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 |
[저널초점] 위도 띠뱃굿
관리자(2008-03-26 19:07:40)
작은 띠배에 모든 재액을 실어 보낸다.
위도는 풍부한 어족자원으로 많은 어선들이 왕래하면서 큰 마을로 형성된 곳이다. 위도 대리는 우리가 잘 아는 위도 띠뱃굿이 행해지는 곳이다.
대리에서 음력정월에 행해지는 당산제는 무형문화제 제82-다호로 지정된 위도 띠뱃굿으로 잘 알려져 있다. 띠뱃굿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조선 중기 때부터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빌고 모든 제액을 바다에 띄워 보내는 서남권 해안마을의 대표적 토속신앙 행사로 자리 잡아 오다가, 조기잡이의 쇠퇴와 함께 큰 굿이 없어지고, 당제까지도 시들해졌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다가 배를 타고 다니는 해적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이도곤’이라는 마을 이장이 나서서 주민들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줄다리기를 포함해 띠뱃굿을 부활했다고 한다.
매년 정월 초사흘날 진행되는 위도 띠뱃놀이는 마을과 바다를 수호하는 신을 받드는 원당제, 주산돌기 가래질, 술배놀이, 용왕제에 이어 바다에 제액을 띄워 보내는 띠배띄우기 순서로 진행된다.
이곳에서는 당산제를 원당굿 내지 원당제라고 부른다. 정월 초사흘에 지내며, 제당은 원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당에 오르면 칠산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조기잡이가 한창일 때는 대리 앞바다에 어선들이 수시로 왕래했으며, 이곳을 지나는 타 지역 어선들도 원당 앞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당집에는 원당마누라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들이 모셔져 있다.
원당제에 사용되는 제물로는 돼지, 삼색과일, 절편 등이 있는데, 돼지는 흑돼지를 만을 사용하며 제의 하루 전날 제관 등이 직접 잡는 것이 특색이다. 여객선이 다니지 않던 20~30년 전 전만해도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직접 배를 빌려 줄포로 나와야 했다고 한다. 제의에 사용할 물건 값은 절대 깎지 않았으며, 이 관습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제의가 시작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은 마을 입구와 보존회관에 금줄을 친다. 그리고 제의 때 사용할 띠배 제작 장소를 청소한다. 원당제에 진행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선착장에 모여 띠배를 제작한다. 당산굿이 진행되고 농악대의 풍물가락이 섬 주위에 울려 퍼지면, 선착장에 모인 사람들은 돛대, 닻, 그물, 뱃기, 허수아비 선장과 선원 등을 두루 갖춘 길이 3m, 폭 2m 규모의 띠배를 만들기 시작한다. 띠배에 태울 허수아비 아랫도리에는 남성을 상징하는 큼직한 형체가 달려 있으며, 이것은 풍요를 기원하는 주민들의 성신상이 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원당제가 끝날 쯤 띠배도 완성되는데, 원당제에 참여한 풍물패 등은 마을로 내려와 주산돌기를 한다. 원당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내려오면 띠배 앞에서 본격적으로 용왕굿이 진행된다. 무당이 주제자가 되어 진행되는 용왕굿이 끝나고 나면, 그때 비로소 띠배를 바다에 떠내려 보낸다. 모든 재액을 실은 띠배가 바닷가 부근에서 멀어져 가면 띠배를 끌고갔던 어선에 승선한 농악대는 풍물을 두드리고 춤을 추며 한해의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대리에서 행해지는 원당제에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원당제를 지낸 날 밤에 마을의 선주들이 당집의 맞은 편 산에 올라가 도깨비불을 본다는 것. 바다 가운데에 도깨비불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한 해 동안 어장이 제일 잘되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서로 먼저 그물을 넣었다.
위도 띠뱃놀이는 그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지난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서남해안을 대표하는 중요한 동제로 인정받고 있다.
<「전통문화예술의 정리 전라북도 마을굿·산조」에서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