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 |
[이종민의 음악편지] 영혼의 신비로운 영약
관리자(2007-12-24 19:29:23)
영혼의 신비로운 영약
이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기대와 염려를 한 몸에 받아온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축제’가 숱한 사연을 뒤로 한 채 막을 내렸습니다. 추진되는 동안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개막식 등 축제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도 안타까운
일들은 하루를 멀다하고 발생했습니다. 그래 예비대회를 통해 역량을 쌓은 다음에
착실한 준비를 해서 치르자고 한 것인데…
그러나 저 개인으로는 좋은 일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어 매우 행복했습니다.
[직소포에 들다]의 천양희 시인 시낭송회 진행을 맡은 덕에 시인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 것도 더없이 보람된 일이었으며 신경림, 정희성, 이시영 등의 시인들과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벗 김사인 시인이 한없이 깊어지는 모습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보람이자
자랑이었습니다.
그들을 만나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으니, 고뇌와 방황을
통해 점점 더 깊어지는 이가 있는가 하면 편안한 삶을 통해 점점 가벼워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끊임없는 사색과 성찰을 통해 무르익어가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
곁에서 그 훈짐으로 더 이상 천박해지는 일만은 면해가며 살아간다. 문제는 스스로
깊어지지도 못하면서 이런 이들을 만나지 못하거나 알아보지 못하는, 재수 없는
청맹과니들도 있다는 것. 그러니 이런 시인들 곁에 있을 수 있는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은 이 큰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 황병기 선생님을 만나면서 무르익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과 비빔밥을 함께 먹고 그 분 귀한 특강의 진행까지
맡아보았습니다!
이 행운 덕에 그분의 음악세계에 대해 좀더 깊이 알 수 있는 또 다른 행운까지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귀한 행사에 누가 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그 분의 생애와
음악세계에 대해 나름으로 면밀한 공부를 했습니다. 그분 음반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들어도 보았습니다. 단순한 해후가 아니라 매우 속 깊은 만남, 그 ‘놀라운
충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 대담 중에는 이런 죽비소리도 있습니다.
서양음악이 벽돌이라면 동양음악은 소리 하나 하나를 정원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서양곡은 벽돌을 쌓아가듯이 작곡하지만, 동양곡은 정원에 돌을 배열하는 기분으로
만들지요. 돌 하나 하나의 모습, 즉 소리 하나 하나가 어떻게 오묘하게 변하는가에
귀가 열려야 우리음악의 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특강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특히 저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한
것은 전통과 창조에 관한 발언이었습니다. 전통은 창조를 통해 그 ‘거대한 뿌리’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전통에 갇히면 진부해지기 십상이요 급격한 변화의 시도는
낯설어 외면당할 위험이 있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조선의 음악이다. 전통음악의
창조는 이를 이으면서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한 방편일 수 있다. 고려를 넘어 신라나 백제, 가야까지 조선음악의 원류를
되찾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음악의 창조가 이렇게 하여
가능하다. [침향무] [비단길] [하림성] 등이 그 예이며 최근의 [달하 노피곰]도 백제의
[정읍사], 그 “순수한 사랑노래”를 되살려본 것이다.
세계화를 내세우며 보편적 정서에 호소한답시고 서양의 음계와 기법에 기대다가는
우리 전통음악이 지니는 고도의 예술적 특성을 저버릴 수 있다. 그 독특함을 잃고서
세계화를 넘볼 수는 없다. 세계화는 나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제대로 세우는
일이다.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창조를 위해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 된 미래’! 그 역설과 반어의 전략, 아니 철학의
묘미를 그 특강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음악에 대한 돈독한 믿음과 철학,
그것에서 얼치기 퓨전이나 크로스오버에 대한 준엄한 질타의 목소리도 함께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양음계를 소화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우리음악의 핵심인 ‘여백의
미’ 정신은 챙기지 못한 25현가야금에 대해 그분이 그토록 소극적인 이유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즐거운 만남, 그 풍요로운 결실에 감사하며 음악 하나 올립니다. 물론 황병기
선생의 작품입니다. 우리음악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침향무](沈香舞). 너무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 없는, 이제는 전통고전이 되어버린
“신라인들이 의뢰하여 만든” 창작 무용곡. 영국의 한 평론가는 이 곡을 이렇게
평하고 있습니다.
빠르고 분주한 현대 삶에
이보다 더 필수적인- 혹은 효과적인 -해독제는 없을 것이다.
…
[침향무]를 가장 잘 감상하기 위해서는
코러스/운율, 하모니, 대위법 등에 대한 기대는 치워두고,
이 거장이 연주하는 단음조의 아름다움에 집중해야 한다.
그의 음악적 명상에는
모래시계 모양의 두 면으로 되어 있는 장구만 곁들여질 뿐이다.
그 멜로디는 즐겁게 추상적이면서도
극적으로 감정을 순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전통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을 넘나드는 황병기의 음악은,
때로는 조용한 산책처럼 느리고
생각 깊은 템포와 보다 빠른 템포 사이에서,
숲에서 울려 퍼지는 뻐꾸기 소리,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연상시킨다.
더 이상 무슨 군더더기가 필요할까…
인도의 신비로운 향인 ‘침향’의 효능은 실로 놀라운 것이랍니다. 신장을 따뜻하게
하고 혈액순환을 도우며, 간, 위, 장은 물론 알레르기와 변비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중풍 등 거의 모든 질환에 통하는, “인연이 없으면 만날 수 없는 귀한 약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침향이 우리 육신에 그러하다면 [침향무]는 우리들 마음에
신비로운 영약 같은 것이 아닐는지…
점점 움츠러들게 하는 이 계절, 이 곡 들으시며 마음의 풍과 변비도 함께 치료하시기
바랍니다.
이종민ㅣ전북대 교수·전주전통문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
※ http://e450.chonbuk.ac.kr/~leecm로 접속하시면, 그동안의 음악편지와 음악을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