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 |
신귀백 영화엿보기
관리자(2008-01-18 22:18:24)
감독에게 배우는
과연 무엇인가? - <완령옥 1991>, <色ㆍ戒 2007>
<色ㆍ戒>의 탕유
탕유(湯唯 탕웨이)는 청자연적이다. 물론 <色ㆍ戒>의 왕차즈가 코발트빛 무늬의 치파오를 걸쳤을 때의 이야기이다. 상하이에 옛 애인을 두고 온 고 피천득 선생님 말씀대로 그녀가 난이요 학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세월과 작품수가 부족하지만 블루가 잘 어울리는 배우다. 이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배우를 감독 리안이 차가우면서도 냉정한 빛깔의 블루 톤으로 밀어붙인 것은 배우가 젊기 때문이리라.
일제 침략에 홍콩으로 피난 온 여대생 왕차즈(탕유)는 영국에 있는 아버지의 재혼소식에도 허망할 틈이 없다. 새로운 삶 연극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수필 같던 여대생의 삶은 항일 연극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으면서 역사의 드라마 속으로 휩쓸려가게 된다. 이제 아마추어 연극은 항일의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 막부인을 연기하며 악질 친일파 이(梁朝偉 양조위)에게 접근하라는 것. 여기서부터는 학예회의 무대가 아니다. 왕차즈는 요부를 연기하기 위해 동지들에게 육체적 순결을 공유하는 비극을 경험한다. 이제부터는 스파이가 되어야 하기에, 色을 알아야 하기에, 모택동의 말처럼 혁명은 시나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기에…….
여성 스파이의 본질이 무엇인가. 色으로 남자를 수렴하는 일. 자신을 상대에게 속여 목적을 이룩하는 일 중 몸으로 보시하여 상대를 집요하게 쓰러뜨리는 것이 그녀의 임무이다. 이 미션은 고도로 훈련된 집중력이 아니고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저 옛날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 당시 서시가 오왕 부차를 무너뜨릴 때 이미 증명한 바 아니던가. 그러나 대학생들의 떫은 풋감 같은 친일파 사냥은 한 판의 엉뚱한 살인극으로 끝나고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카메라는 청자연적 아닌 막그릇 같은 4년여 공백 뒤의 그녀를 붙드는데, 이제 1942년의 상해다. 그녀는 빵 배급 줄에 서 있던 빈민여성이지만 운명 아니 흔들리는 조국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그녀를 다시 서시로 만들고야 만다. 친일파 정보장관이라는 완강한 질서를 일탈시키고 교란시켜야 하는 본격적 프로 스파이의 길에 들어서는 것. 감독은 이 스파이가 활동할 상하이라는 폭력적 식민지 근대성의 공간을 재즈와 자동차 그리고 호텔과 다이아로 포장된 소비적 환상의 공간으로 채워나간다. 스타킹과 트렌치코트와 파라솔 그리고 그것을 파는 백화점 등 섹슈얼리티를 나타내는 세계 최대의 도시 동양의 파리 상하이! 세련과 퇴폐를 한몸에 갖는 올드 상하이 외탄의 타락한 브루주아의 사적 공간에서 그녀는 밀수로 성장한 막부인이 되어 유한녀들과 마작을 하면서 잘 적응해 간다. 이의 부인과 실내에서 마작으로 노름하는 장면은 관금붕의 영화 <완령옥>에 대한 감독 리안의 오마주이리라.
애초에 자비나 관용이 없는 남자.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흑발의 콘트라스트 속에 푸른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는 마초 양조위, 강고한 성과 같은 이 남자를 어떻게 함락시킬 것인가? 패션과 유행으로만 남자를 먹어치울 수는 없는 것. 그는 넥타이와 권총집을 풀고 그녀가 몇 개의 속옷을 벗기도 전에 청색 치파오를 찢고 여자는 트렌치코트로 몸을 감추면서 학대와 굴욕을 견딘다. 이 섬세하게 생긴 남자의 야만적 태도와 때로는 권태 그리고 능욕의 시간들을 지나 그녀의 몸은 서서히 반응한다. 식민지 공간이라는 자아의 각성에 이어 육체가 눈을 뜨는 것.
