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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
[특집-문화저널 20년] 문화저널 20년, 전북문화 20년
관리자(2007-12-24 19:17:09)
문화저널 20년, 전북문화 20년 <문화저널> 창간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문화저널>이 창간한 1987년부터 전북문화 20년을 정리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세월동안, 전북의 문화도 놀랄 만큼 변화해왔습니다.   문화의 흐름도 세상의 변화와 무관치 않았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거리를 뒤덮었던 1987년, 문화예술계도 당시의 정치사회적 격변을 수용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1988년은 민주화의 열기와 더불어 그동안 규제되었던 작품들에 대한 ‘해금’의 바람으로 인해, 우리 예술사 복원의 물꼬가 트인 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서울중심의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으로 인해 지방의 문화예술인들이 좌절했던 해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1992년은 ‘온다라미술관’이 가중된 운영난으로 개관 5년 만에 폐관되었다는 기록이 눈에 띕니다. 1987년 전북최초의 유료 민간화랑으로 문을 열어, 지방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주제별 기획전 등을 소신 있게 진행해 왔던 ‘온다라미술관’의 폐관은 당시 지역문화현실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우리지역 문화예술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1998년은 1997년 12월 우리사회를 경악시킨 IMF의 한파가 본격적으로 들이닥친 해였습니다. 문화예술계 또한 전대미문의 이 역사적 한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각 분야마다 이어졌던 대형 기획전과 공연무대가 이어졌던, 전 해까지의 활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경제한파의 여파는 심각했습니다. 창작의 의지는 있으나 더 이상 발표무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만큼 문화예술인들에게 가슴 아픈 일이 있었을까요.   2000년, ‘변화’가 우리사회의 키워드였던 새로운 세기의 시작, 이때부터 문화예술계는 본격적으로 변화의 물결을 맞이합니다. 이제 문화가 ‘산업’으로 인식되면서 재화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문화가 화두가 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일상 또한 다양하고 새로운 변화를 겪습니다. 특히,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화환경에 대한 문화예술인들의 비판과 대안제시의 토론문화가 정착되고 시민문화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행정 중심으로 이뤄지던 문화정책과 사업에 문화예술인들과 시민들의 견제와 감시가 어우러지면서, 민간의 역할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 등 ‘축제’에 대한 관심도 이즈음부터 문화 뉴스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월드컵의 함성으로 뜨거웠던 2002년, 전북의 문화계도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생동감 있게 움직입니다. 전주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에 대한 염원이 모아지고, 각종 문화시설들이 속속 개관하면서 문화인프라가 새롭게 짜여집니다. 새로운 문화시설들은 ‘민간위탁’이라는 새로운 실험으로 진통을 거듭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은 ‘지방분권’이라는 단어가 화두로 등장한 해였습니다. 지방자치제도는 199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중앙집권체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자주성과 전문성을 향한 문화계 내부의 자성과 진전을 위한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2005년에는 ‘전주학’이라는 향토문화의 정체성 찾기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문단의 실질적 통합 이룬 ‘문인협회전북지부’ 새출범   ●정치적 격변 속에서 이루어진 민주화의 열기에 힘입은 87년 문화예술계는 이러한 전환기적 변화의 물결에 대응하면서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또한 민주화에의 열망이 문화?예술계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 한 해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이 문학계인데 비단 작품에 있어서 뿐 아니라 문단의 구조 변화와 새로운 단계의 문학적 관념, 문학운동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당시 정치?사회적 격변을 다양한 목소리로 수용하려는 시도였다. 그 중 3월에 있었던 ‘문인협회전북지부’의 새출범은 문인들의 뜻을 모아 문협의 구성체제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10여 년 간의 문단 분산과 표류를 일단락 짓는, 실질적인 문단의 통합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더불어 이를 기념하는 <전북 문학의 밤>을 개최해 전북 문학의 참신한 발전 가능성을 제시했고, 심포지엄과 강연회의 활성화로 문학에 대한 이해와 저변 확대를 꾀함과 동시에 생활 속에서 친밀해지는 문학이 될 수 있도록 그 문턱을 낮추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그밖에 음악, 미술, 연극과 무용 등도 폭넓은 활동과 다양한 시도로 성장을 이룬 한 해였지만, 전북 국악은 국악의 고장으로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켜 새로운 방향정립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문 고수들과 판소리를 연구해온 학자들, 그리고 북애호인들이 뜻을 모은 <대한고우회>는 판소리와 더불어 북이 차지하는 예술성과 그 위치를 정립해가는 체계적인 연구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더욱이 <대한고우회>가 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만큼 전북 국악계의 발전 역시 이끌어 갈 수 있는 견인차로서도  기대를 받았다.    ※ 한국신문학사를 이어 온 김해강 시인이 작고해,   우리 지역 문학의 맥을 지지해 준 원로 시인을 잃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신인 문인들의 등단과 젊은 시인들의 풍성한 활약이 지역 문학 발전의   희망적 미래를 기대케 하면서 우리 지역 원로 시인을 잃은 아쉬움을 다소나마 달래 주었다. -참다운 민족문학의 기치를 건 ‘전북민문협’ 출범   ●1988년은 이어지는 민주화의 열기에 힘입은 새로운 물결이 대세를 이루면서 각 분야마다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던 시기. 대표적으로 월·납북 예술인 작품규제 ‘해금’의 바람을 타고 분단40여 년의 온전치 못했던 우리 예술사 복원의 물꼬가 트였고 따라서 88년 문화예술계는 우리 민족예술사의 주체성과 정통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역사상의 의미를 지니게 됐다.   문학계에서는 강압 폐간되었던 계간문예지들의 복간, 새로운 문예지 창간, 교포작가들의 작품집 출간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더욱 괄목할 만한 변화는 작품의 내용에 있었으니, <광주항쟁> <제주4.3사건><빨치산><노동현장의 문제><반미감정> 등 우리의 삶과 시대적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 문학의 폭을 확대하고 적지 않은 의미도 남겼다.   