가! 나이가 다 육십 넘었는데, 안동 같은 데는 대우라도 좋지. 집이라도 깨끗한 집에서 살어. 그런데 그 분들이 전주에서 왔다고 하니까 반가워갖고 주인 몰래 한지를 한 장이라도 더 줄려고 하는 거야. 한지를 일일이 세어주면서...그러면 내가 마음이 아프잖아. 나이 육십 된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 두 번 휴일을 준대. 고향에 갔다 오라고. 원주를 갔더니 쥐가 막 다니는 쓰러져가는 집에서 기술자가 먹고 자고 있는 거야. 세상에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있는데 그 분이 “선생님 제가 열 장 더 시어줬어요” 허는 거야. 고향 사람이라고 그리워서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내가 따로 봉투 하나 주면서 가끔 여기 밥만 먹지 말고 나가서 맛있는 것도 사다 드세요, 그랬어. 내가 엊그저께 전주대학교에서 한지 사업과 관련해서 자문이 왔길래, 한번 그렇게 투어를 해보자 그랬어. 한 달에 백만 원을 벌라고 그 원주에 가서 나이 육십에 가족들허고 떨어져서 그러고 있다, 어떡해서든지 전주대학에서 한지가지고 목숨을 걸었다면, 어떻게든지 활성화를 시켜서 그 전주분들을 전주에 와서 살라고 했으면 좋겠다, 그런 것을 보고 전주대학이 같이 가야지, 겉만 그렇게 번지르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장인들을 데리고 오는 일, 그런 일을, 대학에서 돈이 있다면 한지를 위해서 일할 사람들을 전주에 와서 살게 하는 일을 관에서든지 학교에서든지 해야 한다, 그런 얘기를 했어. 배우는 데 욕심이 많았어 내가 마흔 여덟에 이렇게 텔레비전을 보니까, 한지로는 포장만 할 줄 알았는데 저게 웬 일이야? 했어. 그래서 텔레비에서 한지공예를 보고 피디하고 통화를 헐라고 한 여섯 번을 했는데, 그 작품만 보고 그게 무슨 프로그램인지를 못 본 거야. 그래서 여기 kbs에다 물어보니까 찾아주더라고. 지금 같으면 인터넷이 있으니까 바로 아는데. 그래가지고 물어서 물어서 담당 피디하고 통화를 하기까지, 한 여섯 번 통화를 했어. 그래서 한지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아가지고 그날 밤으로 서울을 올라갔어. 그 선생님이 오전 열시 경에 나온다고 그래. 그래서 터미널에서 새벽에 내려가지고 꽃 사서 전주로 보내놓고 그곳을 찾아갔더니 한 여덟시 반 정도 됐어. 아래층이 빵집이고 2층이 한지 연구실이야. 그래서 그 아래층에서 빵 하나 시켜놓고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한 시간을 기다렸어. 그래서 열 시 된게 그 분이 나오셔. 그래서 올라가서 보니까 그때 회비가 한 달에 5만원이야. 일주일에 두 번 오고. 딱 두 시간이지만 하도 연구실이 작으니까, 두 시간 딱 끝나면 다음 사람이 오니까 바로 자리를 비워줘야 돼. 서울까지 왔는데...그렇게 한 달을 다니다가 선생님을 보고 점심을 대접허겠다고, 그때 선생님이 나보다 열 살이 아래야. 그래서 선생님허고 점심을 허면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 전주에서 세 시간을 와서 막차로 내려가는데, 두 시간 가고 가려니 너무 억울합니다. 내가 새벽차로 와서 선생님 문 열 때부터 배우다가 막차로 갈 수 있게, 내가 회비를 다섯달치를 내겠습니다. 20만원을. 당시 한 달에 20만원씩 대기가 큰돈이었어요. 