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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
[신귀백 영화엿보기 ] 식탁과 극장에 존재하는 神
관리자(2007-12-24 19:31:44)
신귀백 영화엿보기 스웨덴 판 삼대(三代) <대부>, <디어 헌터>, <셀레브레이션>까지 서양영화들은 영화 전반을 지루하다싶게 파티를 늘어놓는다. <화니와 알렉산더>의 인트로 역시 연극과 술과 음악이 넘치는 파티의 즐거운 분위기다. 1907년 스웨덴, 북구의 밤은 파티를 하기에 좋을 정도로 길고 고요하다. 여기 성당과 대학의 도시 *웁살라의 극장. 대대로 극장을 경영하는 엑달가(家)의 크리스마스는 온 가족이 배우로 출연한 성탄극 이후 카메라는 거대한 식탁의 3대에 걸친 식구들의 삶을 방마다 다르게 보여준다.   집안을 지키는 헬레나는 북유럽의 왕할머니들이 여신의 위치(네덜란드 영화 <안토니아스라인>의 안토니아를 보라)로 자리하는 것처럼 끝없는 따뜻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품위 있는 할메는 옛 애인 유대인 이삭과 귀여운 대화로 장난을 치고. 큰 아들은 극장장이고 둘째 아들은 대학교수로 염세주의자, 셋째 구스타프는 식당주인인데 하녀에게 지배인 역할을 주겠다고 밤을 보내는 바람둥이다. 한 마디로 각패(角牌)다. 장남 오스카의 남매 화니와 알렉산더는 이 대가족의 화려한 식탁의 풍성한 분위기(하녀들마저 자유스러운)에서 넘치는 시절을 보낸다. 이 어린 양들이 사촌들과 함께 환등기(시네마토그라피)를 가지고 그림자놀이를 하는 눈 내리는 북구의 밤은 대가족의 명절을 노래한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과 별로 다르지 않다. 따뜻하다. 극장과 교회   비극은 큰아들 오스카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햄릿 연습도중 ‘이제사 비로소 유령 역할을 제대로 할 것 같은데 ……’라는 말을 남긴 오스카는 진한 눈썹 맑은 피부의 젊은 아내를 놓고 죽음의 세계로 간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독살은 아니어서 햄릿과는 조금 다르다. 이제 연극과 파티는 장엄한 장례식으로 이어지는데, 그 예식을 집전한 사람은 잘 생기고 단정한 남자 스웨덴 루터교 사제인 에드와르 베르게루스. 아,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에밀리 엑달 부인! 유명한 여배우였던 그녀는 남편 오스카의 죽음에 1년을 못 버티고 장례식에서 기도를 해 준 바로 그 주교와 결혼을 한다.   섬약한 알렉산더는 결혼식장에서 마치 햄릿처럼 아버지의 유령을 본다. ‘옛것은 하나도 가져오지 말라’는 거룩한 주교님의 말씀에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며 그들은 동심과 호기심 넘치는 액달가의 안락함을 버리고 주교의 성으로 이동 한다. 심각해본 적이 없는 미망인 에밀리는 이 우울한 환경에서 표독스런 시누이와 완고한 남편, 우중충한 하녀들 만나면서 그들이 서로를 헤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갖는다.   부자집 좋아하지 말라. 침묵과 비밀이 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주교는 영지가 딸린 저택도 있지만 검소가 지나쳐 과거 액달가에서의 풍요로운 삶은 고통의 기억이 된다. 접시에 담긴 고기나 밥을 남겨도 안 되고 먹고 나면 바로 자야 한다. 호화롭고 유쾌하게 살던 배우의 삶을 버리고 베르게루스가의 딱딱한 의자와 맛없는 빵의 금욕적이고 율법적 생활은 그들에게는 형벌과 같은 생활이다. 초반 엑달가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늘어놓는 이유를 알겠다.   3부에 가서야 이야기는 탄력이 붙는다. ‘중요한 것은 역들을 회피하지 말 것.’ 죽은 오스카의 독백이다. 아들 앞에 피아노를 두드리는 아빠의 유령을 본 알렉산더는 주교의 학대로 전처와 자식들이 갇혀 죽었다고 믿는다. 이후 하녀의 고발로 인해 소심하고 겁 많은 알렉산더와 의붓아비의 갈등이 깊어진다. 성경을 두고 맹세하라는 새아빠의 차가운 장면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양심의 영역을 침범하던 세계에 대한 우의일 것. “알렉산더, 제멋대로 대사를 지껄여대는 햄릿 흉내는 그만 내거라.” 결국 그는 의붓아비에게 굴복하는데 약자의 양보는 공포에 다름 아니다. 주교는 네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라면서 엉덩이를 두들기고는 아이를 어둡고 차디찬 다락에서 재운다. 예술가의 집에서 자란 피를 가진 소년은 “예, 알겠어요, 나리님.”