문인 조직에 있어서도 87년 문단통합을 위한 <문인협회전북지부>가 출범한 데 이어 88년 6월에는 젊은 세대들이 주축이 된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가 발족, 또 한번의 변화를 시도했다. “참다운 민족문학이란 수 천 년의 역사 안에서 줄기찬 생명을 이어오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 민족공동체의 건강한 생활을 올바르게 반영하는 것”이라는 인식 위에 출발한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는 우리 지역이 안고 있는 폐쇄성과 파당성의 극복과 진정한 민족·민중문학의 실현을 표방했다.   미술계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것은 전라북도미술대전(이하 도전)의 난산 개최와 대상 수상작의 모작시비였다. 86년부터 도전의 민전이관을 주장해 온 미술협회는 89년, 더 구체적인 작업을 시도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출품거부운동이 벌어지고 이에 따라 출품자가 예년의 절반을 조금 웃도는 정도에 그쳤는가하면 설상가상으로 대상 수상작인 건축부문의 <디오니소스>가 일본공모전수상작의 모작임이 밝혀져 상을 반납하는 등 도전 20년에 가장 큰 불명예를 남기면서 개선방향의 모색이 필요한 시점임을 드러냈다. 사회 각 분야마다 자성과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고 민족주체성을 확립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었지만 이렇듯 문화계의 격동은 훨씬 더 큰 폭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문화예술은 서울중심의 문화예술정책에 의해 철저히 소외된 채 더욱 위축되는 결과를 남겼다. 이것은 88서울올림픽에 맞춰 체육열기 못지않은 화려한 치장으로 사회 구석구석까지 들뜨게 했던 문화예술축전에서 비롯됐다. 서울 중심의 문화예술축전은 지방 문화예술인들에게는 넘나들 수 없는 성역과 같았고 <지방문화예술활성화>는 여전히 구호에 그치고 만 정책이었음이 드러났다. ※민주화 열기에 힘입은 민중미술이 강하게 부각됨으로 미술에 대한 인식의 확대가 이루어졌고 대중 속에서 함께 하는 미술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은 온다라미술관이 지역미술인들의 이해부족과 적지 않은 외면을 감내하면서 진행했던 민중미술 기획전과 민중미술 작가 초대전으로 대표되었다. 이로써 온다라미술관은 전북미술계에서 뚜렷한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극단 ‘황토’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수상의 쾌거   ●89년 전북예술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분야는 미술계였다. 이는 도전의 민간 주최가 비록 갈등 속에서였지만 결국 성취되었기 때문. 86년부터 미술인들의 폭넓은 참여 속에 추진되어 왔던 민전은 꼭 3년 만에 그 결실을 얻게 된 셈인데 민전 첫해인 89년엔 그동안의 진통을 확인 시키려는 듯 큰 어려움 속에서 미술대전이 치러졌다. 99년 도전은 운영방법의 개선안을 놓고 미술인 사이에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면서 미술협회의 위상 정립이 새로운 문제로 부각됐는가 하면 수차례의 회의를 거치는 동안에도 이견의 폭은 좁혀지지 못해 공예분과의 추천, 초대작가가 출품거부를 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 민전 첫 회를 치렀다. 결국 민전이관을 얻어낸 대신 일부 미술인들의 갈등표출이 심화된 도전은 운영방법 개선이 보다 진지하게 검토돼야 한다는 큰 과제를 떠안았다.   전북 연극계에 쏟아진 시선도 뜨거웠다. 그 주인공은 전주의 극단 <황토>. 제7회 전국연극제에서 박조열 작  박병도 연출의 <오장군의 발톱>으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황토>는 그 역량을 새롭게 과시하며 서울연극제 초청공연, 지방순회공연, 호암아트홀 초청공연 등을 연이어 소화해내면서 활동공간을 전국으로 확산했다. 또한 <황토>가 운영하는 <황토예술극장>은 꾸준히 작품을 올리면서 연극관객 확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연극붐을 조성하는 구심점이 됨으로 소극장 공연무대의 정착을 시도했다. 군산, 남원, 익산 등에서도 극단이 활성화되고 소극장 마련에 의욕을 보인 것은 <황토>로 인한 ‘연극붐’과 무관치 않은 성과였다. 한편, 89년 전북문단의 가장 큰 변화는 지역 문학발전의 중심이 되는 동인지들의 독자성 확보였다. 제 목소리를 찾은 동인지로 말미암아 기존 문단 풍토에는 새 변혁의 기운이 일었으며, 이것은 문인들이 가장 폭넓게 참여하는 문인협회전북지부의 위상을 점검하고 세우는 기틀을 마련하는 결과로 이어져 신인과 중견 작가들의 의욕적 창작활동을 북돋웠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세미나, 창작교실 등의 정착을 도와 문학인구 저변 확대라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도립국악단이 88년 창단한 이후 89년에 첫 창단 연주회를 가졌다.   이 창단연주회에서 전통의 명맥을 잇는 판소리와 창극에 관현악을 접목시킨   다양한 무대를 선보임으로 소리 중심의 전통국악에 기악의 조화를 시도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전북지역 국악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 제시를 의미했고   더불어 98년 말 창단한 민간연주단체 전주국악관현악단의   창단 연주회에서도 이러한 창작 국악의 새바람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새 시대의 가능성 ‘창작소극장’과 ‘창작국악’으로 열었다 ●새로운 연대의 시작인 1990년은 80년대가 문화예술 각 분야에서 압축해 낸 특별한 성과 위에서 새로운 시대에 부합될 수 있는 작업 가능성이 이미 제시되고 있었고 그만큼 폭넓은 활동과 연구가 기대되던 해였다.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 소극장 무대가 돋보인 연극계의 활동이었다. 어려운 무대 여건 속에서도 8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역량을 모아온 도내 연극계는 90년대의 시작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성과들을 끌어냈다. 그 중 소극장 무대의 정착은 가장 두드러진 성과였다. 실질적으로 해체상태에 있던 <창작극회>가 시립극단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재정비되면서 전주시 경원동에 1백석 규모의 자체 소극장을 마련, 우리 지역 문화예술공간을 확장하고 장기공연 및 지속적 무대의 안정성을 제공했다. 90년 한 해 동안 30여 편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고 연간 지속적으로 공연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성과였다. 전북 국악계도 새로운 연도에 어울리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바로 전통음악의 재창조 작업을 활발히 진행한 것이다. 그간 전북이 국악의 전통적인 맥과 특히 남도소리를 바탕으로 한 튼실한 뿌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창작국악이라는 현대화 작업에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 그러나 황병기, 박범훈, 김영동의 창작국악이 무대에 올려지면서 보수적이었던 전북 국악의 토양에 신선한 양분이 제공되었다. 이와 함께 88년 창단 후 큰 호응을 얻고 있던 도립국악관현악단에 이어 전주국악관현악단, 전주 우석대학국악과연주단, 전북대국악과연주단이 보여준 무대 또한 생활 속 국악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대중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어냈다.   -민족문학 위기설과 ‘전북민문협’ 민족문화 발판 마련   ●예체능계 입시 부정사건, 미술계의 모작 시비 등 연초부터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진 91년 문화예술계는 각 부분마다 적지 않은 변화를 체감해야 했었다. 지역 예술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지자제 실시라는 사회적 변화에 합류해야했던 전북의 예술계 또한 변화의 물결 위에서 함께 이동해갔다. 