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 |
[이홍재의 마을 이야기] 순창의 신사임당 열부 이씨의 거북이 마을
관리자(2007-12-24 19:27:58)
순창의 신사임당 열부 이씨의 거북이 마을
마을 어귀에 돌 하나가 있다. 바위도 아니다. 조그마한 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북이
형상을 닮았고, 거북이 꼬리가 마을을 향하여 있다고 하여 거북구(龜)자
꼬리미(尾)자를 써서 구미리라 한다. 이 마을에 남원 양(楊)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지가 60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거북이 모양의 이 조그마한 바위는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지켜주는 명물인데 꼬리
부분이 마을을 향하고 있는 것이 구미리의 부족한 풍수를 보완하여 마을의 재물이
유실되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한때 마을 입구에 있는 취암사(鷲岩寺)의 스님이
사찰의 재물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여 꼬리가 절을 향하도록 하였으나 바위 스스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자 화가난 스님이 거북의 머리를 잘라 만수탄이라는 마을앞
섬진강에 버렸다고 한다. 이일이 있은 후로 취암사는 점차 사세가 기울어 결국
폐사되고 말았다고 한다.
거북의 꼬리라는 뜻을 지닌 구미리는 순창에서 최고의 명당 중의 하나로 꼽힌다.
호남의 8대 명당 중에 순창에 3곳이 있다. 첫째는 회문산의
오선위기혈명당(五仙圍碁穴明堂)으로 다섯 신선이 바둑판에 빙 둘러 앉아 바둑을
두던 형국의 명당이고, 둘째는 고령신씨들이 사는 귀래정으로 가마솥을 얹어놓은
모양의 혈로, 물위에 떠 있는 거북의 등과 같이 우뚝 솟아 생긴 형국이다. 셋째는
구미리에 있는 남원양씨 종가집이다. 무량산에서 산줄기가 부드럽게 흘러내려오다
기운이 뭉쳐진, 큰 바위 바로 아래에 집이 있다. 이 집터의 기운으로 남원양씨가
23대째 600여년을 내려왔다는 것이다.
거북을 닮은 마을이 600여년이나 지탱하게 해줄 수 있을까? 마을 입구에 있는
고려말 직제학을 지낸 양수생의 부인 이씨의 열녀비에 내력이 있다.
남원양씨를 구미리에 터 잡게 한 사람은 고려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양수생의 처
이씨 부인이다. 젊어서 시아버지인 집현전 대제학 양이시(楊以時)와 양수생이
연이어 별세하자, 그 친가부모는 젊은 나이에 홀로된 따님을 측은하게 여겨 재가를
권유하였다. 그때는 사대부가 일지라도 재가하는 것이 상례였었다. 하지만 이씨
부인은 회임 중인 아이를 낳은 뒤, 아이를 등에 업고, 개성을 출발하여 시가의 전장이
있는 남원 교룡산성아래 옛집으로 내려왔다. 어느 날 왜구 아지발도 무리가 남원에
침입했을 때, 이를 피하여 비홍산으로 피난을 했었다. 거기서 바라본 순창
무량산(無量山)의 산세가 아름다워 그 산 아래라면 살만하겠다며 터를 잡으니
그곳이 지금의 구미(龜尾)다. 이씨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부인의 행실을 알게 된
조선 세조는 1467년 정려를 세워 후세의 귀감이 되게 했다. 그 후 200여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 비가 세워졌다.
이씨 부인이 남원으로 내려오면서 가슴에 품고 온, 시아버지 양이시가 고려 공민왕
4년 1355년 동진사(同進士)과에 합격하여 받은 증서와 남편 양수생(楊首生)이
고려우왕 2년(1376)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받은 홍패를 고이 간직하여 가지고
왔다. 그 후 증서와 홍패는 후손들이 받은 5점의 교지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고려, 조선, 일제 강점기, 해방 그리고 6. 25한국전쟁 등 숱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그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열부 이씨는 순창 남원 양씨의 입향조가 되었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손과
가문을 크게 번영시켰다. 이런 열부 이씨의 감동적인 드라마는 남원양씨가 번창한
조선시대 내내 이곳 주민들이 그녀를 존경하고, 그녀를 위대한 어머니 “大母”로서
섬기게 하였다. 그녀가 남원으로 내려와 머물렀던 교룡산성 밑은 ‘大母島’라 부르고,
구미 마을에 처음 터를 잡고 판 우물을 ‘大母샘’이라 한다.
순창에 있는 대모산성의 대모신이며, 성황사에 모신 여성황신으로 모셔져 열부
이씨는 가문의 입향조에서 지역의 수호신으로 까지 추앙을 받은, 순창의
신사임당으로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할 수 있다.
지금 종가집을 지키고 있는 75세의 김인영 할머니는 전남 장성이 친정으로
친정아버지는 면장을 지내신 분이다. 김성수, 김상협, 초대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씨
등 내노라하는 울산 김씨 후손으로 양가 명문집안끼리 결혼을 하느라 장성에서 이곳
구미리까지 시집을 왔고, 친정을 가는데 옛날에는 꼬박 하루가 걸려 3년에
한번씩이나 가 보았다고 한다.
시집올 때는 동네 가옥수가 300여호 였는데 지금은 100여호 밖에 안되고 양씨가
아닌 타성은 두 집만 산다고 한다. 급속한 시대의 변화로 현재는 혼자서 종가를
지키고 있지만, 전주에 살고 있는 큰 아들인 남원양씨 종손이 종가를 잘 지켜가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이씨 할머니 비와 비각, 350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담장너머에 살고 계시는 77살
조정남 할머니도 남원 양씨 집안이다. 남편이 동계면장을 지냈는데 돌아가신지 20여
년간 아들 셋 딸 둘을 다 출가 시키고 혼자 살고 계셨다.
“혼자 사는 것이 신간 편해. 며느리 눈치 안보고 아들 눈치 안보고. 늙으면 죽어야혀.
그리야 자식들 고생 안시키지. 아무리 시골이 공기 좋고 살기 편하다 해도 돈 없이는
못살아. 어디서든지 돈 있으면 최고여, 근디 농촌에서는 못살아 돈이 나올디가
없어서.” 라며 처음 본 나에게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