하지만 내가 배우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가지고 선생님 점심 대접허고, 저녁 대접허고, 그러면서 문 닫을 때가 되면 택시를 타고 터미널까지 막 아슬아슬하게 달려가. 그러다가 버스를 놓치면 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역으로 가서 열한시 반 완행열차를 타고 전주로 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여. 그렇게 다니다가 생각하니까, 우리가 하는 것이 오로지 전지기법(한지를 오리고 붙이는 기법)인데, 이것만 갖고 가면 안 되겠다 해서, 그 이듬해에는 충청남도 홍성을 다니면서 배웠어. 홍성에 사는 우리 여고 동창이 학부형이 한지를 꼬아서 하는데 너 한번 와서 봐라, 그래서 그때 운전이 서툴렀는데 내가 거기를 다녔어. 가는 데 두 시간 반, 그런데 대천만큼 가면 너무 지치는 거야. 그러면 시골다방에 가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쉬고 있으면 남자들이 막 쳐다봐. 그러면 친구한테 전화 걸어서 어디만큼 왔냐고 그러면 대천이야 그러면 어서 와, 어서 와, 그래. 그렇게 해서 인제 지승(한지를 꼬아서 하는 기법)을 배웠는데, 그 분의 시할아버지가 충남 무형문화재였던 분인데, 그 분의 손주며느리헌테 지승을 배웠어. 한번 갈 때마다 10만원씩 내고 배웠어. 내 형편에는 그게 큰돈인데, 그 돈 가지고 옷 한 벌 해 입을 걸,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한지 배울 욕심에. 어디 가서 뭔 짓을 허든간에 하여튼 돈을 모았어. 그래서 꼭 회비만큼은 꼭 모았어. 일주일간 판매한 돈 중에서 항상 회비만큼은 남겼어. 어쩐 때는 전화요금을 못 내가지고 가산금 낼지언정 그 회비는 절대로 안 쓰고 모았어. 그렇게 배우는 데 욕심이 많았어. 하염없이 울기도 많이 울었네 그렇게 허다가 아마 86년도일 거야. 그때도 꽃꽂이를 병행을 하고 있었는데, 86 아시안게임을 기념해서 코엑스에서 <한국의 꽃꽂이 작가 20인>해가지고 코엑스에서 꽃 장식을 했어. 거기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많이 하니까 국제적인 선수들이 왔는데, 내가 좀 의식이 있었나봐. 여기 이기동 선생님 합죽선을 큰 것을 갖다가 꽃꽂이를 했어. 그래가지고 뉴스에 많이 나왔어. 한국의 이미지를 심어준 꽃꽂이라고. 합죽선 항아리 위에 해바라기를 막 꽂았어. 해바라기의 꽃말이 ‘숭배’거든. 합죽선 뒤에서 해바라기를 꽂아가지고 뉴스에 많이 나왔어. 서울에 있는 호텔에도 꽃을 많이 꽂았어. 조선호텔, 롯데호텔, 인터콘티넨탈 호텔...인터콘티넨탈 꽃꽂이를 마지막으로 하고, 쉰 세 살 때 거기에서 전시회를 하고, 꽃꽂이 2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와가지고 보름 후에 암수술을 했어. 그때는 먹고 살라니까 꽃을 놓던 못하고, 한지에는 계속 투자를 하고, 그러다가 그렇게 돼버린 거야. 두 번 암 수술 허니까 정말 죽는구나 해가지고 전주에 김혜미자 죽었다는 소문이 쫙 났어. 장사가 거짓말처럼 안 되는 거야 내가 운전을 배웠는데 이론은 바로 합격을 하고 실기는 한번 떨어지고 두 번째 합격을 했어. 그러고도 무서워서 바로 운전을 못 허고 딸이 서울로 갖고 간 차를 이듬해 여름방학 때 가지고 왔어. 그래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운전을 열흘간 연수받아서 운전을 허니까, 특별한 일만 있으면 차 속에 가서 울고, 그렇게 해서 그 이듬해에 애들을 여운 거야.  