그 중 가장 열띤 한 해를 보낸 것은 한국 문단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활성화되고 민족문학의 위기설과 그에 대한 민족문학 진영의 반론제기, 다시 일어난 리얼리즘 논쟁 등의 정신없는 변화 속에서 전북 문학계는 1988년 창립한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가 3년에 가까운 공백을 깨고 재출범, 제 1기 민족문학강좌를 개설하고 기관지를 발간하는 등 한국 문단에서 거론되고 있던 민족문학 위기설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학의 발판을 다지는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 전북 문학의 새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또 91년은 문화부에서 정한 첫 <연극영화의 해>였다. 전국적으로는 이에 상응하는 ‘연극붐’이 조성되지 못하고 서울에 편중된 정책으로 지역 연극인과 관객들이 오히려 소외감을 느꼈지만 전북 연극계는 오히려 전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군산, 익산 극단들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특히 창단 5년차인 익산 지역 극단 <토지>가 전북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후 전국연극제에서는 우수상을 거머쥐어 놀라움과 부러움의 시선을 동시에 받으며 지역 연극계의 역량을 또 한 번 과시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 무용계는 연극계와 명암이 엇갈린 한해였다. <91 연극영화의 해> 에 이어 92년이 <춤의 해>로 지정되어 기쁨에 들썩였던 것도 잠시, 이화여대 무용과 입시 부정사건으로 한국 무용계의 대모인 육완순(현대무용), 김매자(한국무용), 홍정희(발레) 교수가 줄줄이 구속됨으로써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것은 물론 <92 춤의 해> 준비도 휘청거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 여파로 전주에서 개최된 제 4회 <지역간 연합무용제>에 대한 반응마저 시들해 춤꾼들의 구슬땀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가중된 운영난으로 ‘온다라미술관’ 결국 문닫아 ●92년 한 해는 각종 공연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풍성하게 치러졌던 한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해외예술인과 단체들의 내한공연이 호황을 누렸던 것과는 달리 국내 예술 공연은 “풍요 속의 빈곤”현상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질적 향상에 부진했다. 그에 비하면 전북예술계는 각 부문별 활동이 활발히 이어지면서 전환기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춤의 해>를 맞은 전북무용계는 그 어느 분야보다 바쁜 한해를 보냈고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은 공연예술계는 창작의욕의 신선한 기류가 형성될 만큼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졌다.   <춤의 해>를 맞아 가장 바쁜 한해를 보낸 무용계는 <춤의 해> 운영문제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잡음이 이는 등 아쉬움을 주었으나 전북지역의 무용계는 꾸준히 이어진 공연활동으로 양적, 질적 성장을 함께 채워냈다. 92년 한 해 동안 도내에서 마련된 춤 무대는 40여 회에 달했고 특히 우진문화공간이 마련한 기획춤판과 익산을 중심으로 정기공연만을 진행해오던 한국춤 <원무용단>의 창작소극장 정기춤판 등 소극장 기획 공연이 대중들의 춤에 대한 인식을 높여준 시도로 주목을 받았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펼친 무용계와는 달리 도내 미술계는 온다라미술관이 가중된 운영난으로 개관 5년 만에 폐관되는 안타까운 일을 겪어야 했다. 온다라미술관은 87년, 전북 최초의 유료전시관으로 운영된 민간화랑으로, 지방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표현 양식의 초대전, 주제별 기획전 등을 소신 있게 진행해 우리지역 미술발전에 큰 역할을 해왔었다.   연극계도 큰 진통을 겪은 한 해였다. 전북지역 연극 역량을 전국적으로 과시하는데 큰 몫을 했던 극단<황토>가 내부적 갈등으로 상당수 단원들이 흩어지고 지역 연극 발전을 도모해왔던 박병도 씨가 이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파생되는 등 적지 않은 파란을 남겼다. 게다가 <황토>의 문제가 연극영화협회 체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집행부가 사퇴하는 등 연극인들 사이에 내제되어 있던 갈등과 불신이 표면화되어 전북 연극계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도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창작극회에서 활동하던 안상철 씨가 뮤지컬 전문단체인 <디딤예술단>을 창단, 독립하면서 첫작품 <파랑새>를 선보였다. 이에 많은 관심과 호응이 모이면서 전북지역 연극의 다양화와 전문화를 기대해 볼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답답한 92년 전북연극계의 숨통을 다소나마 틔워주었다. -‘창작극회’ 대통령상 수상 침울한 전북 연극계 재도약 기대 ●93년 전북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분야는 전년도에 갈등과 불화로 크게 홍역을 치렀던 전북 연극계였다. 또 한 번의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수상이 긍정적인 주목을 이끌어낸 일등 공신. 89년 극단<황토>가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후 4년 만에 <창작극회>의 <꼭두꼭두>가 다시 한 번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창작극 공연이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곽병창 씨가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한 <꼭두꼭두>는 꼭두극이라는 전통 연희양식을 연극 무대에 새롭게 도입함으로써 표현 양식의 개발이라는 성과를 함께 거두었다. 무용계는 전년도의 풍성했던 활동을 바탕으로 춤 대중화의 기지개를 켜는 도약의 몸짓을 보였다. 특히 대학 무용이 활성화 되면서 아카데미즘과 기성 무용계의 자연스러운 접목이 무용발전의 건강한 바탕으로 가늠되는 분위기 속에서 대학 강단에 서 온 무용인들이 창작무대로 진출, 의욕적인 활동을 펼친 것은 그 당시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국악계는 전통과 현대 가락의 접목이 왕성한 가운데 도립국악단의 창무극 <춘향전>과 정읍사국악원이 주축이 된 정읍시의 가무극 <정읍사> 등의 공연이 국악 부흥에 대한 기대심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국악 부흥의 기대감은 젊은 세대들이 주도하는 풍물패의 강습과 각계각층의 국악 동호인들이 참여한 민간단체들의 국악 대중화 사업에서 비롯되었다. 이로써 국악이 일반 대중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던 것. <92 춤의 해>에 이어 <책의 해>였던 93년, 문학계에서는 신인 문인들의 작품집이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문학대중화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더불어 글쓰기 인구가 확산되어 문학강좌나 창작교실 등에 수강생이 몰려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고. ※93년 새롭게 제정된 <모악문학상>도 문학 활성화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다. 