이들이 지켜 가는 戒는 다르지만 몸이 갖는 애욕은 같은 것이어서 그들은 흔들린다. 육신의 흔들리는 성애가 철썩 같은 戒를 흔드는 것. 왕차즈는 굴종과 치사와 모욕의 시간을 잊고 이 섬세한 악당의 남성적 매력에 끌리고, 이 유머 없는 강고한 남자 역시 色의 매력에 흔들린다. 큰 슬픔을 지닌 자 말이 없고 말수 적은 그들은 흔들릴 때마다 몸을 섞는다. 밀수처럼 둘이서만 거래하던 하나의 관능은 욕망을 과녁삼아 달려가는데…….
제거해야 할 남자와의 쾌락과 고통으로 하여 그녀는 色과 戒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악당이지만 한편으로는 연인이 돼버린 배포 큰 남자가 던지는 사치에 대한 두려움에 그녀는 결국 자신의 戒를 놓치고 마는 것. 보석이 여자를 방심하게 한다지만, 과연 6캐럿 다이아가 '이해의 선물'인가 하는 점은 여자 아닌 남자들이 어떻게 알 것인가. 그녀는 극단적 슬픔을 끝내기 위해 그 슬픔에 익숙해지기 보다는 그 슬픔에 지고 마는 것. 그녀의 비밀은 그녀의 피인데 그 피가 흘러나오면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운데 말이다. 어두운 절벽 위 마지막 그녀의 총살 장면은 엉성한 시골 야구장 조명 같아서 마치 연극무대와 다를 바 없다.
200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이안 감독의 <色ㆍ戒>를 가볍게 보자면, 色은 戒를 배반한다는 다소 뻔한 이야기를 157분 동안 늘어놓는다. 길다. 그 배반의 바탕을 이루는 아크로바틱한 섹스장면을 빼고서 <色ㆍ戒>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 정사장면은 매혹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연민을 자아내는 장면들이었다. 포스터는 <화양연화> 스타일이었지만 솔직히 그 속내는 여배우 잔혹사 아니던가. 잔혹을 교사하는 감독이 관객을 유혹하려는 관음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면 200만 관객 역시 그 하드코어 동영상에 충실했을 것이다.
기억한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먼 장면으로 잡은 줄리엣드 비노시의 가벼운 목욕장면을. 카메라가 잠시 겨드랑이를 잠깐 스쳐가던 장면 말이다. 그러나 <色ㆍ戒>는 탕유의 위아래 기름진 체모를 그대로 다 드러낸다. 배우를 발아래 틀어쥐는 감독의 치밀한 계산인 것. 色이 戒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 혹은 시대를 나타내기 위한 고증이라기보다는 사소한 것을 눈감고 넘어가지 않는 감독의 거의 폭력 수준의 주문인 것. 카메라 브랜드 이름 그대로 '캐넌', 애초 이것은 대포거나 총구, 즉 폭력인 것이다. 신인 여배우 탕유는 노출의 수위를 뻔히 알고도 앞으로 잘나가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세계적 감독의 설득에 여성으로서의 수치를 참았을까? 과연 탕유는 감독과의 대화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구조의 힘을 알았을까? 청자연적의 안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리안, 잔인하다.
이것은 중국인을 비롯한 같은 빛깔 아시아인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색은 모든 말을 시각으로 들려주는 것 아니겠는가. 높은 하늘과 먼 산, 푸르른 바다처럼 다가가지 못할 이미지의 그녀가 걸친 블루 계열의 치파오들은 자극이자 정지인 것. 벗은 몸이 주는 색깔이 황색이라면 황색은 서양인들에게 능동적이고 또한 과격하게 관음적 흥분을 자극케 하는 빛깔이리라. 같은 빛깔을 가진 나는 그 20분이 불편했다. 특히 리안이 서양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검은 머리의 영어를 쓰는 사람이기에. 우리가 느낀 그 수치는 오래도록, 탕유가 큰 배우로 성장하는 오래도록 기억 속에서 나풀거릴 것이다.