애들을 여웠으니까 할 일은 다 했는데, 그러고 그 해에 IMF가 왔을 거야. 쉰다섯인가 넷인가 모르겠네. 그 해에 IMF가 왔어. 빚은 작지만 IMF가 오니까 장사가 거짓말처럼 안 되는데, 집에 남자가 없으니까 IMF가 심각한 줄도 몰랐어. 꽃집의 수익이라는 게 새학년 시작하면서 환경정리할 때, 그 다음에 그때만 해도 레스토랑 꽃장식이 유행이었어. 그래서 백만 원어치, 2백만 원어치, 이렇게 여관이라든가 자기건물 이런 데를 장식을 했었어. 봄에는 개나리꽃 조화, 여름에는 장미꽃 조화, 가을에는 감 같은 것,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장식, 한때 그렇게 장식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걸 허면 목돈이 되는 거야. 그놈으로 빚진 걸 갚고 빚진 걸 갚고 그랬는데, IMF가 왔어도 나는 그 조화를 당연히 할 줄 알고 도매사에서 몽땅 사놨어. 미리 안 사놓으면 수입이라 없어. 몇 백만 원 어치를 샀는데 한 군데 허고 안 허는 거야. 재고가 나면 개나리는 그때 못 팔면 1년 재고잖아?   그래서 인자 장사를 해야겄다, 품위고 뭐고 소용없다, 그래가지고 인제 오거리로 나오는데 싹싹 긁은 게 3천만 원이야. 3천만 원 전세, 권리금 1천5백만 원, 간판허고 어찌고 헝게 한 오백만 원 나가고...그 5천만 원이 전 재산이라. 아파트 하나 있고, 빚은 5천만 원 져 있고.. 니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 니 이름을 대거라 그런데 이 빚 때문에, 오거리고 가서 열심히 해도, 내가 강의를 다니니까, 한지공예 배우면서 강의하니까 가게를 누구한테 맡겨야 하는데, 종업원 월급 70만원, 집세 70만원 빼주기가 힘들어. 장사가 그렇게 안 되더라고. 그래가지고 가게를 파는데 나는 권리금을 주고 들어갔는데 권리금이 없어져버린 거야. 그래가지고 제일 먼저 내 신용카드를 없앤 거야. 두 개가 있었는데 없애버렸어. 돈 몇 백만 원 가지고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디 갈 데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들어간 게 구이로 들어간 거야. 아무런 사회생활도 하지 말고 죽은 듯이 여기서 작업만 해야겠다, 그런데 그게 내 큰 착각이었던 거야. 거기 이름을 뭘로 할까 그러다가 지가, 종이지자, 집가자 그렇게 헐라고 했더니, 지가 뭐라고~ 사람들이 그런다는 거야. 그래도 니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 니 이름을 대거라. 그래서 내 이름을 건 거야. 사주하는 스님들이 가끔 나보고 내 이름은 산꼭대기에다 붙여놔도 살아남을 거다,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 막다른 길에 다다르니까, 내가 천주교인인데도 그런 말들이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김혜미자 한지공예관, 그렇게 지었어. 엄마! 한옥마을에 땅 하나 샀어 그렇게 거기에서 한 1년 6개월간을 그러고 있는데, 거기는 완주군이잖아. 전주가 한지 한지 하는데 거기는 완주군이고, 또 중요한 것은 거기에다 김혜미자 한지공예관이라고 갤러리가 생기니까, 거기 옆이 관광지가 됐잖아. 어, 김혜미자가 왜 여기에 있어? 