이 지역 출신 문인 하회주 씨가 고향의 문학발전을 위해 창작지원금과 운영비를 전체 부담하며 제정한 모악문학상은 1천 만 원이란 지원금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문학인이 제정한 문학상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협회 내분 속에 실속 없던 ‘국악의 해’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이자 <국악의 해>였던 94년은 갑오년 역사를 소재로 한 예술 작업들이 뒤를 이으면서 예술의 본질적인 힘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는가 하면 부흥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던 국악계는 오히려 예술의 역할을 퇴색시키는 작업과 사건들이 드러나면서 큰 아쉬움을 주었다. 올해 국악계는 <국악의 해>라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시의적절하게 살려내지 못한 채 국악 단체의 심화된 갈등에 휩싸여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서울에서부터 터진 국악계의 내부 갈등은 국악의 해를 맞은 예술계의 전반적 국악 활동을 위축시켰고 그 역량을 분산시켰다.   전북지역의 국악계도 이러한 고질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상반기부터 노출된 국악협회의 내분이 하반기까지 지속되면서 그간 연례적으로 치러 왔던 행사와 사업조차 졸속으로 진행하는 상황이 되었다. 국악계의 고질적인 병폐가 국악의 해를 맞아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기를 기대했던 바람은 무산되었고 국악협회 전북지부의 파행으로 전통음악의 고장으로서의 자부심이 무색, 실속 없이 저물어 간 <국악의 해>가 되고 말았다. 미술계는 동학혁명 백주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회를 열고 실험성이 돋보이는 기획전시회를 풍성하게 마련, 미술대중화를 겨냥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성과 뒤에는 새로이 개관한 화랑을 비롯해 그 시설과 내용을 보완해 다시 문을 연 기존 화랑들의 역할이 있었는데 <아트센터 민촌>과 문화공간<모악재>의 개관도 이런 사설 화랑들의 활기찬 움직임에 힘을 보탰다. 전북 연극계도 쉴 틈 없는 무대로 94년 한 해를 채웠다. 특히 <디딤예술단>이 돋보인 해였는데, 93년 초 자체 소극장을 마련한 <디딤예술단>은 신인 단원이 중심이 된 열악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했고 그 결과 단원들의 역량이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효과를 거두면서 작품 <풍금소리>가 전국연극제에 참가, 입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출연진의 대부분이 신인이었음에도 짜임새 있는 구성과 탄탄한 연극의 기본구조, 무엇보다도 무대에서 보여준 출연진들의 성실함이 <디딤예술단> 입상의 ‘디딤’돌이 되었다는 후문도… ※몸살을 앓던 94년 국악계에서 전북도립국악원의 활동은 오히려 더욱 빛을 발했다. 국악 전통의 역량을 제대로 축적해 가면서 93년 첫 선을 보였던 창무극 <춘향전>이 더욱 다듬어진 모습으로 국내 순회공연과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경축공연으로 올려져 우리 전통문화의 독창성을 알리고 전통문화 현대화의 발전방향을 제시한, 94년 국악계의 효녀이자 백미가 되었다. -‘미술의 해’ 강암 서예관과 오궁리 미술촌 개관, 공간이 풍성해지다 ●해방 50년, 지방자치시대의 본격적 개막을 알린 95년은 온갖 대형 사고부터 전직 대통령들의 구속까지 충격, 분노, 혼돈 속에서 지나갔다. 해방 50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있었지만 관심이 집중된 미술계를 제외하고는 여타의 분야들은 평년 수준에 머무른 한 해였다. <미술의 해>로 지정된 95년은 전북 미술계의 발걸음은 분주한 가운데 지나갔다. <미술의 해>를 겨냥한 각종 기획사업들이 줄을 잇고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전시회가 열렸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성과는 강암 서예관과 오궁리 미술촌의 개관이었다. 전북 서예사에 유의미한 획을 그은 강암 송성룡 선생 서예관의 개관으로 뿌리 깊은 전북 서예의 맥을 조망해 볼 수 있는 터를 닦았고, 임실 오궁리의 폐교를 활용해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 된 오궁리 미술촌은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주고 전국적인 명소로 소개됨과 동시에 창작의 산실로 또 미술 대중화 작업의 근거지로 기대를 모았다.   연극계에도 괄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소극장 살리기 운동’이 그것인데, 95년 전북 문화계의 이슈가 ‘위기에 놓인 전북연극계’였던 만큼 재정난으로 폐관 위기에 처한 극단이 늘고 또는 몇몇 극단들의 활동 중단 소식이 어렵지 않게 들려오곤 했었다.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게 한 ‘소극장 살리기 운동’은 군산 갯터소극장 살리기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개관 1주년 만에 임대료 부담 때문에 폐관 위기에 놓인 <갯터>소식이 그 즈음 전주를 찾은 한국연극협회 정진수 이사장에게 전해지자 정 이사장이 소극장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섰던 것. 연극인들의 십시일반으로 위기를 모면한 <갯터>는 군산의 한 기업인으로부터 임대료를 기부 받는 기쁨까지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사건은 우리나라 판소리를 대표하던 거목, 명창 김소희 선생의 작고였다. 김소희 선생의 작고 소식은 전북 국악계는 물론 우리나라 국악계에도 큰 손실과 안타까움을 안겼다. 평생을 소리로 살아온 만정 김소희 선생은 늘 그리던 고향 고창 땅에 묻혀  고창 땅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1995년 미술계는 세계화의 파고에 합류하는 국제적 역량이 돋보였다. 국내 미술인들의 오랜 소망이었던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화단의 국제무대 진출이 유의미하게 인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축제에서 정읍 출신인 전수천 씨가 특별상을 수상, 우리미술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전북에도 큰 기쁨을 선사했다. -최 선 씨 ‘호남살풀이’ 문화재 지정, 시인 안도현 ‘연어’ 화제작 부상 ●96년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돋보인 분야는 무용이었다. 90년 대 중반에 들어 본격적인 공연무대의 활성화로 새롭게 변모한 무용계는 96년에도 두드러진 활동으로 지역 무용의 발전가능성을 보였다. 양적 증가와 질적 향상을 동시에 달성하면서 지역 춤판의 부흥을 불러왔다. 전북도립국악단 상임 안무자 문정근 씨의 <아버님 전상서>가 전국무용제에서 안무상을 수상해 전북 무용이 권위 있는 인정을 받는 동안 현대무용단 <사포>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야외공연으로 마련했던 <9월의 신부>가 큰 호응을 얻음으로 일반인들에게 독특한 문화체험을 통해 예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성과를 거둬들였다. 무엇보다도 96년은 처음으로 우리 전통춤이 문화재로 지정된 해였다. 그 1호는 <호남살풀이> 중진 무용가 최선 씨. 최선 씨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됨에 따라 우리 지역의 정서를 담은 살풀이 춤의 맥이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전북 국악계는 전년도인 95년에 이어 또 한 번 안타까움을 겪었다. 동편제 소리의 마지막 적자로 우뚝 서있던 강도근 명창이 작고한 것이다. 그는 96년 5월, 자신이 태어나 끝까지 지켰던 남원 땅에서 일흔아홉 해의 생을 마쳤다. 외고집으로 지켜온 소리길에의 열정을 어린 제자들에게 물려주고자 자신의 한평생을 바쳤던 강도근 명창은 우리 국악계에 ‘목숨보다 더 소중히 지켰던 소리’의 진정한 가치를 남기고 떠났다. <문학의 해>를 맞은 96년의 문학계는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사업들을 전개했으나 이에 대해 화려하기만 하고 참다운 문학발전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에 비해 전북 문학계는 <문학의 해>라는 기회를 내실 있게 활용했다. 문인협회 중심으로 구성된 ‘96 문학의 해 전북기획단’이 연간 펼친 사업은 20 여개에 이른다. 