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 | [문화와사람]
작은 풀섶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판화가 지용출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4-18 17:14:19)
'한마디로…' 식의 일견 위험한 표현을 써 보자면, 그의 작업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시선 주기다.
흡사 백두대간의 힘찬 산맥을 닮은 고목의 거친 등걸이나 발아래 놓인 작은 풀잎, 집안 어디에서든 흔히 목격되는 마늘과 거미. 자연과 생명, 그리고 '아름답다'는 보편적 미의 가치에서 한 발짝 비껴선 듯한 일상적인 것들이 그의 화폭에 담겨지는데, 작품의 소재들은 작가가 오랫동안 시선을 주고 지켜봐 온 것들이다. 섬광처럼 이는 순간의 아름다움보다는 진중한 여운을 더 선호하는 작가다.
판화가 지용출(40). 작업실이 있는 김제시 금구면 선암리 싸릿재 마을로 들어서는 동안, 그는 새로 난 도로며 저수지에 대해 설명이 구구하다. 싸릿재 마을이 이미 그의 마음을 꽉 채워놓고 있음을 짐작하겠다. 3년 전 오랜 염원 끝에 장만한 개인 작업실은 일종의 마지노선이다. 화가로서 스스로에게 짐을 지워놓은 것이기도 하고,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기도 하다.
"작업실은 오랫동안 별러온 일이었는데, 평생 해야 할 일이라는 무게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죠. 그림과 제 삶의 전환을 느낀 것도 작업실을 마련하면서였으니까요."
서울 토박이인 그는 올해로 9년째 타향살이를 맞고 있다. 지역을 작품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다는 점이나 '타지인'이라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인정받는 화가로 안착해 가고 있는 상황만으로도 이제 '타향살이'라는 말은 그에게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 되었지만.
삶의 공간이 안겨준 새로운 감성의 발견
이곳과는 우연한 계기로 인연이 닿았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아내를 만나 발령지를 따라와 보니, 부안 곰소였다. 그러나 시간이란 때로 우연한 것을 필연으로 돌려놓는 훌륭한 안내자이기도 하지 않은가. 또 마음을 얹어놓은 곳에서 길이 열리기 마련이고.
"94년 집사람 발령지가 변산이었어요. 처음엔 길어야 3년, 5년? 그 정도 생각하고 내려왔죠. 여기는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사는 게 어디 계획한 대로 따라주기만 하던가요. 이곳에 살면서 미적 가치나 그림의 대상이 조금씩 변해갔다는 게 저한텐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그곳에서 마치다 보니 늘상 도시나 도회적인 이미지, 그리고 문명적인 소재들을 찾아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 살면서부터는 자연이나 생명에 대해 뭔가가 느껴지게 되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정이 들었죠."
그는 전북민족미술협회와 전북판화가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시절 이른바 '운동권' 출신이었던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늘 사회 참여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판화 쪽에서는 특히 목판화가 이러한 경향을 담지하며 대중들에게 깊은 인식을 심어줬는데, 저항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폭넓게 선택됐던 '상징'과 '간결함'이란 표현 양식이 목판의 특성이나 미덕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목판뿐만 아니라 석판이나 동판 등 다양한 판법을 구사해 온 그이지만, 내용면에서 그 역시 상징과 간결함으로 날카로운 저항정신을 표출하던 민중미술가였다. 90년대 초반 서울 인사동이나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에 들어가 지금까지 민족미술운동의 상징처럼 인식돼 있는 벽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불과 몇년 전 작품만 해도 화면을 가득 채운 무겁고 힘이 들어간 작품들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는데, 그는 대학 시절의 사상과 이념이 여전히 고정화되어 깨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동판보다는 목판을 선호하게 된 것이 지역에 내려와 터를 잡기 시작한 94년 무렵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변화로 읽힌다.
"날카롭고 차가운 동판의 느낌보다는 섬세함은 덜하지만 인간적이고 따뜻한 목판의 매력에 조금씩 마음이 실리더라구요. 제 개인적인 삶이나 화가로서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자연이나 생명에 대한 관심과 외경심이 싹트면서 작품 활동에도 조금씩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 보니 지역 정서에 조금씩 동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죠."
삶의 공간이 바뀌면서부터 얻게 된 화가로서의 새로운 감성도 그렇거니와 민족미술에 대한 그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더욱이 '투쟁의 대상'이 확실했던 시절에 비하면 사회적인 관심사가 세분화하고 있거나 전문성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높아져 가고 있는 상황도 그림의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계기였다.