허고는 그냥 아무 때나 들어와서 구경허고, 구경허다가는 자고 갈라고 허고,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찾아와서는 저녁 먹고 가고...내가 어려운 줄을 모르니까. 그런 것을 아는 친구들은 올 때 라면이라도 한 박스 사오고, 제자들은 쌀도 사오고 그랬는데, 바깥에다가는 내가 자존심이 있어서 어렵네 어쩌네 이야기를 안했어. 그렇게 1년 반 동안 거기에서 생활하고 나서 그 돈 가지고 성모간호학원 그 자리로 나온 거야. 아파트는 있지만 죽어도 그것은 못 팔게 허드라고. 아파트 값도 자꾸 떨어져서 9천만 원에서 지금은 6천만 원 정도 가는데, 큰딸이 시댁에 들어가 있다가, 다시 거기 가서 지금 살아. 그래서 지금도 그 아파트는 빚진 걸 갚아 나가고 있어요. 우리 둘째딸이 지금 마흔 살인데, 제일 걸리는 게 엄마였겠지. 전주시에서 한옥마을에 들어오면 5천만 원을 주잖아. 그 소식을 듣고는 “엄마, 땅 하나 사서 집 짓자” 그래서 “걱정도 말어, 엄마는 죽더라도 아파트에 가서 죽으면 되고 이 50평에서 작업 하고 나는 불평 하나도 없다, 꼭 엄마를 도와주고 싶으면 엄마 통장에 5천만 원만 넣어주면 내가 평생 너한테 손 안 벌려.” 이렇게 말했는데, 내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7년째 강의를 하거든. 아무런 사회생활도 하지 말고 죽은 듯이 여기서 작업만 해야겠다, 그런데 그게 내 큰 착각이었던 거야. 거기 이름을 뭘로 할까 그러다가 지가, 종이지자, 집가자 그렇게 헐라고 했더니, 지가 뭐라고~ 사람들이 그런다는 거야. 그래도 니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 니 이름을 대거라. 그래서 내 이름을 건 거야. 사주하는 스님들이 가끔 나보고 내 이름은 산꼭대기에다 붙여놔도 살아남을 거다,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 막다른 길에 다다르니까, 내가 천주교인인데도 그런 말들이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김혜미자 한지공예관, 그렇게 지었어. 하루는 강의를 갔다가 고속버스를 타고 오는데 전화가 왔어. 그래서 “여보세요?” 그랬더니 “엄마 축하해!” 그래. 우리 둘째딸이. “뭘?” 그랬더니 “엄마 집 지으라고 땅 하나 한옥마을에 샀어.” 그래. 우리 둘째 사위가 국립과학수사원에 근무를 하면서 목동에 오피스텔을 하다 얻었는데, 오피스텔 전세값이 7천만 원인가 그렇대. 그런데 장성 국과수로 내려오게 되니까 그 전세금 빼고, 즈그 아파트 대출받고 그렇게 해가지고 1억 7천을 주고 이 땅을 산 거야. 시댁에서도 찬성을 했대. 그렇게 상의를 해서 이 땅을 샀는데 사위도 고맙고 사돈도 고마워. 아무리 지가 돈을 번다고 해도 시부모 신랑 눈치 보이잖아. 이제는 많이 편해졌어 그렇게 이 앞집에서 1년 반을 살면서 이 집을 지었어. 그 당시만 해도 한옥 짓는 사람들이 없어가지고 집짓는 사람을 잘못 만나가지고 이걸 1년 6개월 걸렸어, 집짓는데. 그러고도 돈이 많이 들어갔는데, 내가 설계도를 볼 줄 몰라가지고 전기가, 우리가 전기가 8개인데 10만원씩 돼 있더라고. 근데 이만한 형광등 만 원짜리, 이걸로 계산을 헌 거여. 우리 딸이 “엄마 집짓는 걸로 만족하고 더 이상 빚 지지마.” 그래. 그래도 이렇게 한옥 지어놓고 길쭉한 형광등 달 수는 없잖아? 그래서 이걸로 바꿨더니 전기값만 백만 원이 넘어. 그걸 이해를 못해 우리 딸은. 그래도 내가 돈은 없어도 마음은 넉넉히 베풀고 살아서 제자들이 많이 도와줬어. 이제는 많이 편해졌어. 