이 중 분야별 작품집과 전북문학사 발간 작업은 가장 주목을 받은 사업이었다. 하나 더 주목을 끌었던 소식은 연초에 발간된 안도현 시인의 <연어>가 문학계의 화제작으로 부상하면서 전국적으로 꾸준한 인기를 누린 것. 개인 작품집 발간이 어느 해보다 활발했던 때였으나 오히려 문학성이 돋보이는 수작을 얻지 못해 아쉬워하던 문학계를 위로할만한 반가운 소식이 되었다고 한다. -지역문화의 뿌리에 눈을 돌리다 ●1997년은 무엇보다 학술계의 성과가 컸다. 학술행사의 양적 증가와 함께 지역별?전문분야별로 발전을 거듭한 해였다. 전국적인 학술행사와 대학 및 일반 학술단체의 작업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전문분야별로 의미있는 연구와 시사성 있는 행사들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중 최대 수확 중 하나는 대학중심의 학술행사에서 탈피해 자치단체나 사회단체가 주관하는 학술연구활동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 지역문제에 대한 각 분야의 관심과 활동이 그 어느 해 보다 활발했었다.   국제학술대회가 꾸준히 열리면서 학자들 간의 국제 교류가 이어졌고, 각 지역의 학술사업도 주목을 끌었다. 특히, 근대사의 문을 연 동학농민운동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었다.   고창군의 ‘고창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는 시군단위의 지역들이 역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학술적인 지역사 연구에 나섰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던 행사였다. 이외에도 정읍과 완주 등 동학농민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군단위 지역들이 지역사에 대한 학술적인 작업을 찾아 나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지역주민의 구체적인 삶을 실천적으로 연구해온 호남사회연구회는 창립 1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성과를 재점검하는 학술회의를 열기도 했다.   문학부문에서는 1996년 문학의 해의 활동에 견주어 다소 침체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전북문학의 뿌리를 찾고 그 맥을 조명하는 사업은 그 어느 해보다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전북작가회의의 창립과 원로시인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의 고하문예관 개관, 미당시문학관 건립 추진 등 굵직한 성과들이 뒤를 이었다.   4월에 창립한 전북작가회의는 그동안 같은 목적으로 활동해왔던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가 체제와 옷을 바꾸어 입은 차원이었지만, 기관지 「작가의 눈」을 발간한데 이어 여름시인학교 개최 등 대중적인 문학사업을 의욕적으로 꾸려 주목을 모았다.   전북출신 작가들의 활동도 돋보였다. 한국문학사에 큰 걸음을 놓은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씨는 문학계의 최대 화제가 되면서 전북문학의 탄탄한 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으며, 섬진강 시인 김용택 씨가 소월문학상을, 정읍 출신 소설가 신경숙 씨가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97년 전북화단은 ‘풍요로웠다’는 말로 대변된다. 신설화랑의 개관, 지역의 독창적인 문화풍토나 역사성을 살려낸 미술축제, 현대사회의 상황을 진지한 관심으로 조명한 기획전 등 그 여느 해보다 새로운 시도가 뒤를 이었다.   그 중에서도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적 규모의 전시회는 전북지역의 독특한 문화 뿌리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세상을 떠나다 ●IMF라는 심각한 경제한파에 문화예술계도 예외 없이 어려움을 겪었던 한해였다. 각 분야마다 대형 기획전과 대형공연무대가 이어졌던, 전 해의 활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경제한파의 여파는 심각했다. 창작의지는 있으나 더 이상 발표무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창작현장도 적지 않았다. 재정적 어려움은 가중되었으나 예술인들의 창작열정은 오히려 뜨거운 한해이기도 했다.   출판계는 IMF의 영향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줬다.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던 출판물이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였다. 문학인들의 창작 결실이 그 어느 해보다 저조했던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치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1998년 전북문학계의 가장 큰 안타까움은 우리지역이 낳은 작가 최명희 씨가 작고한 것이었다.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그는 2년 여 동안의 투병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2월 11일 우리 곁을 떠났다. 자신이 늘 그리워했던 고향 전주의 건지산 기슭에 안장된 고인의 문학과 치열했던 예술적 삶은 이제 고향땅과 고향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안기게 되었다.   미술부문에서는 판화의 대중화 터다지기가 가장 큰 성과였다. 전북판화가협회를 발족해 회원 중심의 전시활동을 해온 미술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제1회 전북판화공모전을 시작했다. 복제성을 바탕으로 대중적 관심을 모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술의 영역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판화가 지역미술 속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기 시작한 셈이었다.   국악부문에서도 성과가 컸다. 1998년은 국악발전을 새롭게 가늠케 해주는 성과를 거둔 해로 기록되고 있다. 국악기개량사업과 국악상설 공연의 정착화는 국악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대중화의 실질적인 가능성을 보여준 결실들이었다. 전북도립국악원이 추진한 국악기 개량사업은 전통적인 악기의 외형을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로 한정시키면서도 효과적인 음량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술개발로 주목받았다. 국악상설공연의 정착회도 도립국악원이 거둔 몫이었다. 매주 토요일 국악원 강당에서 열린 상설공연은 초반을 넘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늘어나는 관객들로 주최측에서는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고… ※1998년은 전국규모의 문학상들이 우리지역 문학인들에게 쏟아진 해였다. 중진소설가 최일남 씨가 오영수문학상을, 서정인씨가 김동인문학상을, 최기인씨가 조연현문학상을, 안도현 시인이 김소월시문학상을, 정읍출신 소설가 은희경씨가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예년에 없이 도내출신 작가들의 수상이 잇따랐다. -세기말, 그 혼돈과 희망의 시간 ●20세기의 마지막 해이자,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세기말을 수식하는 단어는 ‘고통’과 ‘혼돈’이었지만, 문화계는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세기는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1999년 전북 문화계의 수확도 적지 않았다. 높은 관심 속에 종이축제가 시작됐는가하면, 전북도립미술관의 건립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했고, 전주대사습놀이 국창대회 개최추진 작업이 공론화됐다. 가람 추모 시조작품 현상공모 제정으로 오랜만에 문학의 맥을 잇는 사업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음악계에서는 국악과 양악 할 것 없이 창작활동이 활발했다. 