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 |
[백제기행 ]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 다시금 아름다움으로 피어나
관리자(2007-12-24 19:39:59)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0월 26일 아침 7시 30분, 균형 잡힌 아름다움으로
우리나라 새신랑 새색시들을 설레게 하는 제주도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백제기행팀이 모여 출발한다는 전주로 가는 도중 덕과에 들러, 큰 처형을 태우고,
다시 아중리 조카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가야했기에 조금 서둘렀던 탓인지 한 시간
정도의 여유를 두고 태평양 수영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桎梏)’이라는 주제 아래 두 번 째로 기획된 제112회
백제기행은 제주도 4·3유적지를 찾는다고 한다. 큰처형에게서 건네 듣던 지금까지의
백제기행은 시간과 여건이 허락지 않아 내겐 늘 동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던 차
8년 전의 신혼여행 이후 한 번도 다시 가보지 못한 제주도가 이번 기행지라는 소식은
아내를 열광하게 만들었고, 적극적인 아내의 공세에 나도 처음 백제 기행의 일원이
되어 보기로 했다.
무릇 여행이라는 것은 떠나기가 어렵지 막상 떠나고 보면 그 때부터는 마냥 즐겁기만
한가 보다. 금요일에 출발해서 그런지 예전보다는 훨씬 적은 수라는 20여명의
인원이 버스에 올라 광주공항으로 출발했다. 여행이 주는 설렘과 불안 때문에 전날
잠을 잘 못 이룬 탓인지, 대부분이 잠을 청하고, 나 역시 기행팀에서 준비한 4·3관련
자료를 뒤적이다 설핏 잠이 든 채 광주 공항에 도착했다.
육중해 보이기만 하던 비행기가 한참을 달려 하늘에 떠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아, 창
밖에는 바다가 보이고, 곧 이어 제주도 한라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심에 커다란
한라산과 주변 곳곳에 수백 개의 작은 오름이 있어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는
섬, 제주도. 그 섬에 내가 8년 만에 다시 발을 디딘 것이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탑승하고 첫 번째 목적지인
4·3평화공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이번 기행의 안내를 맡게 된 오승국(제주
4·3연구소 이사) 시인님의 인사말이 있었지만 나의 시선은 다소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풍광 때문에 자꾸 차창 밖으로 쏠렸다.
역사가 지어줄 이름
첫 답사지, 4·3 평화공원은 아직도 한창 공사중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삼다도(三多島)여서 세찬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스산하기만 했다. 중학교
현장학습팀의 점심식사로 금방 사용되었던 널따란 잔디밭에는 까마귀 떼들로
가득했다. 오시인님의 안내로 들어선 기념관 안에는 4·3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온 벽면에 가득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이유
때문에 희생되어진 것일까? 지금까지 그 무수한 억울함을 제대로 말로 못했다는
제주도민들의 삶은 과연 무엇으로 보상되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이름도 없이 ‘○○○의
자(子)’라 적혀 있는 희생자의 검은 명패 앞에서 우린 모두 그렇게 숙연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공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된 제주도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고 한다. 제주 4·3의 뒤에 어떤 용어를 붙여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
오시인님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준 명칭은 ‘제주 4·3사건’이지만, 우리는
‘4·3’이라고만 부르지 뒤에 아무 것도 붙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광주 민주화
운동처럼 역사가 지어 줄 말이라면서.
일정상 다소 늦은 점심을 제주민들이 즐겨 찾는 다는 돼지 불고기로 맛나게 먹고, 두
번째 답사지인 선흘곶(목수물 굴)으로 향했다.
‘곶’은 ‘곶자왈’이라고도 하는데, 제주도의 허파에 해당된다고 하니, 뭍사람들
말로는 울창한 숲 정도에 해당하는 듯 하다. 합판 조각에 매직으로 대충 쓴 유적지
표시판을 지나 줄줄이 늘어선 벌통 사이로 도착한 선흘곶의 목수물 굴은 철근
조각으로 굳게 막혀 있었다. 48년 겨울, 주민들에게 노랑 개, 검은 개라고 불리우던
외지인들로만 구성된 군인과 경찰이 마을에 장기간 주둔하고, 또한 이들에 의해
마을이 불타게 되자 주민들은 바로 이곳 선흘곶의 밀림 속으로 피난하여
생활하였다고 한다. 굴속에는 주로 청년들이 숨었다 하는데, 이들을 비롯한 주민
3백여 명이 토벌군들에 의해 1주일 사이에 사살당했다고 한다. 굴 주위는
동백나무로 가득했고, 아지트로 쓰였다 하는 돌무더기 20여 개가 산재해 있었다.
과연 이들은 무슨 죄가 있길래 그 추운 겨울 이 숲속으로 도망쳐야 했으며, 그렇게 피
흘려야만 했던 것일까? 군인, 경찰들은 보기만 하면 때리니까 무서워 주민들은
이들을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렇게 빨갱이로 몰린 채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흘곶을 나와 너분숭이 애기무덤이 있는 바닷가 마을에 이르렀다. 여기
애기무덤들은 6년 전에 공원조성공사 중 가시덤불 속에서 발견되어졌다 하는데,
21기의 애기무덤 중 4기는 무덤의 주인까지 밝혀졌다 한다.