이렇게 하면서 우리 기전대학에 전통과라는 게 생기면서 누리사업으로, 저기 동락원이 우리 학교 것이잖아. 우리 학교에서 한옥체험관으로 운영을 했었어. 그래서 전통과가 생겼는데 내가 고등학교 졸업에 대학교수가 될 하등의 자격이 안 되잖아? 그런데 예전에 술박물관 관장 하던 이준호 교수가 한동네 사는데 인사를 못 드렸다고 그래. 그래서 누구냐 그랬더니 술박물관 관장이래. 그래서 그러라했더니 기전대학 학장 아시냐고 물어봐. 아버님 명함만 받았지 잘 몰라, 그랬더니, 여기 계신데 인사 한번 하실래요? 그래. 그래서 입은 옷 위에 코트만 걸치고 가서 인사를 했어. 근데 그 분이 참 소박해갖고 우리 추웅게 한옥체험관 가서 이야기 합시다, 그래. 그래서 이불을 덮고 옛날처럼 다리 뻗고 앉아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했어. 시간 됐으니 밥 먹고 가세요, 그래서 거기서 또 밥 먹고 그러고 왔는데 한 두 시간쯤 후에 이력서를 내래. 그래서 아이고 학장님이 잘 몰르고 대학 나온 줄 알고 그러신 모양이라고 막 웃으면서 나는 여고 출신이라 안 된다고 그러면서 웃고 넘어갔어. 그런데 다 알고 계신다고 오는 토요일까지 이력서를 내라고 그래. 그래서 사위들하고 상의를 했지. 그랬더니 주방장도 교수 돼요, 그래. 그래갖고 교수 됐잖아. 돈보다 명예보다 한지가 좋아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가지고 발령까지 난 상태에서 또 번복을 했어. 다른 교수가 학생 30명 데리고 온다는 바람에. 30명 학생을 데리고 온다는데 학교 운영허는 입장도 이해가 되드라고. 그런데 나보고 양보허는 입장에서 꽃꽂이를 가르치래. 교수면 되지 않냐 이거지. 그래서 그건 아닙니다. 전통 허는 사람들이 학벌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는데, 내가 교수가 되면 그 후배들에게, 외길을 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꿈이고 희망인데, 내가 변질 돼서 명예 때문에 돈 때문에 꽃꽂이를 가르치면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절망을 주겠느냐? 나는 돈이고 명예보다 현장에 있고 싶다, 그러고 집으로 왔어. 거절을 허고 왔더니 또 3일 만에 또 불러가지고 평생교육원 원장 보직을 준 거야. 그래서 초빙교수로 1년, 그 이듬해에 전임교수가 됐지. 정말 파격적이지. 내가 이력서가 안 되니까 교육부에 그걸 낼 때 내가 그동안 전시했던 거 강의했던 거 그것 화면을 다 보내가지고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 내가 작년에 학교를 그만 뒀지만 지금도 학교 대소사 있으면 작품 가지고 가서 진열해서 학교 빛내주고, 공식적인 자리에 항상 초대해 주고, 그래서 참 고맙게 생각해.   한지를 천팔백 겹을 붙였더라고 그리고 내가 30일 날 청와대에 가는데, 내가 아니래도 국새를 전주사람이 했다는 데 의미를 두는 거야. 왜그냐면 전주한지만 갖고는 안 했어. 청와대에서 지시를 내리기에는 안동한지로 하라고 그랬대.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내가 허는 한은 내가 전주한지를 대표하는 어른이라면, 전주한지가 아닌 것 가지고 한다면 떳떳허지 못해서 못헌다, 반반으로 하게 해봐라, 그렇게 해서 만오천원짜리 전주한지, 만구천원짜리 안동한지, 그렇게 반반씩 허게 된 거여. 