연극인들에게는 오랜 소망이던 박동화 선생의 동상이 작업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세워지는 뜻 깊은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9년 한해 문화계의 가장 큰 이슈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방향에 대한 논란이었다. 당시는 ‘영화제 춘추 전국시대’라고 할 만큼 전국적으로 많은 영화제가 생겨나고 있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1997년에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가 열렸고, 여기에 서울영화제, 퀴어영화제, 인권영화제, 여성영화제 등 중소규모의 영화제들도 나름의 목소리를 내면서 젊은 세대에 접근하고 있었다. 1999년엔 전주도 새롭게 그 대열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메카였던 전주영화의 역사를 되짚으며, 새롭게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영화제를 선택한 것이다.   ※1999년은 수확만큼이나 잃은 것도 많았다. 원로예술인들의 부음이 잇따른 것.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힘이 되었던 벽천 나상목, 강암 송성용, 토림 김종현 선생이 그해 1월과 2월에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고, 지역문화계의 크고 작은 일의 중심에 서있었던 영화인 탁광 선생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전북문화의 근대와 현대를 잇는 시점에 활동했던 원로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잇따른 작고는 커다란 아픔이자 손실일 수밖에 없었다.   -변화의 한복판, 시민문화운동 기지개 펴기 ●새천년을 시작한 2000년, 우리사회의 키워드는 ‘변화’였다. 문화가 산업이 되면서 재화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문화가 화두가 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 또한 다양하고 새롭게 변화되었다.   2000년 전북 문화계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환경을 진지하게 주목하는 작업, 그리고 변화의 흐름을 맹목적으로 쫓아가지 않겠다는 문화운동적 측면의 활동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한해였다. 수확도 많았고, 상징적 문화운동의 성과도 컸다.   그중 가장 돋보인 활동을 꼽는다면, 문화환경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의 토론문화 정착의 가능성과 시민문화운동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전북지역 문화예술인들의 뜻을 모은 전북문화개혁회의(전북민예총의 전신)가 창립하고 시민운동단체인 시민행동21의 문화분과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문화엔지오들이 적극적인 의지로 지자체의 문화정책과 사업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활동에 나서는 등 문화판의 열기는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2000년을 말하면서 ‘축제’를 빼놓을 수 없다. 문화관광상품을 내세운 각종 축제들도 그 여느해보다 새롭게 만들어져 문화지형을 변화시켰다.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 예비행사가 열렸고, 익산에서는 세계아동청소년 공연예술축제가 개최되어 관심을 모았다.   저마다 다른 색깔의 축제들이었지만, 국제적인 행사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노력은 마찬가지였다. 이 가운데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제 기획단계에서부터 부정적인 인식으로 시작한 행사였다. 이미 부산과 부천에서 국제영화제가 시작된 상태인데다가 전주의 전통적인 이미지와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와의 결합이 가능할까라는 회의적인 반응이 컸던 것. 하지만, 첫 번째 영화제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과 평가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전주세계소리축제 예비행사를 둘러싼 과다한 예산 남용과 비전문적인 축제운용, 관주도의 진행 등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문화산업과 환경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전북도립미술관 건립이나 소리문화의전당, 전통문화특구, 전북도의 중장기발전계획 추진 등 지자체의 굵직한 문화정책과 사업에도 모아져 다양한 비판과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문화계의 지자체 문화정책에 대한 견제와 감시 활동이 활발했다.   ※2000년에는 예술현장의 활동이 활기를 띠었다. 창작작업이 활발하게 이어졌는가하면, 민간단체나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문화공간의 상설공연이 자리를 잡았다. 한솔문화공간과 경원아트홀, 이성재 갤러리, 리베라 갤러리 등 전주에서만도 작은 문화공간들이 속속 문을 열렀고, 기존 공간들과 함께 기획공연과 전시에 나서, 그 어느 때보다도 볼거리를 풍성하게 제공했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개관하다 ●2001년도 문화계는 ‘21세기 전북문화의 가능성을 엿보인 한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만큼 여느해보다 봇물을 이룬 쟁점과 화제로 뜨거운 한해였다.   문화예술인들의 숙원이던 문화인프라가 대폭 확충되었고, 각종 시설과 단체의 문화경쟁력 강화를 위한 민간위탁 추진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축제와 국제행사들은 쓰라린 실패와 소기의 성과를 담아내며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내비쳤다.   문화관광부가 ‘지역문화의 해’로 선정한 2001년, 전북문화계의 가장 큰 이슈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개관이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9월 21일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 수도권 이남에서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공연장이었다. 총 사업비 1천89억원을 들여 착공 44개월 만에 문을 열었다. 지역민들에게는 자부심과 함께 문화향유권 확대를,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창작열을 발산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에 충분했지만, 개관 초반부터 드러난 시설의 문제점이 적지 않아 여러 지적의 목소리가 높기도 했다.   국악계에서는 ‘전북도립국악원’의 민간위탁을 둘러싼 분쟁으로 시끄러웠다. 민간위탁방식을 놓고 전북도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도립국악원 예술단은 신분상의 불안과 전북국악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국악원 노조를 설립하는 등 외줄타기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국악계는 그 성과도 컸다. 특히 주목받았던 것이 자율성과 다양성을 화두로 삼은 제3회 전주산조예술제였다. ‘산조, 새로운 시도와 다양한 접근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한 이 축제는 창작판소리와 다른 음악의 판소리화를 선보인 또랑깡대 컨테스트를 비롯해 축제의 마당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기획으로 현대 축제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우리지역의 ‘명창’등용도 활발했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왕기철씨가, 임방울국악제에서 김경호씨가, 보성판소리대회에서 이귀례씨가 각각 대통령상을 차지하면서 우리지역 판소리의 저력을 알렸다.   2001년 10월에는 소리축제의 열기가 문화가를 휩쓸었다. 