계엄령후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된 1949년 1월 19일 2연대 군인 트럭이 한라산
무장대의 습격을 받게 되고 군인 2명이 사살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촌초등학교에 주민을 모이게 한 후 무려 500여명을 사살하고, 전 마을을
방화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주도에 온 외지 군인들이 살인 경험이
없으므로 이의 연습용으로 이들 주민들이 사용(?)되어졌다 하는데,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학살은 계속되어졌다한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주도로 UN이 창립되고 이를 통해 최초로 맺은 국제 협약이
바로 제노사이드조약(Genocide條約)이라 한다. 이 조약은 집단 살해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으로 국민, 인종, 민족, 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를 국제 범죄로 규정하고 각국이 협력하여 이를 방지하고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 제주민들은 이 조약을 주도적으로 체결한 미국의 적극적인
조작과 방관으로 인해 희생당했다고 하니 이를 어찌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결국 이러한 4·3의 무모하고 지독한 토벌은 아이들과 노인들까지 사살하기에
이르렀고, 그 흔적들이 바로 너분숭이 애기무덤으로 남은 것이다. 소설가 현기영은
‘우리 순이’라는 제목으로 그 날의 이야기를 소설로 엮어 냈고, 이를 통해 4·3의 진실
찾기는 한층 사회 문제로 불거졌으며, 결국 그의 문학비가 이곳에 들어설 예정이며,
북촌 위령비와 기념관이 2008년에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제주민 개척정신의 표상, 흑룡만리
너분숭이 애기무덤을 지나 제주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함덕 해수욕장을 지나
조천면 신흥리 방사탑을 잠시 바라보았다. 방사탑(防邪塔)은 육지의 솟대와 비슷한
성격의 조형물인데, 대부분 육지에 있는데, 조천면 신흥리의 방사탑은 특이하게도
바닷가에 있다고 한다. 고기잡이를 떠나고 돌아오는 배들이 자꾸 바위에 부딪쳐 잦은
사고가 발생하기에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는 방사탑은 총 3기가 있었고,
역시 제주도를 상징하는 검은 돌, 현무암으로 쌓여 있었다.
제주도를 가리켜 돌과 바람의 문화라 한다. 산과 들에 돌이 너무 많아 개간 중 돌을
골라내어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이 바로 흔하게 볼 수 있는 돌담이라는 것인데, 이는
제주민의 개척정신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이 돌담의 별명은 바로
흑룡만리(黑龍萬里)라 한다니, 그 모양새와 길이를 짐작해 볼만하다. 이러한 돌은
전통적인 어로(漁撈)에도 이용되는데, 해변에 돌로 담을 쳐 놓으면 밀물 때 몰려든
물고기들이 썰물 때 그 담안의 물 안에 갇히게 되어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제주도에서는 ‘원땀’이라고 부른다 한다. 서해안에서 행해지는 ‘독살’과
비슷하다고 할까?
바닷바람을 한껏 쐬고, 첫날 마지막 답사지인 곤을동에 들러 4·3유적지임을 알리는
비석 앞에 우리는 모여 섰다. 곤을이라는 지명은 물이 항상 고여 있는 땅이란
뜻이라는데, 그 만큼 예로부터 물이 그치지 않은 곳으로서 곤을동은 해안 마을 중
유일한 4·3의 폐허 마을이라 한다. 멜 후리는 소리(멸치 잡는) 가득했던 마을이 바로
우리나라 군인들에 의해 불에 타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집단 총살을 당했다
한다. 제주도 지역에는 곤을동과 같이 4·3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마을이 여러 곳이라
하는데, 이 마을들은 통시(돼지 키우던 곳), 방구들터, 집담으로만 확인이 되어진다고
한다.
잃어버린 마을은 흔적만이 남아
둘째 날 아침, 우리는 4·3의 첫 계기가 되는 3·1사건이 발생한 관덕정(觀德亭)을
찾았다.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친 군중들이 빠져나오다 경찰의 발포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곳이 바로 관덕정 앞 광장이라
한다. 관덕정은 제주목관아 옆에 위치해 있는데, 제주도에 있는 전통적인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고 한다. 중앙의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편액이 눈에 띄었다.
전주에 있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 떠올랐고, 조선시대 전주의 전라감사가
제주도까지 관할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왠지 모를 감흥도 느꼈다.
관덕정을 나와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제주 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도의 자연부터
전통생활모습, 유적, 유물까지 모두 전시된 그 곳에서는, 단지 아이들 두 명을
위해서도 열심히 설명하시는 문화유산해설사의 친절한 안내로 제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땅에 아무런 댓가 없이 봉사하시는 그러한 분들이 있기에 이
사회는 그만큼 아름다워지고 있으며,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번
그 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그 분의 설명을 듣고 제주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몇 가지 정리해 보기로
하자. 먼저, 제주도에는 바람이 많기 때문에 가옥에 굴뚝이 없다고 하며, 취사와
난방이 분리된 생활을 한다. 말이 많기 때문에 난방은 말똥으로 해결하며, 육지에는
없는 굴묵과 고팡[庫房]이 있다. 또한 많기도 한 말 때문에 들의 무덤에도
돌담(산담)을 쌓아 말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제주도식 대문인 정낭도 한켠의
목적은 바로 말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다.
