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 | [문화시평]
잊고 살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시절
닥종이 인형으로 보는 우리 풍속
황춘임 주부(2003-04-18 17:10:41)
잊혀진 놀이
며칠 전에는 정말 눈이 많이 왔다. 사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눈이 내렸다. 오랜만에 흠뻑 느껴보는 진풍경이었다. 눈 내리는 사흘동안 계속해서 내 집 앞의 눈을 치웠다. 빗자루로는 어림없어 삽이며 쓰레받기며 세숫대야며 도구가 될 만한 것은 모두 동원하였다. 두 아들은 아무런 불평 없이 즐겁게 동참했다. 뜻밖이었다. 자고 나니 또 눈이 왔던 둘째 날에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갔다. 모처럼 풍성하게 눈 내리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눈을 맞으며 시내를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눈 구경 한 감상을 물으니 '동상 걸려 죽는 줄 알았다.' '눈보라가 왜 하필이면 계속 얼굴로만 달려드느냐?'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좋은 점은 전혀 없었냐니까 '초밥이 예술이었다.' '순대가 맛있었다.'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먹는 타령 뿐 이다. 내가 생각해 낸 놀이가 적절하지 못했나보다.
닥종이 인형으로 보는 우리 풍속
닥종이 인형을 직접 만나러 가기 전에 팬아시아 종이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동영상으로 먼저 그 인형들과 만났다. (2001년 10월5일부터 한솔종이 박물관의 명칭이 팬아시아 종이 박물관으로 변경되었다.) 몇 개의 장면이 자세히 볼 겨를도 없이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중에서 말타기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에 가면 어릴 적 동무들이 말타기 하자고 기다릴 것처럼 정겹고 싱싱한 장면이었다.
두 아들과 함께 종이 박물관에 도착하니 나무를 찌는 것인지 삶는 것인지, 나무 냄새가 그득하고 수증기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종이의 과거와 미래가 있는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은 몇 번 갔었기에 들르지 않고 곧장 특별 전시실로 갔다. 특별 전시실에서는 팬아시아 종이 박물관 개관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닥종이 인형으로 보는 우리 풍속'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전통 세시 풍속과 놀이를 재현해 낸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금처럼 쌍꺼풀진 눈이 아니라 가늘고 길게 생긴 귀밑눈에 펑퍼짐한 방석코를 한 우리 조상의 얼굴들을 그대로 표현한 닥종이 인형들이 있었다.
'세시'란 1년 가운데 '때때'를 일컬으니 춘하추동 계절을 이르기도 하고 '다달'이나 '일'이나 '명절'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풍속'이란 옛날부터 한 공동체가 지켜 내려오는 남다른 습관을 말한다. 그러니까 '세시풍속'하면 일상생활에 있어 절기(季節)에 맞추어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습속이라 하겠다. '24절기'는 봄·여름·가을·겨울을 분간할 뿐만 아니라'철'이 바뀜에 따른 기후의 변화까지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우리 민족에게는 '절기'와 '명절'들이 세시풍속의 기본이 되었다.