이번에 국새 작업이 여러 사람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나한테 왔을 때, 내가 수락한 이유는 한지를 붙여서 위에다가 전지로 문양을 판다고 하더라고. 그렇다면 내가 해보겠다 그러고 달라 들었는데 막상 그걸 보니까 한지를 천팔백 겹을 붙였더라고. 그런데 허다 보니까 한 백 겹 붙이니까 이게 빠개지는 거야. 그래서 내가 표구점도 가보고 옛날 사람도 만나보고 그래봤지만, 어디 물어볼 데가 없어. 한꺼번에 붙여가지고 6개월간 말리라는 사람도 있고, 그럼 탕이 날 텐디, 그래가지고 내가 어머니 모시옷 같은 다릴 때 쌀 이겨서 된풀 멕이면 그 놈으로 풀 멕여서 두드려서 잡아댕기고 다듬이질허고...그런 방법으로 한번 해볼까 해서 한 두 달간 시행착오를 많이 했어. 해놓으면 빠개지고 붙여놓으면 배가 볼록 나오거나 뒤로 이렇게 되거나...이게 반듯해야 허는디. 이제 12월말에 완성해서 행자부에 가는 것이 그건디, 날짜는 자꾸 뽀닥뽀닥 가고 그렇게 허다가 두드리니까 뽀개져. 아 두드리면 안 되겠다, 그냥 자근자근 두드려보고, 발로 밟고, 말르고 난 뒤에 풀질을 또 해서 말리고 햇볕에 안 내보내고 바람결에 말리고, 근데 성공했다 싶었는데 여름 장마철에는 몇 장도 못 붙였어. 날이 좋을 때는 세 시간에 한 장씩도 붙이는데...그러다가 가을 되니까 내가 베트남 민속학 박물관 전시회에 갔지, 스페인 갔지, 중국 상해 초대전 갔지, 아 한 달을 비워야 하는데 미치겠네. 외국 갔다가 와서는 4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서 종이 두드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또 두드리고, 4시간에 한 번씩 잠이 깼다니까. 그때 습관이 돼갖고 지금도 잠을 자다가 자주 깨. 내가 만드는 부분은 국새의 요판 요석 부분인데, 국새 방석 부분이야. 한지로 4센티미터 두께라고만 나와 있지 만드는 방법이 안 나와 있어. 그래서 좀 겁나더라고.     아 내가 참 대우를 받는구나 내가 시하고 좀 언짢은 일이 있었는데 그 동안에 작품 상 받고 헌 것들, 도에서 여성회관에서 대통령 준다고 선물 기증하라고 하면, ‘그래 여기까지 오셨는데...’ 하면서 기증했는데 아무 흔적이 없더라고. 근데 재작년 6월에 오셨을 때 내가 직접 선물을 드렸더니, 어머! 은수저 두 벌이 와, 시계 두 개가 와, 1월 1일 되면 연하장 와, 연하장 받았냐고 경호원이 전화가 와. 어머 직접 주니까 이렇게 다른 거야. 그동안 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거야. 이번에 오셨는데 시에서 나보고 몇 개를 가져가더니 하나는 선물을 하래. 개인전 끝나고 6월 초에. 그래서 바로 박물관에서 한 달간 전시를 하고 아직 열흘도 안 돼서 아직 사랑뗌도 안했는데...내가 나이도 많고 내가 이 작품 할 만한 시간도 그렇지만 눈도 어두워지고...내가 작품을 아끼는 건 아껴서 모실려고 그런 게 아니고 대통령한테 주면 좋지요. 저 죽고 나면 자식들이 이것 다 갖겠습니까? 박물관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제자들 자식들한테 하나씩 주고 제가 가야지요. 그리고 제가 전시 끝나고 열흘밖에 안 돼서 아직 사랑뗌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 오면 꼭 시에서 구입을 하시고 드리세요. 이제는 이렇게 주는 것은 안 할랍니다. 