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 |
[허철의 바다와 사람] 칠산바다 조기 이야기
관리자(2007-12-24 19:30:57)
칠산바다 조기 이야기
“돈벌러가세, 칠산바다로 돈 벌러가세”
이번 호부터, 부안생태문화활력소 허철희 대표가 ‘바다와 사람’을 연재합니다.
1951년 부안 변산에서 태어난 허철희 씨는 서울 충무로에서 ‘밝’ 광고기획사를
운영하면서 고향인 변산반도와 새만큼 갯벌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고향에 내려와 새만금 갯벌의 생명들과 그 갯벌에 기대어
사는 주민들의 삶을 렌즈에 담아오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고서에는 조기를 석수어(石首魚)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머리에 돌처럼 단단한 뼈가 들어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이와는 좀 달리 애두치, 민어, 조기 등 민어과 어류를 통틀어
석수어라고 했는데, 조기 중에는 추수어, 보구치, 반애, 황석어가 있다고 했다. 이 네
종류 중에 참조기는 바로 추수어인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조기 중에서는 참조기가 맛이 좋다. 황금빛을 띠어 황금조기, 황조기,
노랑조기라고도 불리는 참조기는 육질이 향긋하고 쫄깃하며 그 맛이 일품으로
제삿상에 올린다. 그 유명한 ‘영광굴비’는 바로 이 참조기를 말한다. 부세나
보구치(백조기), 반애, 황석어 등은 참조기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맛은 참조기만 못하다. 그래서 참조기로 잘못 알고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참조기는 제주 남쪽의 따뜻한 바다에서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 이동하는데, 살구꽃이 봉오리를 터뜨릴 무렵이면 칠산바다에 회유해
들어왔다가 살구꽃이 질 무렵이면 칠산바다를 빠져나가 연평도로 떼지어 올라간다.
그리고 가을이면 다시 제주 남쪽의 따뜻한 바다로 내려간다. 그 길목에 위치한
칠산바다는 최적의 산란장소로 이 시기에는 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많은 조기떼가
해마다 어김없이 몰려들었다. 위도 노인들 얘기로는 발아래까지 몰려드는 조기떼를
간짓대(장대)로 후려쳐서 잡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시절, 조기떼가 몰려들고, 조기울음소리가 칠산바다를 덮을 때면 각지의
고깃배들이 칠산어장의 중심지인 위도로 몰려들었다. 위도의 파장금항에는
파시(波市)가 들어서 밤이면 그 일대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위도의 파시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 3대 파시 중의 하나인데 1970년대 중반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그 당시 그 좁은 파장금항에 술집 색시만도 400?500명이 북적거렸다하니
위도의 파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이들이 건져올린 조기는 염장가공 되어 ‘영광굴비’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팔려
나갔다. 위도는 원래 부안군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전남 영광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다시 부안군에 편입되었다.
‘영광굴비’라는 이름은 이 무렵에 얻었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줄포만이나, 동진강 하구역인 계화도에도
참조기는 흔했다. 필자는 60년대 초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4킬로 떨어진 마포에서
변산면 소재지인 지서리까지 4킬로를 걸어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2학년
보리누름쯤인 어느 날 하교 길, 고사포 노루목을 돌아들자 요란하고도 흥겨운 굿
소리가 바다 쪽에서 들려왔다. 백사장에서 씨름판이라도 벌어졌나! 동무들은
반사적으로 허리에 책보를 질끈 동여매고 바다로 뛰어갔다.
고사포해수욕장 솔밭을 지나서 백사장에 당도한 우리는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다.
‘만선(滿船)’이었다. 바다에는 참조기를 가득 실은 배들이 깃발을 나부끼며
기우뚱거리고 있었고, 모래사장에는 조기들을 군데군데 산처럼 쌓아 놓은 채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한 만선의 깃발은 4~5일 더 올려졌는데, 졸지에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고사포, 성천, 삼발리 해안 일대는 작업하는 사람,
구경 나온 사람들로 꽉 차고, 평소 보기 힘든 제무시(GMC)라는 큰 트럭들은
아침저녁으로 조기들을 어디론가 실어 나르느라 바빴다.
덕분에 우리 또래들은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양손에 조기 한 마리씩 들고 한달음에
집으로 해변으로 뛰어다니며 조기를 나르다보니 제법 큰 항아리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평생에 그 맛 좋은 누런 황금조기를 항아리 가득 염장해 놓고 아침저녁으로
먹어볼 날이 또 있을까?
그 많던 조기는 어디로 다 갔을까?
그런데, 그렇게 떼로 몰려오던 조기가 197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부터 칠산바다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에 대해 해양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남획’으로 인한
수산자원의 고갈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다. 어부들의 그물코는 갈수록
촘촘해지고, 어군탐지기를 동원한 빠르고 큰 배들이 바다 밑바닥까지를 훑고 다니니
어족자원이 주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남획에만 원인이 있을까? 계화도에서 조상대대로 어부로 살고 있는 김봉수
씨(57세)는 “아무리 바다를 훑고 다닌다고 고기가 일시에 그렇게 씨가 마르겠나,
고기들의 산란장인 갯벌이 망가지니까 그렇지...”라며 남획보다는 갯벌의 훼손을
첫째 원인으로 꼽았다. 과거 갯벌에 대한 연구가 전무할 때, 갯벌은 쓸모없는
땅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바다생물의 70% 이상은 갯벌에서 산란하고, 소년어 시절을
보낸 다음 먼 바다로 나간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직강화 된 강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는 각종 오염물질로 갯벌은 죽어가고 있는데다가 더하여 무분별한
간척으로 인해 고기들의 산란장인 갯벌은 해가 다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자연배양장인 갯벌을 막대한 돈 들여 없애가며 아무리 그럴싸한 해양정책을
새로 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기는 고사하고 숭어, 망둥이라도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허철희ㅣ부안생태문화활력소 대표 (www.buan21.com)
허철희/ 1951년 전북 부안 변산에서 출생했으며, 서울 충무로에서 '밝' 광고기획사를
운영하며 변산반도와 일대 새만금갯벌 사진을 찍어왔다. 새만금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자연과 생태계에 기반을 둔 그의 시선은 죽어가는 새만금갯벌의
생명들과 갯벌에 기대어 사는 주민들의 삶으로 옮겨져 2000년 1월 새만금해향제
기획을 시작으로 새만금간척사업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2003년에는 부안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룻 『새만금 갯벌에 기댄 삶』을 펴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