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 |
[서평] 뱀을 아름답게 보지 않기 『철학 정원』
관리자(2007-12-24 19:38:52)
뱀을 아름답게 보지 않기
‘뱀도 자세히 보면 아름답다’고 한다. 비도덕적이고 추악한 일도 익숙해지면 그것이
가진 작은 미덕에 현혹되어 버린다는 뜻으로 헤아려진다. 어쩌면 깊게 바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뱀’을 아름답게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정신이 반드시 요구된다. 좀처럼 갖추기 어려운 이러한 정신을
우리는 책에서나 만나게 된다.
김용석의 <철학 정원>은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들과 간단없이 결별하며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발심하게 만든다. 생각이 깊어지면 자유를 얻는다고 그는 말한다. 곧
‘철학하기’란 우리가 안주한 관념의 너울을 벗고 ‘진지한 놀이’와 ‘경쾌한 불안’을
즐기는 ‘사유의 몸짓’이라는 것이다. 그가 철학하기의 놀잇감으로 삼은 것은
고전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전은 흔히 떠올리는 철학이나 문학, 역사 같은 인문학 책만을
이르지 않는다. 그는 동화와 과학, 영화 등 철학적일 것 같지 않은 작품을 가지고도
‘철학하기’를 이루어낸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가지고 그가 어떻게
철학하기를 했는지 들여다보면 이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는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주의를 담고
있는 매우 도덕적인 내용의 동화다. 하지만 그는 묻는다. ‘행복과 행복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그가 이렇게 묻는 까닭은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행복한 왕자가 아니라
제비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도시 중심에는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왕자의 동상이 있고, 도시 변두리에는 여위고
지친 얼굴에 손은 상처투성이인 재봉사와 병든 아들, 너무 굶어서 정신을 잃고
책상에 엎드려 있는 젊은 희곡 작가, 길모퉁이에서 혹한에 떨고 있는 맨발의
성냥팔이 소녀가 있다. 이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세계 사이에 있는 것은 침묵과
단절이다.
제비가 등장하면서, 단절의 고통을 몸소 앓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실은
‘불행한 왕자’와 역시 세상과 단절된 채 살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다리가 놓이고 두 세계의 불행은 순식간에 행복으로 바뀐다. 불행과 불행 사이에는
절대 무관심이 도사리지만, 행복과 행복 사이에는 소통이 활발하게 존재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제비다.
그러면서 그는 되묻는다. ‘우리는 소통의 전령사가 필요 없을 만큼 각자 스스로 사회
속 타인들과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우리는 가난한 처지를 동정하거나
부자의 화려함을 부러워하며, 불행한 세상과 행복한 세상을 각각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함과 부유함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사이’는 잘 보지 못하며 더군다나 그
사이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는 더욱 알지 못한다.
그 ‘사이’를 인식하고 연결하기 위해 우리 각자는 제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제비 같은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에 비추어
제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제비가 ‘빈익빈 부익부’라는 사회
부조리를 조정하는 봉사단체나 시민단체의 활동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소통의 문제가 ‘철학하기’의 과제가 된 것은 갈등조차 없이 무관심으로 단절된
현대인의 삶에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행복한 왕자>의
‘철학하기’는 이렇듯 현실적으로 깊어진 소통의 문제를 경쾌한 통찰로 풀어주고
궁극적으로 행복은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철학하기’를 다짐했다면 <명상록>의 저자이자 철인 왕이었던 아우렐리우스를 닮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전존재를 던져 ‘철학하기’를 했고, 그렇게 얻은 철학적인
원칙을 지키며 현실 정치의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던 사람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네
기본 원칙들을 적용할 때는 판크라티온(온몸으로 싸우는 격투기) 선수처럼 해야지,
검투사처럼 해서는 안 된다. 검투사는 사용하던 칼을 잃으면 죽지만, 판크라티온
선수는 항상 주먹을 갖고 있어 그것을 꽉 쥐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먹처럼 체화한 철학적 원칙만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바르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김용석의 <철학 정원> 바깥에 나와 오래 서성이게 된다. 그가 말을 걸어온다. ‘고전에
담긴 생각의 씨앗을 얻어다 <철학 정원>과 이웃한 곳에 당신의 생각 정원을
근사하게 가꾸어보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먼저 나의 생각 뜰을 정리해야 한다.
덤불을 태우고 돌멩이를 고르고 뱀들을 내다버려야 한다. 표피적이고 순간적인
분노와 천박한 호들갑으로 볼품없는 현실을 위장하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금력과 권력으로 휘갑 두른 자들 앞에서 싹트는 부러움과 질시, 증오의 덤불을
치워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대한 방어 심리에서 비롯된 분노의
돌멩이도 골라내야 한다. 무엇보다 명백한 모순과 부당함, 부조리에 익숙해지는
뱀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저속한 삶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책은
‘철학하기’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이다. 그러면 비로소 <철학 정원>에서 얻어온
생각의 씨앗을 나의 생각 뜰에 뿌리고 가꾸어도 되겠다.
김정겸/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남편과 아이를 따라 이곳 전주에 내려와 그저 열심히만
살았다. 하지만 중년의 숲에서 길을 잃고 삶을 재정비하는 중이며 논술공부를 통해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세상을 살펴보며 남은 생을 제대로 일구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