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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
[문화저널 창간 20주년을 축하하며] 청춘의 기억, 전북의 빛깔
관리자(2007-12-24 19:03:38)
청춘의 기억, 전북의 빛깔 ●아주 가끔 서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비디오 테잎을 꺼내 틀어볼 때가 있다.   ‘전북만화경’, ‘생방송 오늘도 좋은 아침’, ‘JTV사랑방’. 이제는 전라북도 시청자들도 잊으셨을 프로그램 제목들. 천박한 시각, 거친 편집, 부정확한 원고, 게다가 성우가 없어 직접 읽은 목소리를 듣자면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그 속에는 아직 순수했던 내 모습과 사심 없이 열심을 다했던 청춘의 흔적, 전주와의 인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0년 전 봄, 나는 전라북도에 새로 생긴 방송사 PD가 되어 일가친척 하나 없는 전주 땅에 발 딛고 살게 되었다. 낮엔 바빴고, 밤엔 정신없이 즐거웠다. 어제는 사장님이 점심 사시고, 오늘은 국장님이 저녁내시며, 내일은 선배들이 대면식 겸 술 한 잔. 이런 식이었다. 게다가 명 PD이자 훌륭한 트레이너였던 국장께서는 전주와 인연이 별로 없는 PD들에게 공식적으로 전라북도 곳곳을 유람할 기회도 주셔서 틈만 나면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녔다. 30분 만 나가면 들, 1시간 이면 산, 두 시간 가면 바다. 동으로 덕유산, 지리산이요 서쪽으로 가면 지평선에 갯벌. 곳곳마다 어찌 먹을 것들도 많고, 멋으로 꽉 찬 명인, 명창들이 많으신지 그해 봄, 여름은 다시 올 수 없는 호사의 나날이었다. 꿈같은 세월이 흘러 가을, 개국을 맞게 됐고, 곧 닥쳐온 외환위기 보다 더 고통스런 수습사원의 길이 이어졌다. 당시 나는 입사 6개월 만에 선배들과 함께 시사 프로그램을 1주일에 하나 씩 제작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전라북도를 잘 모른다는 원초적 결핍. 그때 내게 전주, 전라북도, 나아가 호남의 사람, 문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눈을 뜨게 해준 교과서가 있었으니 바로 지금까지 구독하고 있는 <문화저널>이다. 흑백의 표지에 조금은 촌스러운 편집, 토박이들의 고집스런 목소리들이지만 맨들맨들한 서울내기들의 얘기와는 다른 투박하고 정겨운 모습이 좋았다. 김용택 시인의 '촌놈 극장에 가다' 연재를 재미있게 읽었고, 감수성 넘치는 박남준 시인의 산문들을 만났으며, 그중에도 옹기쟁이 이현배의 깊은 사유가 담긴 수필을 참 좋아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초짜 PD에게 <문화저널>은 이른바 ‘아이템’ 창고이기도 했다. 생방송 정보 프로그램의 인물, 문화 코너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는 거의 탐독 수준이었다. 첼리스트 김홍연 선생은 문화저널의 ‘뜨락음악회’가 계기가 되어 그의 음악, 첼로에 대한 사랑을 다루게 되었고, 새천년맞이로 들떠 있을 때 전주의 큰 어른 작촌 선생님의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으며, 동부시장 막걸리집의 단골 손님 박민평 화백, <예사랑>의 유명상·천성순 부부, 시인 안도현 역시 <문화저널>이 선물한 소중한 인연이다. 3년의 전주 생활을 끝내고 서울에 와서도 즐거움은 어어졌는데 국악 프로그램을 맡아 연출하는 동안 전통예술의 본고장에서 매달 날아오는 <문화저널>은 거듭 읽고 밑줄 그어야 할 텍스트가 돼 주었다. 서용석, 류명철, 장금도 같은 명인, 명창의 삶은 귀한 울림이었고, <전라도의 가락, 전라도의 춤> 공연 때 중계차를 배정받아 전주에 내려가 박복남 명창의 수궁가 한 대목을 HDTV로 기록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멋대가리 없이 뻣뻣하기만 한 내게 전통의 아름다움과 고을 마다 감추인 깊은 맛과 멋을 감별할 약간의 감각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지난 10년 <문화저널>이 보내준 선물 덕택이다.   온통 서울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글로벌 시대, 서울에 완당이 살았다면 전주에 창암이 계셨고, 메뉴얼대로 만드는 궁중음식이 있다면 제철 나는 푸짐한 재료로 풍성함과 즉흥이 넘치는 전주 한정식이 있듯이 <문화저널>은 ‘표준말’에 휘둘리지 않는, 이 시대 어디에도 없이 고유한 언어로 빚은 ‘전북의 빛깔’이다. 주소를 여러 번 옮기는 동안에도 <문화저널>을 끊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바람이 있다면 문화를 다룰 때 팩트에 충실하고, ‘전주만의 주장’이 아닌 더 넓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전통문화에 관한 기사는 더욱 세심하게 살펴 정확하게 기록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후대가 연구 자료로 삼을 만한 권위 있는 지역 저널의 전범으로 세세년년 우뚝하길 바란다.       표지에 깃을 달아 한결 멋스러워진 <문화저널>에서 요즘은 최승범 선생님의 ‘풍미기행’을 즐겨 읽는다. 입맛마저 표준화된 서울에서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호남의 맛, 언어를 만나면 입에 단침이 고인다. 그나저나, 이 가을 전동성당 건너 경기전 뜰이 은행잎으로 가득할텐데 경원동 ‘새벽강’ 건너 밤새 마시고, 남부시장 콩나물 국밥에 모주 한 사발 하고 싶다. 김일중/ JTV 전주방송 PD, KBS에서 <국악한마당> <싱싱일요일>, <KBS 공사창립 30주년 DTV특별기획 5부작 ‘소리’>, <KBS일요스페셜 ‘자이니치(在日)’의 축제>, <KBS스페셜    ‘세마을 이야기, 농촌은 무엇으로 살아남는가>등을 연출했으며 현재 한국방송플러스(주)의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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