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 |
[서평]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의 종말 『생명의 편지』
관리자(2007-12-24 19:38:07)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의 종말
우리는 수많은 지구 재난 보고를 듣는다. 급박하게 타전되고 있는 그 많은 보고들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듣는다. 책에서, 티브이에서, 신문에서. 급기야는 완고한 행정
관료들의 입을 통해서도 듣는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투모로우’는 가공할 만한 재앙이 당장 지구촌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영화의 제목도 ‘내일’이라고 정했을 것이다. 작년에 미국의 대통령
후보였던 엘 고어가 출연하여 만든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영화 ‘불편한 진실’이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고 그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것을 보면 지구가
직면한 환경재앙이 소수 환경운동가들이 내는 경고음에 그치지 않고 일반대중의
광범위한 관심사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길거리 상업적인 광고판에까지 환경재난의 경고문이 걸리는 걸 보면 바야흐로
환경재앙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 일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밥벌이가 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된다. 밥벌이가 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현대사회에서 밥벌이가
되지 않는 공익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생명운동의 등장
언젠가부터 환경운동과 나란히 생태운동이 등장하더니 평화운동을 넘어 생명운동이
등장했다. 생명운동. 이름에서부터 절박함이 배어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지적이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점점 주장의 신빙성을 더해가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한다.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의 종말에 불과 하다고. 인간들, 특히
현대인들로부터 급습을 당해 위기에 몰린 지구가 드디어 인간을 털어 내기 위한
반격을 시작했다고도 한다.
자, 여기까지의 논리는 식상할 정도로 우리의 귀와 눈에 익숙하다.
익숙한 것에는 겁내지 않는 심리가 있다. 그러다 보니 위기는 더 강조된다. 위기가
과장되었다는 반론이 안 나올 수 없다. ‘침묵의 봄’을 썼던 레이첼 카슨씨는 물론 엘
고어는 소송을 당했다. ‘불편한 진실’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판결이 작년
영국법원에서 내려졌다. ‘불편한 진실’이 불편한 처지에 몰렸다. 엘 고어의 정치적
야심과 저의를 들먹이는 사람들도 있고 보면 이 영화는 당분간 불편함을 계속 겪을
듯싶다.
환경생태학자나 생물학자들이 먼저 제기하기 시작한 지구위기의 과학적 논거들이
또 다른 과학의 이름으로 반격을 당한 것이다. 이 다툼의 틈새에서 또 많은 사람들이
밥벌이를 할 것이다.
지난달에 출간된 <생명의 편지>는 한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 이 책이 한국에서
불편해지지는 않을까?
위기를 외면하는 현실들
한국의 대통령자리를 놓고 하루에도 몇 건씩의 정책과 성명서를 발표하는 정당과
대통령후보자들은 아무도 이 책에서 안타깝게 제기하는 문제들을 말하지 않는다.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 비정규직문제 해결과 한미에프티에이 반대의 문제는
쟁점이 되지만 인간들이 지금 당장 지구생명권(지구생물권)에 가하는 공격을 멈춰야
하는 문제는 전혀 쟁점이 되지 않고 있다.
인구증가를 멈추어야 하고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되돌려야 하며 일자리를
만들기보다 일자리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훨씬 급하다. 금세기 중반에 90억
명으로 늘어나는 지구인들은 불가피하게 환경재난 속에서 집단 폐사한다.
지구인들이 현재의 하루 평균 소비량을 골고루 잘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생명의 편지>가 담고 있는 요지다.
환경재앙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기상이변을 축으로 하는
환경재앙의 진원지는 바로 인간임을 모든 선언과 협약, 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현생인류가 등장한지 5만년이 채 안되는데 수 십 억년의 고참 생명체들을
멸종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최단시간 안에.
한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당장 금세기 말이면 지구생물권 종의 반이
멸종된다는 <생명의 편지> 내용과는 동떨어진 한가한 주장들만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국민들은 한가한 주장들을 놓고 네가 옳네 내가 옳네 하며 열을 내고 있다.
모두 한가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생물학자로 살아 온 저자 에드워드 윌슨이 개신교 목사에게 이 편지형식의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뭘까? 왜 정치가도 아니고 환경운동가도 아닌 종교인에게 말을
걸었을까? 엄정한 논거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는 환경위기를 하나님 말씀 한마디로
간단히 무시하고 있는 종교가 환경 불감증의 가장 큰 집단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물질법칙과 물리 운동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이 초감각의 영역을 관장하는 종교와
손잡을 수 있어야 지구환경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봤을 수도 있다.