식탁과 제단
지루함과 난해함의 대명사인 베르히만의 영화들 중에서 그래도 이 영화가 제일 쉽다. 아버지의 죽음과 엄마의 재혼 사이에 놓여있는 물의 인서트 장면과 폭설장면 사이에는 불같은 고통이 놓여있음을 보여주는 이 성장 영화는 어미 없이 자란 혹은 새 아버지를 본 오늘날의 가족해체 그리고 재결합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울림을 줄 것. 교양 없는 식당주인의 명쾌한 저녁 연설이 그 답을 말해주고 오직 사랑으로 남의 씨를 담고 온 며느리의 허물을 덮어주는 할머니 헬레나의 태도는 베르히만이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알리스는 주교의 씨로 쌍둥이를 낳는다. 누구도 그녀를 나무라는 사람 없이 가족 모두 즐겁게 사진을 찍고 다시 파티. 단란한 가정은 식탁이 제단이란다. 식탁은 사소한 걱정을 나누고 빛나는 희망을 발견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영화는 끝 무렵에 또 한번의 식탁 파티를 보여주는데. 사랑이란 남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지금 여기', 이 조그만 세계를 즐거워하라는 것. 인간이 서로 애정을 표현하는 곳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
1983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 촬영, 미술, 의상디자인 상도 받았다. 밝은 격자창 앞에 서 있는 성직자와 어두운 지하실에서 인형을 가지고 노는 이 모두 올해 여름 세상을 떠난 거장 베르히만의 두개의 자아일 것. 신은 교회에만 있지 않고 식탁과 연극의 무대에 존재한다는 노감독의 메시지에 역시 두개의 자아를 가진 관객들은 이 긴 영화에 따뜻함을 느낄 것이다. 군데군데 삽입된 흐르는 물에 관한 장면은 영혼을 닦는 물이런가? 불같은 고통을 담은 수십 편의 명작을 남긴, 또 여러 명의 이혼녀를 남긴 베르히만! 고이 잠드시길.
완령옥(阮玲玉)의 장만옥
큰 눈, 작은 입술, 도톰한 볼, 노슬리브 치파오가 아름다웠던 탕유처럼 30년대 '사의 찬미'처럼 죽어간 30년대 중국 여배우가 있다. 시대의 발명품 스타킹과 유성영화를 위한 녹음기가 막 등장한 여기 상하이에 치파오를 입은 여배우, 실존 인물 완령옥(영화제목 阮玲玉· 롼링위 1910-1935)이 바로 그다.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시대를 낡은 과거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1930년대 상하이 조계지 외탄은 과거가 더 모던한 공간이었다. 이 고혹의 시대 상하이가 뉴욕보다 컸다고 하는데, 재즈바 호텔 등이 밀집한 상하이 영화판은 이미 스튜디오와 스타시스템의 필요성을 간파한 시대다. 30년대 상하이를 살다간 여배우 완령옥을 재현하는 감독 관금붕(關錦鵬 관진펑)은 역시 치파오가 잘 어울리는 장만옥(張曼玉 장만위)을 통해 부드럽고 이성적으로 영화사의 한 전설을 복원한다. 이 영화에서 장만옥은 진짜 완령옥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인정받아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린다.
가보지 못한 시대를 보여주는 리안과 관금붕의 방식은 철저히 다르다.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 완령옥을 형상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감독은 액자소설 형태를 취한다. 도덕과 관습의 올가미에 희생 된 완령옥이 액자고 그 배우로 몰입하는 장만옥의 연기 과정이 바로 액자의 그림이 되는 것. 그 액자 안 인물의 묘사 방법은 몽타주라기보다는 콜라주 방식으로 시대와 인물을 복원해나간다. 이육사와 백석 같은 얼굴들이 스크린에 흘러가고 이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 웍샵하는 현대 홍콩의 스텝과 배우들을 다큐처럼 찍는데 어디가 30년대 영화이고 어디가 현실 속 메타영화인가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다.
보자. 작은 체구 흰 분칠의 조금 과장된 연기가 흑백의 완령옥이고 키가 크고 세련된 미소를 보이는 컬러 화면이 장만옥이다. 또렷한 입술선, 뒷머리가 긴 파마 스타일, 눈썹을 귀 가까이 길게 그리는 30년대 배우 완령옥은 동양인의 평면적 얼굴에 추상무늬 치파오가 약간 헐거워서 몸〔色〕의 육감이 그리 어필되지는 않는다. 관금붕은 완령옥을 맡은 장만옥의 몸을 돋보이게 하지는 않는 것. 독특한 무성 영화 세대 배우가 갖는 아우라와 그를 재현하는 현대배우 장만옥의 학습을 보여주는데, 두 배우 모두 눈부신 보석들이다.
"완령옥은 육체적 매력이 전부다." 당시 남자들이 목욕탕에서 떠드는 이야기 장면처럼 당시 감독들도 젠더적 관점에서 그녀를 접근할 뿐. 거기다 잘못 만난 한 남자로 하여 완령옥은 오래도록 예술가로서의 균열에 시달린다. 경마에 미친 애인 장달민은 말 한 필 사달란다. 자유로운 영혼 정도로만 알았던 남자는 결혼과 애는 싫어하는 건달이었던 것. 그의 바람기와 무책임함을 견디다 못해 완령옥은 옛 애인과 헤어지고 식모 같은 엄마와 양녀 소옥을 데리고 영화사 사장 당계산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불편하게 얻은 작은 안식에서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넌 상류층 여성이라 여공이 안 맞는다."는 편견을 극복하고 신여성을 연기하고자 노력한다.