박물관을 나와 오늘의 세 번째 답사지는 어제의 곤을동과 같은 잃어버린 마을
삼밭구석. 대나무와 담으로만 확인되는 마을들은 모두 중산간지대소개령으로
폐허가 되었으며 영영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제주도에는 이렇게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120여개나 된다고 하니, 그 날의 참상을 굳이 말로 옮겨서
무엇할까?
또다시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추사적거지(秋史謫居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이며,
서예가, 정치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선생이 9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던 유허지. 귀양살이의 어려움 속에서도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비롯한
불후의 서화들을 남겼으며,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는 추사
김정희에 대한 제주도민의 존경심이 적거지와 박물관에 가득했다. 이 곳에서도 역시
자원봉사 문화유산 해설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선생의 작품 하나하나에 쏟는 그
분의 열정어린 설명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시 한 번 그 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개들마저 미쳐서 헤맸던 곳, 섯알오름학살터
추사관을 나와 밀로 만든 냉면을 푸지게 먹고, 우린 일제시대 일본군의 주둔지이며,
군사시설지인 알뜨르 비행장을 찾았다. ‘뜨르’는 들을 가리키는 말 정도로
풀이되는데, ‘알뜨르’는 ‘아랫들’이라는 말로, 제주도에서 보기 드문 평야지대이다.
긴 활주로, 지하벙커, 막사 등과 함께 일본군 전투기 격납고(엄체호가 맞는 표현이라
함)가 아가리를 벌린 채 괴물처럼 포복자세로 웅크려 있었다. 곳곳에 남아 있는
엄체호(奄體壕)는 모두 28개, 가미가제(新風)라 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이른바
자폭용 전투기를 동원하여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준비했던 군사시설이다. 이 곳 역시
마라도권과 연계된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라 하는데, 현대사의 아픔은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도 어김없이 생채기를 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시 4·3관련 마지막 유적지로 우리가 찾은 곳은 섯알오름학살터.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제주도 내의 유일한 학살터가
바로 이곳 섯알오름 학살터라고 한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에
예비검속된 344명 중 252명이 송악산 탄약고 자리로 끌려와 총살당해 돌무더기와
함께 암매장 당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가 수도를 부산으로 옮긴 뒤
이틀만의 일로, 부산까지 무너질 경우 최후의 땅, 제주도로 정부를 옮기기 위해
단행된 일이라 한다. 학살이 있고 나서 얼마동안은 모슬포의 개들마저 전부 미쳐서
헤매 다녔다고 하는데, 8월 한여름에 252구의 시신이 썩어가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3의 유혈 광풍으로도 모자랐던 것일까? 제주도에서의 6·25는 4·3의 연장일
뿐이었다고 한다.
그렇게도 아픈 사연을 간직한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발걸음을 옮겨 우리는 송악산을
올랐다. UNESCO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파노라믹한 풍광을 볼 수 있는,
제주도 최남단의 오름. 섬과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그 아름다운 비경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으랴, 아득히 보이는 마라도와 한라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 다시금 아름다움으로 피어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행을 마치고 돌아온 호텔에서는 박찬식 교수님(제주대, 4·3연구소 상임이사)의
특별강연 ‘과거사 청산과 제주 4·3’이 준비되어 있었다. 제주도는 냉전의
최대희생지이며, 조선시대부터 4·3까지 제주도민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은
‘나는 왜 제주도에 태어났는가?’라는 탄식의 열등의식이라는 것과, 또한 강요된
금기와 침묵으로 유족들은 더 멍이 들었다라는 것, 그리고 4·3을 잘 풀었으면 6·25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 거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결국 4·3은 우리의
아프고, 잘못 끼워 맞춰진 과거사 정리의 새로운 모델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4·3은 아직도 진행 중인가
백제기행 셋째 날은 한라산 등반이 예정되어 있었다. 가을 한라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역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식년제로 인해 정상인 백록담을 눈앞에 두고
돌아올 수 밖에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내 언제 다시 한라산을 내 발로 오를 수
있으랴? 그러나, 생각보다 길어진 기행문의 분량에 놀라며 한라산 등반의 기억들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내 마음에만 묻어두려 한다.
광주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위성 TV를 통해 들려오는 뉴스 앵커의 멘트가
들렸다. 종교 지도자들이 2007 대선을 앞두고 특정 후보를 지지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며 ‘우리는 이런 빨갱이들을 또 찍으면 안 돼.’라고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말. 4·3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그리고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저들은 씻김 받을 수 있을까?
정녕 4·3은 아직 이 땅에 진행 중이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