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 |
[서평]『연민』
관리자(2008-01-18 22:22:15)
연민이 사랑으로 오해될 때
김관우ㅣ전북대 독문과 교수
학과 종강모임은 으레 시내 음식점에서 맛있는 안주와 곁들여 늦은 저녁까지 토론으로 이어졌던 것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풍천장어로 점심을 하고 고창읍성과 고인돌유적을 둘러보자는 한나절 일정의 이번 종강모임은 결과적으로 새롭기도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출발하면서는 다소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슈테판 츠바이크가 독일 작가 맞죠?” “츠바이크요? 아니, 오스트리아 출신 아닌가요?” 갑작스레 날아든 질문이 순간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이내 결코 낯선 작가가 아님을 기억의 저 편에서 되살릴 수 있었다. 오래전에 내게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제목을 가진 작품 “모르는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의 작가가 아니던가? 그렇다. 그는 1881년 빈에서 태어났으며 당대의 그의 슬픈 조국 오스트리아의 운명을 닮은 대표적인 독일어권 작가이다.
관련 자료들을 접하고 보니 국내에서는 1996년에 “광기와 우연의 역사 1”이 첫선을 보인 이후로 이미 여러 편의 단편들과 전기소설들이 우리말로 옮겨져 국내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프랑스의 로망 롤랑,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독일의 헤르만 헤세, 러시아의 막심 고르키와 같은 명망 있는 작가들과 폭넓은 교분을 다져왔을 뿐만 아니라 첫 째로는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두 번째로는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그리고 마지막에는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에 대한 에세이집을 출판할 정도로 왕성한 글쓰기 작업에 매진했던 작가이다. 순차적으로 볼 때 『세 명의 대가들』, 『데몬과의 투쟁』, 『세 작가들의 인생』이 바로 그의 손을 통해 결실을 맺은 에세이집들이다.
“서적을 불태울 때에는 결국 인간까지도 불태우게 된다”는 하이네의 말이 끔찍한 현실로 나타난 저항 작가들에 대한 테러 즉, 1933년 5월에 일어난 나치 추종자들에 의한 분서사건에서 츠바이크 역시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는 군 신문의 기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도하고부터 반전 드라마를 무대에 올리고 평소에 기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반대하며 틈이 날 때마다 유럽 통합을 위한 강연을 하고 다니는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서사건 이후에도 다행히 그의 책이 잠시 조국에서 출판되기도 했지만 끝내 나치에 의해 오스트리아 합병이 이루어진 1938년에 결국 모든 책이 몰수당해 소각되고 판매금지령이 내려짐으로써, 피신했던 런던에서 부득이 영국 시민권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고 부인 프리데리카 폰 빈터니츠와 이혼하는 비운을 맞는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인 1939년에 비서 로테 알트만과 재혼을 하고 그가 생전에 완성한 유일한 장편소설인 『연민』(원제는 ‘마음의 초조함’)이 런던, 스톡홀름, 암스테르담에서 동시에 출판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그 뒤에도 영국에서 영화로, 독일에서 방송극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연민』은 프롤로그에서 제1차 세계대전 때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훈장을 받은 이른바 ‘전쟁영웅’인 전직 기병대 소위 안톤 호프밀러와 반전사상을 외치는 작가인 일인칭 화자 ‘나’와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화자의 입을 통해 소설 속의 이야기가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에 기인한 허구적 내용이 아니라, 군대의 명칭과 주둔지 그리고 등장인물의 이름만을 바꾼 것 이외에는 모든 이야기가 사실임을 독자들에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4부로 구성된 본 장면에서는 스물다섯 살의 활달한 소위의 가정환경(4남 2녀의 소박한 공무원 가정 태생)과 기병대 근무의 배경이 소개되고, 그가 주둔지의 부유한 귀족인 랴요스 폰 케케스팔바의 ‘마법의 성’의 파티에 영광스러운 초대를 받게 된다. 여러 명의 여자들과 어울리며 능숙하게 춤 솜씨를 자랑했던 소위는 마침내 집주인의 딸이면서도 조용히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연한 파란색 옷을 입은 예쁘고 가냘픈 그녀’ 에디트 폰 케케스팔바 앞에 나아가 당당하게 춤을 청한다. 그 순간 무도회장은 끔찍한 소동이 벌어지고 만다. 불구의 다리를 가진 그녀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절규하는 외침 같은 거칠고 원초적인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장애인 소녀에게 춤을 청한 자신의 ‘실수’를 심지어 ‘범죄’로 인식하는 소위의 사과 방문과 연이은 만남이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면서 두 사람은 ‘연민의 감정’과 ‘연민의 쾌락’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치유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소위의 역할과 존재를 강조하는 주치의 콘도르 박사와 케케스팔바의 간청에 못 이겨 ‘그녀가 회복되면 그녀와 결혼할 수도 있다’는 소위의 대답은, 다름 아닌 ‘신처럼’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그녀가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치료에 전념하겠다는 의지의 원동력이 된다.
그녀에게 키스하고 반지를 받음으로써 약혼을 하지만 그녀가 결코 치료가 불가능한 신체불구 여인임을 인식하고 부대 동료들에게 약혼 사실을 부인하는 소위는 결국 장교로서의 명예롭지 못한 자신의 불량 양심을 ‘권총자살’로 책임을 지려 한다. 그러나 연대장 부벤칙의 도움으로 부대 전보의 명을 받아 새벽에 부대를 빠져나와 도망을 치게 된다. 끊임없이 갈등하던 마지막 순간에 소위는 삶의 등불이 꺼져버린 에디트가 테라스 밖으로 몸을 던지는 ‘끔찍한 영상’을 떠올리며 에디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결심을 하고 눈이 먼 클라라를 반려자로 삼아 헌신하는 콘도르 박사를 찾는다. 불행하게도 에디트의 ‘예고된 자살’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4부에서는 공교롭게도 바로 그 날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저격사건이 발생한 1914년 6월 29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전쟁을 도피처로 삼은 ‘용감한’ 전쟁의 영웅인 소위 호프밀러의 ‘우유부단함’과 ‘연민’이 결과적으로 자기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자괴감 때문에 그는 평생 어둠 속에서 숨어 지내며 살아간다. 에필로그에서 ‘양심이 알고 있는 한’ 저지른 죄는 결코 망각될 수 없다는 소위의 참담한 고백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츠바이크는 연민이 사랑으로 오해될 때 일어나는 처참한 결과를 현실 속의 이야기를 통해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그가 인간의 망상이나 집착 같은 비합리적인 심리 상태를 중요시 여기고 있는 점은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인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막역한 관계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확산 소식에 우울증에 빠졌던 츠바이크가 1942년 브라질에서 ‘자유로운 의지와 명료한 정신 상태’로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며 외로운 망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모습은, 바로 소설 『연민』에서처럼 불같은 열정적인 사랑보다는 끝까지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실천적 의지를 보여주는 참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김관우/ 현재 전북대학교 인문대 독문과에 재직하면서 주로 독일 드라마와 방송극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