하며 그를 비웃고, 빤히 치어다보는 힘이 있는 계집아이 화니는 말없이 오빠와 새 아빠의 갈등을 그냥 지켜보기만 한다. 이혼을 원하는 에밀리에게 주교의 주판알은 교회 고위 성직자의 손실 이라는 사회적 평판만을 계산할 뿐.   4부, 놓칠 수 없는 하이라이트다. 사제와 장사꾼의 대화는 불꽃을 튀기는 한편의 심리소설이요 심판관의 기록.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성과 근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 신은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고통을 모른 척 할까, 호랭이는 뭐하고 저놈 안 잡아가나, 하는 조바심에 관객의 몸이 달 때, 한 푼에 벌벌 떠는 유대상인 이삭은 헬레나의 손자 손녀를 구출하는데, 그 늙은 우정이여. 주교와 아이를 놓고 협상을 벌이는 바람둥이 삼촌은 이 점잖은 악당에게 탁 까놓고 이야기 하자고 제안하지만 율법과 지성에 ‘감염’된 그는 정의로운 원칙과 요설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가 찾는 신의 문법은 복잡하다. 그의 신은 성벽의 담과 같은 두려움의 신이기에.   예술가 집안의 망나니 삼촌은 율법으로 뭉쳐있는 사제에게, 당신은 11만 크라운의 빚이 있다고 협박을 하지만 물질에 초연한 척하는 악당에게는 어림없다. 참지 못한 털복숭이 다혈질의 장사치는, ‘이 어리석은 정신적 수음자’(아, 여기서 이런 말이 처음 나왔구나.)라며 주교를 꾸짖는다. 그러나 주교는, “이해할 수 없으면 사람들은 화를 낸다.”며 그를 조롱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를 간파하러 온 것이 아니다.”는 의리 있는 삼촌이 마지막으로 던지는 이야기. “제발 당신의 가면을 벗으라.” 하지만 악당은, “난 단 하나의 가면을 쓰고 있다. 내 얼굴에 단단히 달라붙은 가면을 그 누구도 벗기지 못한다.”면서 이 성질 급한 장사꾼을 비웃는다. 그래, 신은 두 손으로는 때리지 않는다던가. 신의 그 한 손은 새 아빠의 손이지만 또 다른 손은 유대상인의 손으로, 때로는 바람둥이 삼촌의 따뜻함으로 나타나는 것,   성직자와 장사치   종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종교인이라 말할 수 없을 것. 니체가 말한 대로 기독교의 도덕은 약한 자의 도덕. 법과 도덕이 한 패였던 악당의 죽음은 연극적 스타일로 그저 대화로만 표현된다. 종교와 이성에 대한 베르히만의 경멸이 담긴 연극적 요소랄까. 이 해피엔딩 스토리는 도대체 이 20세기의 명철한 이성이나 도구들이 우리의 삶을 과연 얼마나 풍부하게 했는가 하는 데 대한 반성일 것. 영화에 등장하는 사진이나 전화기 등 문명의 소도구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가족이 함께하는 전통적 무대와 식탁이 우리 삶에 윤기를 더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리라. 베르히만은 북구의 경건한 종교적 전통과 이성을 조롱하지만 그 조롱에는 품위가 있다.     감성적 충동에 빠져 있는 개인이나 사회는 이성적 상태를 동경한다. 그러나 이 스웨덴 판 삼대(三代)는 이성적인 데만 기운 종교나 역사 그 속의 개인은 필연적으로 감성적인 것에 향수를 느낀다고 말한다. 좀 진부한 이야기지만, 이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두 개의 대립되는 속성이 원만한 조화를 이루는 생활과 사회가 바람직할 것. 엑달가와 이삭의 집에는 지하와 암흑의 세계를 동경하는 인형과 노는 이스마엘 같은 디오니소스적인 남자들로 가득 차 있다. 샘과 숲으로 가는 도중 햇볕만 쪼이는 먼지 나는 길목에서 기다리는 베르히만의 낭만 아닐까.   식탁과 제단 지루함과 난해함의 대명사인 베르히만의 영화들 중에서 그래도 이 영화가 제일 쉽다. 아버지의 죽음과 엄마의 재혼 사이에 놓여있는 물의 인서트 장면과 폭설장면 사이에는 불같은 고통이 놓여있음을 보여주는 이 성장 영화는 어미 없이 자란 혹은 새 아버지를 본 오늘날의 가족해체 그리고 재결합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울림을 줄 것. 교양 없는 식당주인의 명쾌한 저녁 연설이 그 답을 말해주고 오직 사랑으로 남의 씨를 담고 온 며느리의 허물을 덮어주는 할머니 헬레나의 태도는 베르히만이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알리스는 주교의 씨로 쌍둥이를 낳는다. 누구도 그녀를 나무라는 사람 없이 가족 모두 즐겁게 사진을 찍고 다시 파티. 단란한 가정은 식탁이 제단이란다. 식탁은 사소한 걱정을 나누고 빛나는 희망을 발견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영화는 끝 무렵에 또 한번의 식탁 파티를 보여주는데. 