과학 만능론자들은 과학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는 이것을
‘세속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 같은 맥락에서 종교이데올로기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개신교 목사를 향해 편지글을 쓰게 된 동기 일 수도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생물종의 위기 상황은 아주 구체적이다. 아메리카 대륙 남과 북을
두루 다니며 조사하고 연구한 그는 모든 생물종들을 아우르는 수치들을 가지고
위기를 진단한다. 포유류와 양서류, 조류와 어류 등은 물론이고 열대식물과
온대식물의 개체수가 어떤 속도로 감소되고 있는지 공식까지 내 보이고 있다. 삼림과
바다와 자생종과 담수지역에서 일어나는 깜짝 놀랄만한 지표들을 굳이 소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생물종의 급감 소식과 통계는 여기저기 늘려 있으니까.
생명을 위한 연대
<생명의 편지>는 몇 가지 새로운 영역에 대한 의견을 내 놓고 있다.
최근 수 억 년 지구역사에 일어났던 다섯 번 혹은 일곱 번의 대 재앙들은
운석충돌이라는 우주의 공격, 지구외부 요인의 작용인데 비해 이번에 벌어지고 있는
여섯 번째 혹은 여덟 번째 재앙은 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치명적이고 완벽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거대충돌의 운석이
지금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해서 지구 자체를 먹여 살리는 것은 미생물과 곤충과 무척추동물과 식물
등인데 인간이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말살함으로 해서 스스로의 명운을 끝장내고
있다는 지적도 한다.
사실 인간들이 하는 자연에 대한 가해 행위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 하는 짓도
아니고 끝없는 욕망과 경쟁을 위해 하는 짓들이다.
지구표면의 2.3% 밖에 안 되는 34개의 열섬(Hot Spot)지역에 꽃식물의 50%와
포유류의 72%, 조류의 86%, 양서류의 92%로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결과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동식물 서식지 파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남획과 오염, 침입종의
확산과 남벌, 온실가스 배출 등으로 이마저도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저자 윌슨은 말한다
종교인이 넓은 의미에서 자기와 같은 인도주의자이므로 지구생성 역사관의 차이나
인도주의적 실천의 차이가 있음에도 지구와 지구인의 안녕을 바라는 공통점에
주목하여 ‘창조물을 구하자’고 말한다. “우리의 형이상학적 차이는 우리의 삶과
행위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자연주의자를 육성하고 시민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은
본성적으로 대자연본능과 일치한다면서 어떻게 생물학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안내하고 있다. 대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의 소멸과 생성의 균형이 깨진지는
오래고 현재는 100배의 속도로 종의 감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내
놓는다. 이 수치는 연쇄작용을 일으켜 천배, 만 배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윌슨은 <생명의 편지>에 앞서서 <통섭>이라는 학문간 경계를 넘자는 책을 낸 적이
있다. 통섭은 학계에 새로운 용어로 떠올라서 연구가 활발하다. 개신교목사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물론 사회과학까지 아우르는
저자의 학문세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모든 문제의 해석과 대안에 있어서 자연과학 중심성이 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윌슨의 학문세계와 주장이 (자연과학)환원주의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이 책의 156쪽에는 생물학의 목표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을 모의실험
하는 얘기다.
화학적 및 전기적 신호전달체계의 모형을 만들고 신경세표의 성장과 신경망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자수준에서 연구하여 인공지능과 인공감정을 결합 하고자 하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번역출판 한 <통섭-지식의 대통합>에 보면
윌슨의 사회과학 등 타 학문분야에 대한 일종의 몰이해가 드러나기도 한다. 인간은
물리적 인과관계에 따른 사건들을 매개로 행동한다면서 사회과학은 ‘사회’에서
‘마음’으로, 다시 ‘뇌’로 연결되는 인과적 설명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생명의 편지> 뒷부분에도 보면 종교지도자를 향해 ‘(하나님의) 창조물을
구출하자’고 손 내미는 마당에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주장을 곁들여 놓았다.
229쪽부터 시작되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현대 기독교가 구축한 ‘지적 설계론’을
아주 단호한 태도로 공격하고 있는 부분이다. 안 해도 될 말을 편지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
‘투모로우’나 ‘불편한 진실’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영상과 사운드의 재미에
빠지기보다 자신의 생활을 바꾸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편지>에 담긴 노
학자의 진정어린 우려가 종교인들 뿐 아니라 정치가들의 설교와 연설을 바꿀 수
있었으면 한다.
전희식/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서울과 인천에서 터를 닦고 살다, 10여 년 전 완주군
소양으로 귀농했다. 정농회와 귀농학교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주라인’이라는
인터넷 회사를 설립하는 등 정보의 인간화와 민주화에도 관심이 높다.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사이버 단장’을 맡고 있으며, 인터넷 웹진 오마이뉴스에
‘전희식의 귀농일기’를 연재하고 있다. 현재는 전북 장계로 터전을 옮겨 생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