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 |
[문화저널과 함께 했던 내 젊은 날의 추억] 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관리자(2007-12-24 19:16:36)
-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너는 게으른 청춘을 채찍질 하는 스승이었으며, 갈 곳 잃어 방황하는 나를 따뜻이
손짓하여 품어준 둥지였다.
끝도 없고 시작도 모를 열등감과 자괴감에 허우적거리며 날마다 술잔을 들어
흥청이고 무너져 내릴 때, 너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별다른
희망도 열정도 없는 맹탕 같은 내 청춘에 너를 만난 건 이상한 행운이었다. 나는
밑천도 없이 고작 건방진 젊음 하나로 열등과 교만을 넘나들며 제 삶을 아무렇게나
부리고 있었으니, 너는 내 노력과는 별다른 인과관계 없이 주어진, 말하자면 뜻밖의
횡재였던 것이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사람이 있던 문화저널에서
살았다. 그것만으로도 너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잊혀지지 않는 청춘의 방점과도 같은
것이다.
문화저널을 생각하면 나는 사람 냄새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나도 그곳에 사는
동안엔 사람 냄새 풍기며 시들하던 청춘에 물주고 다시 꽃같이 예쁘게 웃고 일어섰을
것이다. 나를 기억하는 모든 문화저널의 중심과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아, 부디
꽃같이 환했다, 그렇게 말해주오. 그 시절 꽃 같던 나와 그대들의 풍경이 아니라면, 내
20대 후반의 젊음이 얼마나 황량할 것인가
내가 있던 2000년~2004년까지의 문화판은 격동의 시간이었다. 내 손으로 뽑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맞물려 있던 시기였고, 우리 사회 주류와 비주류가 한바탕
자리를 바꾼 신명나는 시기였다. 운동(movement)의 이념이 지고, 신자유주의 물결이
밀려들고, 경쟁과 자립이 강조되고, 지역자치가 되살아나면서 문화판도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는 이른바 민간위탁, 책임 경영 등의 화두가 유행처럼 번졌고,
효율과 경쟁력이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그 속에서 수혜를 받는 이들도 생겨났고, 여전히 권력에 가려지고 경쟁에 치여
신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적당히 스스로 수혜를 쟁취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했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70년대와 80년대에 문화저널 선배들과 함께 가난을 나눠먹고 좋은 시절을
약속했던 동지들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문화저널이 권력이 되었다고는 했지만, 절대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입만 살아
누구를 비판하고 편들고 신랄하게 욕도 했다. 그것이 유효적절한 것이었는지, 그것이
결정적인 울림이 되어 문화판을 뒤흔들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속에서 제 잇속을 차리진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가난한 문화저널. 가난은 버리지 못해도, 사람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문화저널=사람’이다. 문화저널을 통해 나를 알고 인연을 맺은 그 모든 사람들, 내
재산의 팔할은 바로 그들이다.
문화저널 창간 20년, 내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