여기 완령옥이 마음으로 존경하는 한 신사가 나타나니 양가휘가 역을 맡은 채소생 감독이다. 마르그리뜨 뒤라스가 쓴 소설을 자크 아노 감독이 만든 <연인 1991>에서 아편하던 그 끈적거리던 배우 말이다. 채감독과 그녀의 대화는 매우 공적이어서 완령옥은 채소생과 순수하게 캐릭터만을 이야기 한다. 그는 공사 구분이 무색한 영화판 인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영화를 공적 노동공간으로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남자. 그는 연기하는 배우에게 "뭔가 잘 못 된 것 같은데 말을 잘 못하겠어, 다시 해보자,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우리나라 남기남 감독(?)들이 다시 보아야 할 부분이다.
명장면 명대사 한 부분. 채소생은 웅크리고 앉기를 좋아한다. "중국인 중 삼분지 이는 이런 자세지요. 앉아서 나리를 기다리다 때리면 맞고, 쉴 수도 있어요." "저는 이렇게 앉아있어 본 지 오래 됐어요. 배우가 되고 나서는 이렇게 앉지 않아요." 쪼그리고 앉아도 아름다운 배우 장만옥! 완령옥이 주연하고 채소생이 감독한 영화는 친일파임이 분명한 어중이떠중이 신문사 기자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검열과 상영불가의 불화를 빚는다. 필름의 가위질을 거부한 완령옥의 뒤끝은 신문기자들에 의해 당계산과 간통한 여자로 낙인찍히는 것. 견디기 어려운 그녀는 채소생에게 홍콩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하지만 이 진보적 감독은 그녀의 청을 거절한다. 여학교에서의 신여성에 대한 강의를 앞두고 스물다섯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완령옥은 채감독의 <신여성 1934> 마지막 장면처럼 눈을 감는다. 30년대 사의 찬미, 자살.
<완령옥>은 배우란 또 감독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진지한 명상을 담는다. 그래서 당시 스물일곱의 '홍콩 배우' 장만옥은 완령옥의 입장이 되어 연기와 삶의 구분 그리고 영화와 삶의 일체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갖는다. 장만옥이라는 배우를 통해 완령옥을 불러내는 '영매' 관금붕은 드라마와 다큐를 오가는 그림들 속에서 여배우를 아름답게 그리기 보다는 그 여배우가 주인공을 어떻게 해석하면서 몰입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관금붕을 비롯한 장만옥과 스텝들은 완령옥이 출연한 영화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완령옥과 공연한 조선에서 온 '영화 황제 김염'도 잠시 등장한다. '<고도춘몽 1930> 원판 없음, 원판 재편집' 이러한 나레이션과 자막, 완령옥의 연기필름 그리고 소실된 장면에서는 스틸사진을 두고 1991년의 배우와 감독이 전설이 된 한 여배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한 대담까지 총동원하여 완령옥을 복원해나간다. 장만옥이 완령옥에 몰입되고부터는 영화 속 현대감독 관금붕은 살짝 사라지는데, 스텝들과의 대화에서 양조위의 오랜 연인 유가령은 의미 있는 대사를 던진다. "나는 90년대 배우로라도 기억되길 바래. 배우란 가장 찬란할 때 사라지는 게 좋을까, 신화로 남고 싶다면." 유가령이 지금도 제 역할을 찾는 배우의 힘을 가졌다면 이 때의 작업이 힘이 되지 않았을까?
자살을 앞둔 완령옥 역의 장만옥이 호텔 플로어에서 춤추는 컬러 화면은 아름답지만 色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色'에서 실패했지만 그 '戒'를 알고 일에 몰두하는 여성 완령옥을 보여줄 뿐. '배우는 연기하는 매순간마다 극중 인물로서의 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메소드 연기로 하여 장만옥은 참 배우로 거듭나는데……. 장자 선생식 표현을 빌 때, 과연 영화 속 그녀는 장만옥인가 아니면 완령옥일까. 그것도 아니면 영화를 보는 오늘의 배우 이영애, 아니면 보는 이 누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