닥종이 인형작품은 음력 정월을 시작으로 춘하추동을 구분해서 전시되어 있었다. 3개월 씩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봄은 정월에서 3월까지이다. 정월부터 봄이 시작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24절기의 '입춘'이 정월에 들어 있기 때문인가 보다. 봄은 사계절의 시작일 뿐 아니라 한 해의 시작이므로 중요하다. 따라서 세시풍속 또한 다양하다. 설날이 있고 정월 대보름날인 上元(상원)도 있다. 머슴날, 삼짇날 도 있다. 부스럼 나지 말라고 부럼을 깨물고, 오곡밥을 먹는 것을 우리집은 아직까지 열심히 하고 있다. 묵은 나물도 먹고, 별의별 잡곡 다 넣은 밥도 먹는다. 맨 처음 만난 작품은 때때옷 곱게 차려입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세배를 하는 닥종이 인형들이다. '세배'하면 덕담보다는 세뱃돈이 얼마인가가 관심사가 되어 버린 지금, 그들은 참 따뜻해 보였다. 바로 옆의 유리상자 속의 인형은 '연 날리기'를 하고 있다. 목도리로 머리를 싸매고, 연이 높이 날기를 바라는 간절한 얼굴이 순박해 보인다.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다른 어떤 인형보다 한지 인형은 훨씬 매력적이다. 더군다나 작품 하나하나에 조상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들어 있어 당장이라도 함께 어울려 놀 수 있을 것만 같다. 또한 한지의 은은한 색상과 번들거리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진달래 꽃잎과 똑같은 색깔의 치마를 입고 철버덕 앉아서 '화전놀이'하는 아낙네들을 지나니 여름이다. 버들눈썹을 한 여인네들은 '그네'를 타고 맹꽁이 배를 한 떠꺼머리 총각들은 '씨름'도 하고 '고누놀이'도 한다. 여름철은 오줌 눌 시간도 없을 만큼 농사일이 바쁠 때여서 봄처럼 세시풍속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건강을 위한 풍속과 놀이를 주로 한다. 4월 초파일은 '연등놀이'를 하고 단오 날에는 머리카락이 더 검어지고 악귀를 물리친다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다. 그런데 바위틈에 숨어서 훔쳐보는 남정네들이 있다. 누굴까?
세시풍속에서의 가을은 7월부터 9월에 해당된다. 이제 바쁜 농사일도 대충 끝나 수확을 준비 할 때이다. 세시로는 추석과 백중, 칠석이 있는 철이다. '송편 빚기', '강강수월래', '단풍놀이'등의 작품이 있다. 한가롭고 넉넉한 풍경들이다. 그래서인지 닥종이 인형들의 볼은 더 토실토실 해지고 그렇지 않아도 발그레한 볼은 더욱 홍조를 띠었다.
겨울은 마지막 계절로써 마무리를 할 때이다. 고사를 지내거나 큰 굿을 하며 그동안 농사일이 잘되게 해준 하늘에 감사한다. 월동준비를 위해 동네 아낙네들이 함께 모여 '김장'을 하고, 남정네들은 간을 본답시고 얼쩡거린다. 그리고 땔감으로 쓸 장작이나 나뭇짐을 쌓아두고 이듬해에 노동을 할 수 있는 힘도 저장해 둔다. 바로 옆 또 하나의 전시실에서는 '잊고 살기엔 너무 아름다운 우리 어린 시절' 이라는 주제로 아주 커다란 닥종이 인형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전시실에서 세시풍속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작품과 대조해 보는 데 한시간 정도 소요하였다. 그 한시간 동안 전시실에 다녀간 사람은 열 명 쯤 되었다. 아이들은 길어야 10분 정도 머물렀다. 그 아이들은 인형 하나에 한지를 몇 겹이나 감싸서 만들었는지 저토록 아름다운 색깔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저 얄궂은 표정을 만드느라 몇 날을 고민했는지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한 바퀴 휘 돌고, 사진 몇 장 찍고 가 버렸다. 하기는 우리 아들들도 다 보았다며, 음료수 마시러 나가더니 함흥차사다. 도우미의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시간에 올 걸 그랬나보다.
되찾고 싶은 놀이
눈 많이 온 날, 눈 맞으며 시내를 배회하는 대신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걸. 차라리 학교 운동장에 가서 연날리기라도 할 걸. 뒷산에 비료 포대 가지고 가서 미끄럼을 탈 걸.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한 우리풍속과 놀이를 보고 나니 그런 놀이를 진작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몇 십 년 후에 세시풍속은 여름에는 '아이스링크 가기', 겨울에는 '헬스클럽 가기' 될 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제기도 차고, 멋으로 사다 논 굴렁쇠도 굴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