초창기에는 내가 몰라서 그렇게 했지만,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기증하라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한지 살리자고 하면서 한지하는 사람들 한 푼이라도 도와줘야 할 시에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랬지. 이번에 나 개인작품 천만 원짜리 팔았잖아. 나는 우리 것을 좀 콜렉션을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야. 나는 그 마음이 고마워. 뭐 깎아줘 어째줘 소리 안 해서 내가 예단함 2백만 원짜리 하나 해줬어. 거기서 선생님 좀 싸게 해줘요, 이런 소리 했으면 내가 더 안 주지. 근데 “선생님 비싸고 싼 건 상관없어요. 제가 갖고 싶으니까요. 뭣 허러 이태리가서 천만 원짜리 그런 걸 사와요. 대한민국에서 하나뿐인 걸 제가 가지면 그것도 좋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얼마나 고마워. 그게 나는 예의라고 생각해. 나는 파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나는 유물로 생각하고 이제 전라북도박물관이든 서울민속박물관이든 그런 곳에 두고 우리 제자들이 선생님 작품이 여기 있네, 그러면 좋지. 다행히 우리 딸이 내 뒤를 이어가니까 마음이 놓여. 그렇게 살고 있어. 앞으로는 유물 재현을 하려고 생각 중인데, 만드는 방법이 없어서 좀 어렵지. 그래서 목수를 데리고 수장고에 들어가서 치수를 재고 그러지. 유물은 사진만 보고는 못 만드니까. 이건 옛날 선비들이 쓰던 갓우산인데 비올 때 이것만 쓰면 아무리 체격이 좋아도 비를 안 맞아. 한지를 꼬아서 들기름을 발랐는데, 안에도 박쥐가 있고 밖에도 박쥐가 있고 이런 문양도 다 그대로 재현한 거야. 유물을 재현할 생각이야 어려울 때는 한지 백만 원어치만 사놓고 보는 게 소원이었어. 한지 열 장 사오면 한 장이 모자라서 또 그 한 장 사러 서울 올라가고... 그랬어. 어떻게 어떻게 백만 원을 모아갖고 서울을 가면, 갈 때는 ‘70만원어치만 한지 사고 30만원은 옷도 좀 사고 그래야지...’하는데, 올 때는 배도 쫄쫄 굶고, 그 돈으로 한지를 다 사고 차비만 남겨갖고 버스를 타고 와. 그렇게 한지를 갖다 놓으면 쓰기도 싫고 아깝고 그래서 내가 ‘한지를 백만 원어치만 쌓아놓고 보고 있었으면...’ 그랬어. 지금은 한 번씩 가면 스무 가지 서른 가지 넘게 사니까 한 2백만 원어치씩 사오지. 지금은 내가 무슨 불만이 있다고 하면 벼락 맞지. 감사하고 감사하고, 딸이 생각보다는 감각이 있어서, 지금은 한국은행 폐전을 가지고 귀걸이도 만들고 브로치도 만들고, 그것 가지고 한국은행 강의 가고, 목포박물관 강의 가거든. 앞으로는 유물 재현을 하려고 생각 중인데, 만드는 방법이 없어서 좀 어렵지. 그래서 목수를 데리고 수장고에 들어가서 치수를 재고 그러지. 유물은 사진만 보고는 못 만드니까. 이건 옛날 선비들이 쓰던 갓우산인데 비올 때 이것만 쓰면 아무리 체격이 좋아도 비를 안 맞아. 한지를 꼬아서 들기름을 발랐는데, 안에도 박쥐가 있고 밖에도 박쥐가 있고 이런 문양도 다 그대로 재현한 거야. 다들 이걸 기생이 쓰던 걸로 착각하는데, 기생이 쓰던 것은 70센치. 선비들이 쓰던 것은 90센치. 외국인들이 오면 이걸 써보고 그렇게 사진 찍기를 좋아해. 그래서 이런 것을 앞으로 계속 만들어볼 생각이야. 그렇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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