사랑이란 남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지금 여기', 이 조그만 세계를 즐거워하라는 것. 인간이 서로 애정을 표현하는 곳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   1983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 촬영, 미술, 의상디자인 상도 받았다. 밝은 격자창 앞에 서 있는 성직자와 어두운 지하실에서 인형을 가지고 노는 이 모두 올해 여름 세상을 떠난 거장 베르히만의 두개의 자아일 것. 신은 교회에만 있지 않고 식탁과 연극의 무대에 존재한다는 노감독의 메시지에 역시 두개의 자아를 가진 관객들은 이 긴 영화에 따뜻함을 느낄 것이다. 군데군데 삽입된 흐르는 물에 관한 장면은 영혼을 닦는 물이런가? 불같은 고통을 담은 수십 편의 명작을 남긴, 또 여러 명의 이혼녀를 남긴 베르히만! 고이 잠드시길. *주 웁살라 : 푸코와 린네의 연구로 유명한 대학이 웁살라 대학이다.   -? 영화 대학, 오래된 TV 영화가 등장하면서 소설의 무대제약이 힘없이 무너진다. 새로운 카메라 기술은 험준한 산악과 거대한 전쟁장면으로 순간이동이 가능해졌다. 거기다 대형스크린이 가능한 데다 클로즈업 기술은 연극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그래서 문학하는 이들은 성(性)이나 외설, 의식의 흐름, 자기 성찰 등 인간 내면을 파헤치려는 시도를 하고 반대로 영화는 기막힌 경치와 액션 등 연극과 문학이 접근 할 수 없는 데로 도망을 쳤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문학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대중매체라고 얕볼 때, 베르히만은 <제7의 봉인, 1956>이나 <산딸기, 1957> 같은 작품에서 신, 구원, 죽음 등의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루면서 2차 대전 후 5,60년대 유럽영화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 올린다. 흑백영화 <제7의 봉인> 역시 신은 존재하는가, 종교적 구원은 가능한가를 묻는다. 다소 난해할지 모르지만 영화를 단순히 오락이 아닌 공부해야 할 고전이라고 생각하는 시네필은 반드시 봉인해야 할 텍스트다. 마치 자신의 영화 인생을 정리하는 듯한 이야기를 담은 <산딸기> 역시 달콤한 당의정이 아닌 쓴 약으로 마셔야 할 탕약이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어. 인간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행동해”, “우리의 필요는 살아있는 거지. 사랑하고 생명을 창조하는 것” 이런 대사를 확인해 보시길.   앙드레 바쟁은 그의 작품들을 두고 무대 예술용어인 미쟝센이 어떻게 스크린으로 전이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최고의 영화세계라 칭찬한 바 있다. <처녀의 샘, 1959>, <가을 소나타, 1977>에서 정말 그런가 확인 해 보시길. 역시 꼭 보아야 할 작품. 300분짜리 <화니와 알렉산더>가 영감님의 은퇴작인 줄 알았는데 우리는 2005년 제 6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87세 노땅이 만든 <사라방드>를 만났었다. 역시 자전적인 이야기로 자식과 소통하지 못하고 끝까지 증오를 가져가는 베르히만, 정말 징글징글하다. 따뜻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 앞에 앉은 노인네의 부드러운 스웨터와 함께 그 음악 그리도 부드러운데, 옛 애인과 늙어서의 화해도 되는데 부자의 불화를 밀어붙이는 노인의 고집이라니……. 그리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올해 영화계는 세 명의 거장을 잃었다. <하나 그리고 둘>의 에드워드 양과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담당했던 베르히만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바로 그들. 베르히만과 거의 같은 날에 돌아간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작품 <욕망>이나 <정사>도 한 번 챙겨보면서 20세기를 살다간 거장에 대한 조상의 기회를 가져보시길.   신귀백ㅣ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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