하지만, 다양한 소리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데 그쳐, 정체성을 상실한 채 당초의 취지를 살려내지 못했다는 비난도 면치 못했다.   문학계의 성과도 컸다. 무엇보다 2001년 전북문학의 가장 큰 성과는 작고 작가들에 대한 추모사업 추진이 활발했다는 점. 2000년 말 타계한 서정주 시인을 기리는 미당시문학관이 사업비 10억원을 들여 11월 3일 완공됐고, 혼불기념사업회가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작고 3주기를 맞아 최명희청년문학상과 학술상을 제정, 수상자를 냈다. 12월 11일에는 제1회 혼불문학제가 열리기도 했다. -문화인프라 구축과 민간위탁의 해 ●2002년은 월드컵의 함성과 환의로 뜨거웠다. 전북의 문화계도 그 어느 해보다 힘차고 생동감 넘쳤다. 전주한옥마을 내의 전통문화시설과 전주역사박물관, 익산 보석박물관이 문을 여는 등 문화시설이 대폭 확충됐고, 문화시설의 민간위탁 시행으로 문화계에 새바람이 일었다. 월드컵과 함께 찾아온 풍성한 문화행사는 지역 문화계의 저력과 발전 가능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했고, 각종 축제와 전국연극제, 전국민족문학인대회 등 전국규모의 행사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성과 못지않게 큰 과제로 부각된 쟁점도 적지 않았다. 전북도립국악원은 단원 118명 전원 해촉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를 맞았는가하면,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 수탁자인 중앙공연문화재단이 내홍을 겪으면서 운영주체를 다시 선정해야 하는 상황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문화행정의 전문화와 인프라 구축 확대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문학계에서는 전북이 낳은 문인 추모사업이 친일행적 논란과 함께 무산되었는가하면, 최명희 선생의 문학세계를 추모하는 혼불기념사업단은 자치단체의 마구잡이식 행정에 그 의미가 퇴색할 우려에 처하기도 했다.   2002년 우리 문화계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 다양한 문화시설 개관으로 문화인프라가 새롭게 짜여진 것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전주시가 한옥마을에 건립한 전통문화공간을 비롯해 전주역사박물관 등 6개 민간위탁시설들이 순차적으로 문을 열면서 ‘천년고도’ 전주가 지닌 전통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출구가 됐다.   이들 시설에 민간위탁이라는 새로운 운영 방식이 도입된 것도 지역 문화계와 시민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전통문화센터는 시공사의 부실공사로 인해 전주시의회 사무감사까지 받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한옥생활체험관도 예산부족으로 인해 운영 석달만에 직원 3명이 구조조정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2002년에는 친일문학 논란이 화두가 된 해였다. ‘제1회 미당시문학제’가 우여곡절 끝에 취소됐다. 애초 문학제를 준비했던 문인협회 고창지부가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 등과 친일논란 성명서 설전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채만식 1백주년 기념행사’도 우여곡절 끝에 축소되어 열렸다. 그 후에도 문학인들의 문학적 성과와 삶의 모순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판소리, 세계로 향한 날개를 달다 ●2003년 문화계를 대표할 수 있는 두 단어는 ‘지방분권’과 ‘판소리 세계문화유산 등록’이었다.   지방자치제가 시작한지 10년이 다 되어갔지만, 그동안 중앙집권체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지방분권운동’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것. 문화계에서는 ‘문화분권’, ‘문화컨텐츠’, ‘문화클러스트’ 등이 정점에 놓이면서, 자주성과 전문성을 향한 문화계 내부의 자성과 진전을 위한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이런 흐름과 함께 ‘문화상품 찾기’가 지역발전을 위한 핵심 전략 중 하나로 떠올랐다. 문화가 산업 영역으로 부상하면서 소리, 음식, 영상, 한지, 한방 등 지역문화의 유무형 자산과 역사의 정통성, 도시의 특산물과 이미지를 활용한 축제 등을 ‘문화상품’으로 연결해 관광산업적 부가가치 창출로 이으려는 시도들이 뜨거웠다.   판소리 세계문화유산 등록은 우리 지역의 큰 기쁨이었다. 2003년 11월 판소리(중요무형문화재 제5호)가 유네스코의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선정됐다. 한국으로서는 2001년 1차 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된 국내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1호인 종묘제례, 종묘제례악 이후 두 번째였다. 판소리의 세계무형문화유산 걸작 등록으로 한국의 문화적 역량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유네스코가 판소리 보존을 위한 재정지원과 홍보활동 등 보존과 전승사업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판소리의 세계화에 진일보하는 통로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여기에 인터넷을 타고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산조예술제의 ‘또랑강대’는 판소리 향유층을 가장 단시간에 넓히면서 판소리의 대중화에 일조했다. 이를 동력으로 소리축제에서도 판소리사습대회와 판소리사설공모 등을 시도 했고, 판소리를 세계가 주목하면서 판소리 관련 학술대회도 봇물을 이뤘다.   2003년부터 전북이 명실공히 영화의 고장이 된 것도 커다란 성과다. 그 해에만 27편의 영상물 제작을 유치했다. 전주영상위원회의 활동이 컸다. 특히 봉동 과학산업단지와 부안 계화도 등을 활용한 오픈세트 유치와 영화시사회 정례화 바람은 괄목할 만한 성과로 꼽힌다. 1960년대 이후 지역 최초의 장편영화제작사인 (주)자연영화사 설립도 화제였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독립영화협회, 온고을영화터를 주축으로 지역 영화인프라 구축이 가시화 됐고, 도내 상영관들의 멀티플렉스화도 급속도로 이뤄졌다.   -미술인의 꿈, 전북도립미술관 개관 ●2004년에는 예산미확보와 공사중단 등의 어려움을 이겨낸 전북도립미술관의 개관이 단연 화제였다. 전북도립미술관은 오랫동안 지역미술인들의 숙원이었다. 전북도립미술관은 ‘엄뫼 모악’전과 ‘전북미술의 조명’전 등 전북과 전북미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개관전과 함께 문을 열고 전북미술의 도약을 다짐했다.   미술계에서는 ‘공공미술’과 ‘미술교육’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공공미술’과 ‘창작스튜디오지원사업’, ‘학교미술교육의 새로운 방향모색’ 등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벗고 생활 속으로 들어오려는 미술인들의 의식변화와 구도심의 빈상가나 폐교 등을 활용한 작가 작업실 지원 사업 등 미술가들의 고민이 치열했던 해였다.   젊은 작가들의 모임인 그룹 발은 전주천에서 공공미술전을 벌였고, 대중이용시설 내 미술작품 감상공간을 마련하는 국립현대미술관 작은미술관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 조성되어 공공미술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도립미술관 개관전, ‘신시도 프로젝트’와 ‘역사와 함께 한 미술여행’ ‘표현과 발상을 위한 교육 전망전’ 등은 학교 미술교육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제시했다. 한편,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해 처음 시도한 전북아트페어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조화를 시도해 관심을 모았으나, 저조한 판매율로 아쉬움을 남겼다.   