"민족미술 운동에서 말하는 진보의 개념을 이제 폭넓게 봐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가 많습니다. 저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 많구요. 딱히 반골 기질이나 저항정신이 아니더라도 건강한 생각으로 사회 현상을 바라보고 파악하려는 노력이 그림에 반영된다면 그것이 지금의 진보적 민족미술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즘 그림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개인의 전문성이 갖춰지지 않으면 목소리를 내기 힘든 시대니까요."
파꽃과 더덕, 그리고 나이 먹는다는 것
그는 이 같은 사고의 전환이 개인 작업실을 갖게 된 때와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후회도 많지만, 작업실을 마련한 뒤 처음으로 가졌던 '오래된 나무/작은 풀섶들'전(2001. 전주 서신갤러리)에 유난히 애착이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다지 '예쁠 것도 없는' 마늘이나 호박, 거친 나무 등걸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인데, 그것은 개인적인 나이 먹기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계(視界)가 큰 산이나 마을 풍경에서 고목의 등걸로, 하늘거리는 작은 풀잎 등으로 좁혀지고 있다는 점도 나이 먹기와 같은 맥락에서 읽혀진다.
심미적 관점에서야 마냥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지만, 소소한 사물들에 밀도 있는 관심과 깊은 시선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여유와 균형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여유와 균형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나이 먹어 간다는 것의 중요한 미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계가 좁혀지고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긴데,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대부분, 대부분이라는 표현을 써도 괜찮을진 모르겠지만 그림 그리는 분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부터는 외양보다 내면을 그리고자 하는 경향이 짙어지거든요. 반추상에서 추상으로 선회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그렇진 않을 것 같아요. 왜냐면 '그림은 내 거다' 라는 식의 생각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거든요. 자신의 무의식 세계만을 고집하는 건 미술이 갖는 진지한 의미를 너무 주관화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개인적으로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내면으로 파고드는 개인적인 작업보다 사회와 관객을 향해 열려있는 작업을 더 선호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가벼운 감탄이나 아름다움보다 오래 두고 여운이 남는 소재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 습관도 자신의 감상을 객관화하기 위한 일종의 거리 두기로 읽힌다. 여전히 민중미술가 출신의 진지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순간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쉽게 그림으로 옮기지 않는 편입니다. 오랫동안 여러 번 보고 나서도 처음의 그 느낌이 여전한 것들, 그때까지 그리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으면 그 때 비로소 그림에 옮기는 버릇이 있어요. 소재를 그림을 통해 시각화하는 그 순간, 그림은 이미 자기 것이 아니라 관객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신중해진다고 할까요."
'호박과 나비' '파꽃과 더덕' 등 일상적인 소재의 그림들이 들뜨거나 넘치기보다 그저 담담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 때문인지 소재와 판법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는 않다. 고목의 등걸이나 내장산 등을 묘사한 강하고 힘찬 생명력을 담은 선 굵은 그림이 있는가 하면, 지난 12월에 열린 '수상기념전'에 내놓았던 파나 양파처럼 금새라도 손에 잡힐 듯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그림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전북청년작가상을 수상하고 지난해 기념전을 가지면서 대작 중심에서 아기자기한 그림과 일상적 소재들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는데, 그 때문인지 작품의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하다.
"굳이 판화만 고집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여러 장르를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싶고, 이번 수상기념전에 선보인 그림들도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가치관이 깨어있지 않으면 사물이나 아름다움도 피상적으로밖에 보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저에겐 민족미술이라는 전통이나 이념도 소중하고 일반적인 미적 가치관도 중요한 부분이죠. 다만 미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공부해 보고 싶다는 것이 지금 저한텐 가장 중요한 고민거립니다."
아직 배울 것과 느낄 것, 시도해 봐야 할 것들이 많다는 의미다. 올해 미혹함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에 들어섰지만, 그는 다섯 번의 개인전(1997 서울 나무갤러리, 1998 전주 서신갤러리, 1998 전주 미주치과, 2001 전주 서신갤러리, 2002 전주 얼화랑)을 치르고 이제 막 '청년 작가'의 반열에 오른 젊은 화가다. 서울 토박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 온 만큼, 가야야 할 길도 아직 멀다.
지금은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사물의 내면 가치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 전북 지역의 역사적인 장소나 의미 있는 공간을 그림으로 옮겨볼 계획이다. 전북의 산하와 정서를 그가 어떻게 해석하고 내면화하고 있을지, 또 자신이 속한 삶의 공간에서 어떤 가치들을 포착해 냈는지 그가 보여줄 새로운 작품들에 사뭇 기대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