공연에서는 클래식의 대중화가 돋보였다. 국내외 유명 음악단체들과 음악인들의 전주 나들이가 줄을 이었고, 지역 음악단체들의 수준있는 대규모 공연제작이 잇따랐다.   ‘클래식의 대중화’는 오랜 시간 서양음악가들의 빗겨갈 수 없는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2003년에는 ‘오케스트라와 청소년을 위한 음악페스티벌’, ‘세계 교과서 음악회’, ‘가정음악회’, ‘5월의 노래’ 등 도내 음악단체들의 친숙한 곡과 구체적인 해설, 테마가 있는 음악회, 찾아가는 음악회 등으로 관객과 눈높이 맞추기에 나섰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은 지역의 유망주들을 무대에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서양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대학생 등이 무대에 오를 기회가 많아졌고, 기존 단체들의 유망 신인들에 대한 배려도 늘어나는 등 아낌없는 ‘투자’가 이어졌다.   이탈리아 실내악단 ‘이 무지치’를 비롯해 루마니아 ‘야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 ‘하이델베러그 쳄버오케스트라’, 모나코 왕실소년합창단, 우크라이나 ‘국립 크림 스테이트 얄타 심포니’, 롤랑디용, 부르노 카니노, 척 맨지오니, 서혜경, 장한나, 금난새와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국내외 정상급 연주자들이 전주를 방문, 지역문화를 풍성하게 장식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전주의 정신을 찾자, 전주학의 태동 ●2005년은 향토문화의 정체성 찾기 노력이 돋보였던 해다. 전주역사박물관이 처음으로 전주학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시키기 시작했다. ‘전주지역사 연구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열린 제1회 전주학 학술대회에서 한국학의 한 부분으로서 지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주 시각에서의 전주학 연구 필요성을 대두시킨 것이다.   전주역사문화학회의 창립 역시 지역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전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뿌리를 확인한 ‘전주의 성씨에 대한 재인식’에서는 전주라는 도시 전체를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전북역사문화학회는 학계 전문가가 중심이 아닌, 향토사학자와 일반 시민들이 기반이 되어 더욱 주목받았다.   한편, 문화재에 대한 인식 부족과 관리 소홀로 빚어진 태조 어진 훼손 문제는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보물 제931호인 태조 이성계 어진이 훼손됐다 무단 수리된 것으로 밝혀졌던 것. 특히, 관리주체인 전주시가 이를 알고도 5년 넘게 은폐해 왔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태조 어진을 서울로 이전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 까지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태조어진의 거취는 아직까지 문화재청과 전주지역의 여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미술계에서는 공모전 부작용과 선심성 행정으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제1회 온고을미술대전 특선 수상작이 표절작으로 드러나고, 제37회 전라북도 사진대전이 집행부의 갈등으로 다시 치러졌지만, 공모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커졌다. 여기에 2005국제문화관광상품엑스포 대상작 선정과정에서 제기된 의문이 명확하게 풀리지 않으면서 지역 공모전 점검과 권위있는 공모전에 체계적 육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다.   반면, 증가하고 있는 공모전 속에서도 제6회 익산 한국공예대전 전국공모전과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기념 공모전 등은 전국규모의 대회로 확실하게 자리잡기도 했다.   ※현대무용단 사포가 20주년을 맞는 해였다. 현대무용단 사포의 20주년이 전북무용계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척박한 지역춤판에서 전국을 무대로 실험성 있는 작품을 발표해 온 사포의 지난 세월은 곧 전북무용의 역사며,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이슈를 주소재로 무게감 있는 무대를 펼쳐온 만큼, 20주년 기념신작으로 내놓은 ‘그대여 돌아오라’ 역시 서사성과 서정성을 동시에 갖춘 무대로 호평을 받았다.   -공공미술, 시민의 품으로 들어오다 ●2006년에는 문화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객을 찾아가는 문화활동이 크게 늘어난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특히, 미술 분야의 외연확장은 2005년에 이어 계속 되었다. 전주와 군산을 중심으로 전시공간이 늘어났고, 미술의 영역을 확장해내는 공공미술 작업도 곳곳에서 이뤄졌다.   미술을 공공의 장소로 확대시키고 일상생활의 행위로 확장시켜내는 공공미술 작업은 전주와 군산, 고창 등지에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군산 해망동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공공미술추진위원회와 문화광광부가 진행한 ‘소외지역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 미술사업’으로 선정되어, 해망동 곳곳의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고, 주민들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문화공간과 미술품을 설치했다. 고창군 부안명 안현마을도 문화우리의 문화해비타트로 마을 공간이 새롭게 디자인됐고, 전주의 용머리 고개는 전북민족미술인협회 회원들의 손길로 더욱 풍성한 볼거릴 갖게 됐다.   프로젝트 그룹 동문은 군산의 역사성과 지역성에 기반을 둔 작품들을 통해 지역의 언어를 미술로 표현해내는 작업을, 독립기획자 구혜경 씨는 전주고속버스터미널에 미술을 입혔다. 전주국제행위예술제가 객사 등 도심으로 뛰쳐나온 것도 미술의 공공성과 대중성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공공미술에 대한 작가나 시민들의 이해부족과 개념 미정립으로 공공미술에 대한 시각은 분분했다.   문화공간도 많이 늘어났다. 5월에는 진안군 마령면에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가 문을 열어, ‘계남마을 사람들’, ‘마이산으로 가다’ 등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냈다. 전주 푸른안과는 병원내에 ‘문화공간 푸른’을 마련했고, 전북대 앞에는 ‘갤러리 공유’가 대학생들과 문화로 소통하는 공간을 지향하며 개관했다. 초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도청사 갤러리’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연극에서는 전북연극협회가 만든 ‘가인 박동화’가 가장 큰 수확으로 꼽힌다. 전북 현대연극의 역사로 불리우는 고 박동화 선생을 무대 위에 부활시킨 이 작품은 지역의 연극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더 큰 의미를 남겼다.   ※2006년 4월 25일 최명희 문학관이 개관하면서, 활발한 활동으로 전국 문학관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전주지역 1호 문학관인 최명희 문학관은 최명희와 그의 작품을 새롭게 조명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문단의 교류활동을 이끌어냈다. 최명희의 단편소설을 조명하는 월례문학세미나와 혼물문학제 등을 바탕으로, 각종 세미니와 전국작가회의 초청행사를 진행하는 등 개관 반 년 만에 문화계의 소통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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